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선사(田岡禪師)-남의 등불 부러워말고, 내 등불을 켜라.
전강(田岡)영신선사
전강(田岡)영신선사
남의 등불 부러워말고, 내 등불을 켜라.
인천시 남구 주안동 기린산 용화선원. 이곳은 공장지대다. 예전엔 주위가 염전이었다. 어찌 산 좋고 물 좋은 명당들을 두고,이 곳에 참선도량이 자리했을까. ‘마음 밖 경치’를 구할 것 없다.
1961년, 인천 용화선원을 창건한 전강(田岡)선사(1898~1975)다.
전강은 전남 곡성 입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상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어머니가 일곱 살 그와 젖먹이 여동생을 두고 세상을 떴다. 계모가 들어왔다. 계모로부터 방치된 여동생은 걸음마도 떼어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에겐 늘 밥보다 가까운 게 몰매당하는 것이였다. 전강이 어린 시절 살기 위해 익힌 것은 좀도둑질이었다. 허기를 면하러 콩과 쌀을 훔쳐 먹었다. 그리고 들켜서 죽도록 얻어 맞기 일쑤였다.
14살 때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떴다. 그러자 계모는 자신이 낳은 아들까지 두고 개가해 버렸다. 이 때부터 어린 이복동생을 업고 밥을 빌어먹으려 이모와 고모집을 찾아 나선 전강은 늘 밥 한 술 얻어먹지 못한 채 쫓겨났다. 이런 박대가 너무 서러워 물에 빠져 죽으려고도 하고, 어머니 무덤에 가서 ‘데려가 달라’고 밤새 울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전강은 계모가 개가한 집을 찾아내 문 밖에서 이복동생을 눈물로 떼어 들여보내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 이 때부터 그는 주린 배를 채우려 사냥꾼 조수와 유기공방의 풀무꾼, 행상 등 온갖 일을 했다.
그러다 한 승려를 만나 절에 들어간 그는 제대로 도를 닦기 위해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 행자시절 그는 인물도 뛰어나고 글도 잘하던 두 살 위였던 봉룡사미와 절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해인사에 휴양하러온 예쁜 신여성을 보고 상사병이 든 봉룡사미가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뒤 방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외로운 처지에서 육친처럼 의지했던 봉룡사미가 다비식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는 모습을 보던 전강은 자신과 인연을 맺은 사람은 하나 같이 이렇게 떠나가는 현실에 망연자실했다. 이 때 노승의 게송이 전강의 가슴을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도를 닦는 사람은 머리털 희어지기를 기다리지 말아라./쑥대 속의 무덤은 소년의 무덤임을 알라.”
얼마 뒤, 그는 꿈 속에서 지옥에 빠져 고통 받았다. 너무 놀라 신음하다 깨어난 그는 생사를 넘어서는 일이 너무도 다급해졌다. 소년이라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23살에 참선수행 해탈…10년뒤, 보광서원 "조실"로 추대
정진…또, 정진…게으름엔 ‘불방망이’ 내리쳐...
참선 수행을 통해 해탈해야만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말을 들은 그는 은사 스님에게 참선을 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은사 스님은 그에게 경전 공부부터 차근차근히 하라며 꾸중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강은 평생 책만 보다 언제 생사를 넘겠느냐며 막무가내였다.
결국 그는 ‘무’(無)자 화두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급증이 화근이었다. 병약한 몸으로 화두에 신경을 곤두세우자 머리에 열기가 오르고, 피가 입과 코로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상기병이었다. 그러나 직지사에서, 예산 보덕사에서도 그의 화두 정진은 멈추지 않았다. 핏기 없는 몸으로 죽음을 인 채 구름처럼 떠돌던 그의 발길은 어느 새 고향 곡성을 향하고 있었다. 한 밤에 태안사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계곡 물소리를 듣는 순간, ‘생사의 구름’이 찰나에 씻겨 가버렸다. 온몸의 전율 속에서 전강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바지춤을 내린 전강은 법당 앞에서 시원스레 오줌을 누었다. 막 바지춤을 올리려는데 한 스님이 대노해 다가와 호통을 쳤다.
“천지에 부처의 진신(몸)이 아닌 곳이 없는데, 그럼 어디에다 오줌을 누란 말이냐!”
