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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 | | | 무애 | | ㅣ 기사입력 | 2012/07/20 [11:32] |
| | | 윤회 (輪廻)
/李時明
하느님이 보우하사 자비로운 땅-자지(慈地)의 영기(靈氣) 받고 보배로운 땅-보지(寶地) 금수강산 품에 나서 꿈결같은 한 세상, 구름처럼 머무르다
푸른 이끼 서린 숲 속,온기 그윽한 보지(寶地)자락 깊은 속 곳에 안겨 혼(魂)은 천공(天空)으로 돌리고 백(魄)은 지공(地空)으로 돌아가
오척단신 똥오줌보 비게덩이 한 줌 거름되어 썩어 썩어지고 영겁의 시공(時空) 감아 돌다 천고(千古)의 세월 내어 딛고
먼-훗날, 햇살 눈부시게 아롱진 날 이름없는 촌부의 후생(後生) 빌어 살포시 꽃몽우리 피어나듯, 다시 다물국 해동조선 땅에 오리라.
2006.06.21. -[多勿 / 樓悟]-無碍堂 ----------------------
* 다물국(多勿國) :
다물(多勿)이란...
「다(모두) 무르다」라 하여 「되물린다」「되찾는다」 「되돌려 받는다」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우리 역사에 이 다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BC 590∼BC 545년 사이에 재위했던 단군조선 제38대 임금[檀帝] 「다물(多勿)」부터였다.
잘 알다시피 단군조선은 BC 2333년 제1대 단군「왕검」으로 시작되어 BC 238년 제47대 단군 (古列加)에 이르기까지 2,096년 간 동북아 대륙을 호령했던 대제국이었다.
이 단군조선 38대 단제가 바로 「다물」이었으며 이 때가 우리 민족사에 있어 흔히「남북 2만리, 동서 1만리」의 강역(彊域)이라 하여 동북아 전체를 아루르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다.
오늘날 남북 2만리, 동서 1만리의 강역도를 다시 그려보면 그 경계가 동으로는 동해와 러시아 연해주, 남으로는 일본과 대만, 서로는 중앙아시아, 북으로는 내몽고에 이르는 광활한 아시아 대륙 전체를 포용한다.
우리나라 학계 일부에서는 이러한 강역도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의 상황이라면 전혀 허황된 것만은 아니다.
이 시대 아시아 지역에서는 수많은 부족국가들이 흩어져 존재 했는데 대부분의 군소 부족국가들은 정치, 군사, 경제, 문화적으로 보다 우수하고 강력한 부족국가를 중심으로 느슨한 형태의 연합국가 (부족연맹국가, 제휴국이라고 함)를 형성했다가 해체하는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 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단군조선이 제38대 단군, 다물 때까지 1,500년 이상 강력한 국가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당시 지역 내 모든 군소 부족국가들은 어떤 형태로든 이 단군조선과 직간접 여러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북 2만리, 동서 1만리」의 강역론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무조건 어불성설이라고 부정하고 배척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출처 : http://guksundo.cu.ac.kr/duml.htm
* 다물(多勿)의 현대적 의미.
한인 한웅 단군시대 강역도
BC 108년 한(漢)나라에 의해 위만조선(衛滿朝鮮)이 멸망하면서 2226년 간 계속된 고조선은 막을 내리게 되고, 여러 형태의 부족국가들이 할거하게 된다. 이 전국(戰國)시대를 거쳐 BC 50년을 전후하여 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BC 37년 북부여 땅에서 일어나 만주 일대를 장악한 나라가 고구려이며 이 고구려의 건국정신이 바로 다물이다.
즉,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단군조선의 위대한 역사와 강역을 회복하겠다'는 기치를 들고 건국에 나섰으며 연호를「다물도(都)」라 지었다. 다물정신은 진취적이며, 그 정신으로 일으킨 고구려의 기상과 국력은 강대했다.
백제 역시 BC 18년 건국 직후부터 한반도 서해안을 넘어 중국 발해만 및 양자강 하구의 동지나 해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넓히는 한편 고대 일본의 여러 세력을 지배하는 커다란 해상제국(海上帝國)으로 성장한다.
백제의 국력이 융성하기 시작한 234년 고이왕(古爾王)때부터 479년 동성왕(東成王)까지, 240여년 간 백제는 때마침 중국대륙이 후한 이후의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로 대혼란기를 겪고 있음을 틈타 적극적인 대륙진출 전략을 구사한다.
