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경(維摩經)
언어 문자(言語 文字)는
이 형상의 세계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언어와 문자에 붙잡히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음과 두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완전한 언어나 문자라 해도
거기에 집착을 하게되면
영원히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리석음과 두려움이 없는 것,
이 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다.
-<유마경(維摩經)>-
유마힐(維摩詰)
유마힐(維摩詰)의 설법 4
절대 평등의 경지
유마힐은 보살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보살은 어떻게 해서 차별을 떠난 절대 평등의
경지(不二法門)에 듭니까? 생각한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법자재(法自在)보살이 말했다.
“생과 멸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멸하는 일도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곧 절대평등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덕수(德守)보살이 말했다.
“나와 내 것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내 것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없다면 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묘비(妙臂)보살이 말했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보살의 마음과 자기의 깨달음만
을 구하는 성문(聲聞)의 마음은 서로 대립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공하고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때, 보살의 마음도 성문의 마음도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사자(師子)보살이 말했다.
“죄악과 복덕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만약 죄악의 본
성(업장)이 복덕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알고, 금강석과
같은 지혜로써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며, 거기에
속박을 받거나 해방되는 일이 없으면, 이것이 절대 평등
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나라연(那羅延)보살이 말했다.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은 서로 대립해 있습니다. 그러나
세간의 본성이 공하다는 것을 알면 이는 곧 출세간입니
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들고 나는 일이 없으며, 넘치
고 흩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선의(善意)보살이 말했다.
“생사와 열반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생
사의 본성을 이해하면 생사는 이미 없는 것입니다. 거기
에는 결박하는 일도 없으며, 그로부터 벗어날 필요도 없
고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
다고 합니다.”
보수(普守)보살이 말했다.
“아(我)와 무아(無我)는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我)도 알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무아를 알 수 있겠습
니까. 자기 본성을 보는 사람은 이 두 가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뇌천(雷天)보살이 말했다.
“지혜와 무명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명의
본성은 곧 지혜입니다. 그렇다고 이 지혜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무명을 떠나 평등하고 상대되는 것이 없
으면 이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적근(寂根)보살이 말했다.
“부처님과 교법과 승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
로 부처님은 곧 교법이고, 교법은 곧 승단입니다. 이 삼보
(三寶)는 어느 것이나 변함이 없는 진실이 나타난 것으로
서 허공과 같습니다. 모든 것도 이와 같아서 이것을 잘 행
하는 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복전(福田)보살이 말했다.
“선행과 악행과 보다 뛰어난 선행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행위의 본성은 공(空)이며, 선행
도 없고 악행도 없으며 보다 뛰어난 선행도 없습니다. 이
세 가지 행위에 있어서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 것이 절
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
화엄(華嚴)보살이 말했다.
“자기를 고집하기 때문에 나와 남을 구별하게 됩니다. 그
러나 자기의 본성을 보는 자는 나와 남을 구별하는 일이
없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식별하
는 것도 식별되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절대 평등의 경
지에 든다고 합니다.”
덕장(德藏)보살이 말했다.
“집착한 마음으로 취하고 버리면 두 가지 것이 서로 대립
합니다. 그러나 집착하지 않으면 곧 취사(取捨)가 없습니다
취사가 없으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월상(月上)보살이 말했다.
“어둠과 밝음은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어둠과 밝음
이 없으면 곧 대립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마음의 작
용이 다해 적정(寂靜)한 경지에 들면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는 것과 같이 모든 존재의 현상도 그와 같기 때문입니
다. 이를 알고 평등할 수 있으면 절대평등의 경지에 든다
고 합니다.”
보인수(寶印手)보살이 말했다.
“열반을 바라는 것과 세간을 싫어하는 것은 서로 대립하
고 있습니다. 만약 열반을 바라지 않고, 세간도 싫어하지
않는다면 대립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박이 있으면 해
탈이 있지만 본래부터 결박이 없다면 해탈도 없기 때문
입니다.
결박도 해탈도 없으면 바라는 일도 싫어할 일도 없습니
다. 이것을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든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 보살이 설한 다음 문수보살이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말도 없고 말할 것도
없으며, 가리킬 것도 식별할 것도 없으며, 일체의 질문과
대답을 떠난 것, 이것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마힐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기 생각한 바를 말했습니다. 이제는 거사님
의 차례입니다. 어떻게 하여 보살은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갑니까?”
이때 유마힐은 침묵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이것을 본
문수보살은 감탄하여 말했다.
“훌륭합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말과 문자조차도 필요
없는 경지,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드
는 것입니다.”