불과 23살에 견성한 사자가 드디어 포효를 시작했다. 백수들은 사자의 포효만 듣고도 뇌가 파열된다든가.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혜월, 용성, 한암, 만공, 보월 등 당대의 6대 선지식들이 모두 그의 견성을 인가했다.1960년 전강을 찾아 출가한 평택 만기사 주지 원경 스님(64)을 찾았다. 남한노동당 지도자 박헌영의 아들인 그를... 전강은 법제자 송담 선사(76)의 상좌로 맺어주었다.
전강은 법을 거량함에 털끝 만한 틈을 보이지 않았다. 불과 33살의 나이에 천하제일사찰 통도사 보광서원의 조실로 추대됐던 전강은 법에선 은사도 제자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원경의 스승인 송담은 전강이 광주의 한 시장에서 가게를 하면서 키운 제자다. 온갖 뒷바라지를 해줘었지만 제자-송담이 10년 간 묵언(일체 말하지 않음)정진을 끝내고도 끝내 (깨침의) 한소식을 전하지 못하자, 전강은 자식보다 아끼던 그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다음날 송담은 사자의 포효를 시작했다.
용화선원에 연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운문 선사는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한 부처에 대해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한 방망이로 때려 잡아, 개에게 먹여 천하를 태평케 했을 것”이라고 했다. 남의 등불을 우러러보지 말고 오직 자신의 등불을 켜라!고, 하던 부처의 가르침대로 이렇게 진실한 연등을 밝힌 이가 또 있을까.
용화선원의 송담은 스승 전강선사의 육신이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조실 자리를 거부하고 스승 전강의 법신을 여전히 조실로 모신 채, 수좌들을 지도하고 있다. 송담에게 전강은 여전히 ‘스님’이다. 스님은 스승님의 줄임말. 최후의 의지처인 백척간두에서조차 밀어버리고, 분별 망상을 용서 없이 물어뜯어버리는 그 스승의 은혜를 어찌 글로 담을 것인가. /인천/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소개글>
전강선사 일대기 - 견성. 명색의 깨우침인 선문답과 우문우답?
글/(설해)사미니과
수행자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자신의 수행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목에칼이 들어온다 해도 눈 깜짝하지 않을 믿음이야말로 수행자의 진정한 생명이 아닐까?
전강선사의 悟道를 향한 순례야말로 묵숨을 걸고, 자기 수행에 대한 확신을 향해 삶을 던진
수행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만하다. 철저한 자기 실험만이 마침내 해탈의 길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신 선사는 1898년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서모의 따가운 눈초리와 시달림을 받으며 유년을 보낸 선사는
12살에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서모의 재가로 삶의 비애가 산재하고 있는
험난한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사냥꾼의 조수, 일본인 가게의 점원, 풀무간에서의 심부름
그리고, 유기장수 등 16살에 해인사로 출가하기까지의 다양한 삶의 체험으로 인해
선사는 정신적인 성숙을 이룬다.
생에 절망해 본 사람만이 생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처럼
선사는 1913년 해인사로 출가하여 인공스님을 득도사로 응해스님을 계사로 수계하고
영신(永信)이라는 사미로 새로운 삶을 힘차게 살게 된다. 승(僧)으로서 갖춰야 할
여러 가지 위의와 경(經)을 배우던 선사는 친하게 지내던, 봉령 사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목숨의 허망함을 깨닫고 이 때부터 만공스님께 받은 무자(無字)화두를 들고 구도의 길에 오른다.
수행 도중 상기가 되어 피를 토하는 등 못쓰게 된 몸을 이끌고
제산, 용성, 만공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 문하에서 죽기를 각오한 피나는 정진으로
1921년 23살 되던 해, 구름이 걷히고 난 후의 청산이 마침내 산 뼈를 드러내듯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경지를 얻게 된다. 해탈의 희열, 즉은 오도송은 이러하다.
昨夜月滿樓 어젯밤 달빛은 누각에 가득 찼는데
窓外蘆花秋 창밖에는 갈대꽃 가을이로다.
.
佛祖喪神命 부처와 조사도 신명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는구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지 오래되었으나, 이십대 초반에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흔치 않다.