백제는 시조인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 동명성왕과 한 형제였듯이, 각기 건국 이후에도 한결같이 고조선시대의 역사와 강역회복을 강력히 추진하여 한때는 고구려 이상으로 거대한 영토와 해상패권을 장악하였으니, 바로 백제의 다물시대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침공으로부터 시작된 신라의 삼국통일 작업은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큰 고비를 넘긴다. 그러나 신라는 오히려 삼국통일 이전보다 당(唐)으로부터 더 낮은 수준의 신국(臣國) 취급을 받게 된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나당연합 관계의 망상에서 깨어나 신라의 주권회복은 물론 백제, 고구려, 실지(失地)수복에 감연히 나선다. 669년 2월부터 시작된 신라의 대당투쟁은 673년 5월 예성강, 임진강 전투에서 당의 주력부대를 섬멸하는 것을 고비로 674년 9월 당군을 완전히 축출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다. 이러한 것을 거시적인 민족사 측면에서 볼 때 그때까지 뚜렷한 민족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적대적 관계을 유지했던 삼국이 이로부터 분명하게 단일 강역 위에서 단일 혈통, 언어, 민속 및 역사와 전통을 함께 하는 강력한 민족공동체를 형성, 발전시켜 왔다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또한 신라가 당시 국력으로써는 엄두가 나지 않을 당과 정면대결에 과감히 나서고, 끝내 당을 이길 수 있었던 정신적 배경에는 신라도 한때 대륙을 경영했던 자신감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한다.
고구려 멸망(668)후 대조영(大祚榮)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옛 고구려 땅에 건국된 나라가, 대진국 발해(698∼926)이다. 발해는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고구려 이후 처음으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지(遺志)를 이은 자주적 독립국가였고 당·신라·일본과 대등하게 교류하며, 220여년간 만주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민족사의 중요부분임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다.
발해의 원래 국명이 대진(大辰)이었음도 옛 단군조선의 3조선(진,번, 막)을 총괄적으로 통치한 나라가 진조선(辰朝鮮)이었기에 그 이름을 계승한 것이요, 그 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며, 수도를 다섯 군데나 두고 만주일대를 차례로 장악해 나갔던 것은 그 건국과 국가 발전철학의 밑바탕에 무엇보다 고구려 고토회복의 정신이 깔려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역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려」로 했다는 것은 고려사 태조 왕건조에서부터, 분명히 밝혀지고 있는 사실(史實)이다. 그리고 국가기상이나 대외정책면에서도 이러한 고토회복의 정신은 고려 중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
1360년대에 접어들어 고려가 1258년 이후, 100년 가까이 대국으로 받들던 원(元)이 급격히 쇠퇴하고 한민족에 의한 명(明)의 건국이 본격화 되자, 공민왕은 즉시 고려가 원의 속국이 아닌 자주국임을 선포한다.
조선 건국초인 1393년 새로이 중원의 패자로 떠오른 명(明)과 신생 조선 사이에 양국간의 관계정립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자 공신이자 당시 조정을 주도했던 정도전, 남은 등은 요동정벌을 주장한다. 처음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던 태조 이성계도 정도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전시동원령을 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에 의해 정도전 일파가 제거됨으로써 무산된다. 그렇지만 세종대왕때는 김종서(金宗瑞)장군이 4군6진을 개척하였고, 세조때에는 남이(南伊)장군이 수 차례 압록강 북쪽 여진을 정벌하여 한 치의 땅이라도 이민족에 의한 불법지배를 용납하지 않는 기상을 보였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10년 가까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온 효종대왕은 만주대륙을 잃고, 이제는 그 땅의 지배자에게 속국으로 전락한 민족사의 치욕을 씻고자, 거대한 북벌계획을 추진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숱한 독립운동 중에서도 철학, 정신, 행동력을 감안한다면, 단연, 단재-신채호(申采浩) 선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우리역사 찾기 《조선상고사》 편찬은 바로 단군조선, 고구려, 발해를 이어온 대륙사관에 입각한 대고구려 주의적 민족사 복원이라는 거시적 독립운동의 틀을 제공한 것이요, 뒤이은 '다물단'의 결성과 활동은 그러한 역사인식하의 독립투쟁이 가장 한민족다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일제시대 다물정신은 조국광복과 역사복원의 의미를 압축하고 있음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다물의 유래와 의미를 말 뜻 그대로 종합하면...