[維摩經 不二法門品]
*유마경(維摩經) "유마경"은 "승만경(勝?經)"과 함께 불교의 재가주의(在家主義)를 대표하는 경전이다. 원명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다. 줄여서 보통 "유마힐경(維摩詰經)" "유마경(維摩經)"이라 한다. 유마힐(維摩詰)은 "유마경"의 주인공으로 부처님의 속제자다. 인도 비야리국의 장자로 재가에 있으면서 보살행업을 닦았다. 수행이 높아 불제자도 따를수 없었다고 한다. 흔히 유마거사라고 한다. 스토리의 줄거리는 재가불자인 "유마힐"이 소승적 마인드를 버리지 못한 불제자들을 각성시킨다는 것이다. 유마거사는 어느날 꾀병을 앓는다. 그러자 부처님이 십대제자들에게 문병을 갈 것을 권한다. 아무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이전에 유마거사에게 한번 크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수보살이 가기로 했다. "유마경"은 유마와 문수의 절묘한 문답행진이 뼈대를 이룬다. 대개 문수가 질문하고 유마가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문수보살은 대승의 깊은 교리인 불이(不二)법문을 깨닫게 된다. 또 유마가 본래 병이 없어도 중생이 병을 앓으면 보살도 병을 앓는다고 했다. 중생과 보살이 동심일체가 된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교리상으로는 반야공관(般若空觀)의 사상에 따른 대승보살의 실천도를 강조한다. 아울러 재가신도의 종교적 덕목을 밝히고 있다. 현존하는 한역은 3가지이다. 구마라습(鳩滅什)의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지겸(支謙)의 "유마힐경(維摩詰經)" 2권, 현장(玄?)의 "설무구칭경(說無坵稱經)" 6권 등이 있다. (현대불교 미디어센터 ⓒ 2005) |
- 미륵보살님
- 깨달음은 몸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마음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적멸(寂滅)이야말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모든 모양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상과의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관찰하는 일이 없는 것도 깨달음이며
생각이 없으므로 행하지 않는 것도 깨달음입니다.
그릇된 소견을 끊어 없앤 것도 깨달음이며
명상을 떠난 것도 깨달음이며
욕망을 막는 것도 깨달음이며
안팎의 모든 경계에 탐착하지 않는 것도 깨달음이며
진여에 따르는 것도 깨달음입니다.
사물의 본성에 머무는 것도 깨달음이며
사물의 진실한 존재에 이르는 것도 깨달음이며
마음과 마음이 파악하는 대상에서 떠나
분별하지 않는 것도 깨달음이며
허공과 같아서 평등한 것도 깨달음입니다.
생하고 지속하며 멸하는 일이 없으므로
무위(無爲)도 깨달음이며
중생의 마음과 행을 아는 것도 깨달음이며
안팎의 경계를 만나 거기 영향을 입지 않는 것도 깨달음이며
모양과 빛깔이 없으므로 일정한 위치가 없는 것도
깨달음인 것입니다.
거짓 이름도 그 이름과 글자가 공한 것이므 깨달음이며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는 것도 깨달음이며
항상 스스로 적정(寂靜)하여 혼란하지 않음도 깨달음입니다.
미혹을 떠난 경계도 그 본성이 깨끗하므로 깨달음이며
모든 것이 평등하므로 다르지 않음도 깨달음이며
비유할 수 없으므로 비교할 길이 끊긴 것도 깨달음이며
모든 법은 알기 어려운 것이므로 미묘함도 깨달음인 것입니다.`
부처님, 유마힐이 이같이 설할 때 천신들도
진리를 깨달은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維摩經」
유마경(維摩經) 해설
반야부 계통에 속하는『유마경(維摩經)』은
재가거사인 "유마힐(維摩詰)"을 주인공으로 한 경전이다.
불교경전 중에서 재가자를 주인공으로 한 경전은 『유마경』과 승만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승만경』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두 경은 매우 중요한 경전으로 간주된다.
『유마경』에서는 출가 중심의 왜곡된 불교를 철저하게 비판하여 대승불교의 진의를 밝히고 있다.
유마거사가 살고 있는 바이살리는 중인도 갠지스강 지류인 간다아크강의 연안에 발전된 상업도시로
화폐경제가 발달되었고,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이 넘쳤던 곳이었다.
유마거사는 이 시대의 자유롭고 진취적이며 비판적인 정신을 대표하고 있다.
경의 성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개 1~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경의 주인공인 유마힐은 Vimalakīrti의 음역으로 “깨끗한 이름(淨名)” 또는
“때 묻지 않는 이름(無垢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경의 또 다른 이름인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은 제14장 「위촉품」에서 부처님이 아난에게
“이 경을 불가사의 해탈문이라고 이름한다.”라고 한 것에 근거해서 붙여진 경명이다.