참선뿐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부딪치는 만행과 열정적이고 구도적인 삶을 통해
개오(開悟)에 이르게 된 것이다. 스물 세 살의 젊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은 선사는
운수행각을 하며 당대의 선지식인 혜봉, 혜월, 용성, 한암, 금봉, 만공 스님 등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선문답을 통해, 그의 철저한 견성을 인가받았다.
1923년 25살 되던 해 덕숭산 금선대에서 만공스님께 인가를 받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뜰을 거닐던 만공스님이 하늘의 별을 보며
‘하늘에 가득찬 저 별들 가운데, 어느 별이 전강 그대의 별인고?’ 라는 물음에
선사는 갑자기 땅바닥에 엎드려 손을 허우적거리며 별을 찾는 시늉을 해 보임으로써
선종 77대 법맥을 잇고 전법게를 받았다.
佛祖未曾傳 부처님과 조사가 일찍이 전하지 못한 것
我亦無所得 나 또한 얻은 것 없네
.
此日秋色暮 오늘 가을 빛도 저물어 가는데
猿嘯在後峰 원숭이 휘파람은 뒷산 봉우리에 있구나.
근대 선종의 중흥조였던, 경허(鏡虛) 선사의 오도송에 대한 허물을 지적할 정도로
선지(禪智)가 밝았던 전강선사는 지혜 제일이라는 위명을 드날릴 만큼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비수처럼 날카로운 선지와 우렁찬 사자후가 느껴지는 법문으로
제방의 눈 푸른 납자들에게 영혼의 눈을 뜨게 하셨다.
“인생의 무상함은 찰나다. 이 몸으로 다행히 정법을 만났으니
이 생사해탈 참선법을 닦지 않으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또 알면서 닦지 않으면 더욱 어리석은 것이다.
삭발출가한 수행자는
첫째도 참선이요, 둘째도 참선이요, 셋째, 넷째, 다섯째도 참선이니라.
참선을 열심히 해서
생사대사를 해결하는 것에만 힘쓰는 것이 참다운 수행자다 이 말인 게야.
요새 정진은 게을리 하고서 높은 감투나 쓰려고 덤벙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
주지네, 부장이네, 원장이네, 그런 감투도 수행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
정진들 하란 말여, 정진!
이 뭐꼬! 화두를 참구해서 일대사를 마쳐야 한단 말이네. 다들 알겠는가?”
선사는 서른세 살에 통도사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 수도암 선원,
동화사 선원, 무문과 등 전국 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말년인 1962년 주안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건립하고 주석하시면서승(僧) ․ 속(俗)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밝히라는 법문으로 수행자들의 등불이 되셨다.
법랍 61세, 세수 77세 되던 1975년 1월 13일 오후 2시 법좌에 올라,
如何是 生死苦 인고? : 무엇이 생사의 고통인고?
喝! : 할~!
九九는 飜成八十一이니라.
: 구구는 거꾸로 세어도 팔십일이니라.
라는 법문을 하시고, 그 자리에서 열반에 드셨다.
독자적인 가풍으로 경허, 만공스님의 가신 자리를 채워주셨던
이 정신적인 거인의 육신은 이미 바람과 흙으로 돌아갔지만,
형체 없는 법신은 홀연히 성취한 오도적 삶을 중생에게 회향하고자
오늘도 간절히 상주 설법하신다.
전강선사(田岡禪師, 1898~1975)는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자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이다.
입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용주사 대중들에게
크게 추앙 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강선사의 속성은 정(鄭) 씨이며, 전남 곡성출신으로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로,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오랜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 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며,
특히 100일 동안 자지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전강선사는 만공선사(滿空禪師)를 찾아갔다가
더욱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처음에는 만공선사로의 인가를 받지 못하다가
재발심을 하고 다시 정진하였으며, 마침내는
전법게(傳法偈)를 전수 받으면서 선종 제77대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이후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 등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였다.
1969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하고
용주사 선풍 진작에 크게 공헌하였다.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조실을 역임한 전강선사는
1975년 1월 13일 좌탈입망(座脫立亡)하였다. 전강선사는
특히 수행자들을 위한 수많은 설법 테이프를 남겨 놓았으며,
『전강법어집』이 제자들에 의해 출판되면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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