'지난, 1,000년간 잃어버린 만주 땅을 되찾자'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만주가 우리 민족사에 어떤 의미이기에 고구려 건국 당시부터 이 정신을 내세웠으며, 그 뒤, 시대와 왕조를 떠나 역사의 구비마다 이 땅을 되찾고자고 나선 것일까?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만주 땅이 우리 민족에게는 영토 이상의 커다란 의미를 지닌 대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만주를 잃어버리면서 우리 민족사는 전과는 판연히 다른 모습으로 전개된다.
첫째, 유구한 민족사의 계승발전이 아니라 정체(停滯)와 단절의 역사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뿐아니라 우리민족의 역사를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에 예속된 주변부의 역사, 하위의 역사로 인식하기까지 만들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선동조론, 내선일체론등의 역사 단절로까지 이어졌다.
둘째, 자주(自主)의 역사가 사대(事大)의 역사로 뒤바뀌게 되었다는 점이다. 만주를 잃은 고려 이후부터, 우리민족사는 그 만주의 주인을 명목상이 아닌 실질상의 상국(上國)으로 섬기는 비자주(非自主)의 역사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조상들은 발해 멸망으로 만주를 상실한 이후, 지난 1,000년 간 그렇게 끈질기게 이 땅의 회복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다물은 무엇을 되찾자는 것이고 또 어떤 의미, 어떤 목적성을 가지는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한 마디로 영토적 의미의 '만주 땅 회복'이 아니라 그 땅과 함께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바른 역사·정신·문화·특질을 되찾자는「정신적 다물」이다.
▣ 강기준(1997)의 '다물, 그 역사와의 약속'에서 발췌되었음.
| | | | | | 기사입력: 2012/07/20 [11:32] 최종편집: ⓒ 두들러doodler | |
두들러doodler
환골탈태하는 한반도 대운을 맞아... | | | | 무애 | | ㅣ 기사입력 | 2012/07/20 [11:14] |
| | | 대축원 (大祝願)
환골탈태하는 한반도 대운을 맞아...
오랜 숙면에서 깨어나 ... 욱일승천-환골탈태하는 한반도 대운 우리의 국운을 염원하며... ...... ......
이번에 다가오는 총선-대선은 역대 그 어느때 보다 가장 중요한 시기이고, 우리 민족의 오랜 우환(憂患)과 고질적인 암덩어리가 되어버린 정치적 풍토병들을 과감하게 일소하고 청산하는 그런 새역사의 첫 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저런 각종 이권과 이합집산으로 물들고 주고 받는 정치적인 커넥션에 발목 잡히지 않는 역사관과 세계관이 바로 선 인재 이 시대가 바라는 새로운 인물...!
다각적으로 원만한 삶을 실현하고 행하는 실천적인 인물 가문, 학력, 경제력, 학덕, 지덕, 그리고 원만한 가정... 모두 두루 겸비하고 항상 겸양과 공익을 먼저 우선 생각하는 인물
세계 강대국들 앞에 나서도 하등 손색이 없는 인물 그들 앞에 나서도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인격적으로도 하자가 없는 인물
세계 각국과 수많은 강대국들의 수뇌부들도 함부로 업신여기지 못할 인물 그런 참신하고 새로운 인물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만한 인물감을 엄중히 골라서 잘 뽑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대국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보다 성숙된 의식으로 발돋움 하여 스케일을 넓히고 생각과 견해의 틀을 높여서...
인맥, 학맥, 연고등에 연연하지 않고 참된 인물감을 물색하고 고를 수 있는 실다운 지혜를 가져야 할때입니다.
단순히 국수주의 적인,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온 세계가 모두 수긍하고 능히 인정하면서 시선을 모아 주목을 하는 실질적인 소양과 능력을 겸비한 글로벌리티한 인물
-그런 인재가 나와서 세계적 관점과 넓은 안목으로, 바야흐로 지구촌 시대를 여는 자질과 능력을 소유한 사람
새로운 시대의 장을 여는 데 있어서 견인차 역할을 할 그런 월드스타적인 그런 인물을 보다 성숙된 국민 의식으로 엄선해서 잘 뽑아야 할 것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남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무애당(無碍堂) 합장..._()_ _()_ _()_
| | | | | | 기사입력: 2012/07/20 [11:14] 최종편집: ⓒ 두들러doodl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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