이 경의 내용이 상식이나 이론적인 입장을 초월한 불가사의한 종교적 체험의 경지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마경』은 산스크리트 원전은 없어졌지만,
일부가 월칭(月稱)의 『중론석(中論釋)』이나 적천(寂天)의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에서 인용되고 있다.
대승경전 중에서 유마힐이 언급되는 경전으로는
『불설대방등정왕경(佛說大方等頂王經)』, 『불설월상녀경(佛說月上女經)』등이 있다.
『유마경』의 번역본으로는 고오탄(于闐)어 역 단편과,
페르시아의 한 방언인 소구드(Sogdh, 栗特)어 번역본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티베트 역은 산스크리트 원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한역(漢譯)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불엄조(佛嚴調) 역, 『고유마힐경(古維摩詰經)』 2권(187년)
- 지겸(支謙) 역,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 2권(223〜253)
- 축숙란(竺叔蘭) 역, 『비마라힐경(毘滅詰經)』 3권(296년)
- 축법호(竺法護) 역, 『유마힐소설법문경(維摩詰所說法門經)』1권(303년)
- 사문 지다밀(沙門 祗多密) 역, 『유마힐경(維摩詰經)』 4권(미상)
- 구마라집(鳩滅什) 역,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3권(406년)
- 현장(玄裝) 역,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권(650년)
이 중 현존하는 것은 지겸, 구마라집, 현장 역본이다.
한역 중 티베트 역과 가장 일치하는 것은 현장 역이지만,
전통적으로 구마라집 역본이 가장 많이 읽히고 있다.
『유마경』에 대한 주석서로는
인도에서 세친(世親)의 주석서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중국의 주석서로는 구마라집의『유마경소(維摩經疏)』,
승조(僧肇)의『주유마힐경(註維摩詰經)』,
혜원(慧遠)의『유마힐기(維摩詰記)』,
지의(智顗)의『유마경현의(維摩經玄義)』,
지의(智顗)설 담연(湛然)약(略)의『유마경약소(維摩經略疏)』,
지원(智圓)의『유마경약소(維摩經略疏)』,
『수유기(垂裕記)』, 길장(吉藏)의 『정명현론(淨名玄論)』,
『유마경의소(維摩經義疏)』, 규기(窺基)의 『설무구칭경소(說無垢稱經疏)』,
전등(傳燈)의 『유마경무아소(維摩經無我疏)』,
양기원(揚起元)의 『유마경평주(維摩經評註)』,
정연(淨挺)의 『유마힐경요설(維摩詰經饒舌)』등이 있다.
출가중심주의의 형식적인 부파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대승불교의 진의를 드러내고 있다.
유마거사는 세속에 있으면서도 대승의 보살도를 성취하여
출가자와 동일한 종교 이상을 실현하며 살고 있었다.
유마거사는 방편으로 병이 들었는데, 문병 오는 사람에게 설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러한 사정을 알고
제자들에게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갈 것을 명하였지만,
일찍이 유마거사로부터 힐난을 들은 적이 있는 제자들은
병문안 가는 것을 극구 사양한다.
유마거사는 비록 세속에 있지만, 대승의 가르침을 자각하였기에
10대 제자들과 보살들이 그를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명을 받아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가게 된다.
두 사람은 유형적 상대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대화한다.
유마거사는 기존의 출가중심의 불교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당시 불교의 문제점을 비판 지적하고 있다.
경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실의 국토가 불국토이다. 불국토라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곳이다.
「불국품」에서 “직심(直心), 심심(深心), 보리심(菩提心)이 보살의 정토이다.”
“이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도 청정하다.”라고 하여
정토라는 것은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보살의 실천정신 가운데
이미 표현되어 있으므로 현실국토가 바로 정토라고 하였다.
둘째, 자비정신의 실천이다.
「문질품」에서 “어리석음과 탐욕, 성내는 마음으로부터 내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일 모든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라는
유마거사의 말은 중생과 고통을 함께하는 보살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즉 보살의 병은 보살의 자비에 의한 것이다.
보살은 이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번뇌에 싸인 중생들을 깨달음에로 인도하는 것이 보살이다.
5무간죄, 지옥, 아귀, 축생의 3악도, 탐, 진, 치의 3독에 몸을 던지면서도
이에 속박됨이 없는 것이 보살의 길이다.
셋째 평등의 불이사상(不二思想)의 실천이다.
출가, 재가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정토와 예토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사상을 통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가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실상의 진리는 형상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공의 경지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깨달음은 언어문자를 초월해 있다.
넷째, 중생들에게 모두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
유마거사는 현실의 인간이 비록 번뇌를 가지고 악을 행하고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체의 번뇌가 곧 여래의 종성이다.”라고 하여
불법은 번뇌 가운데 나타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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