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Buddha indramang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3일간 사랑.

Demian-(無碍) 2012. 7. 9. 10:08

     일본 교토 고산사 소장 -  원효대사 진영 


▲ 원효 대사의 출생과 수행 

원효(元曉)는 스님으로서 쓰는 법명이다. 
법호는 화정(和靜),
속성은 설씨(薛氏),
초명은 서당(誓幢)이다.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지금의 경산군 자인면)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10세에 출가하였는데 
남달리 총명하여 출가 때부터 스승을 따라 경전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불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 
스님은 경학뿐만 아니라 유학(儒學)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의 선지식인 이었다.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에 주석하고 계신 
보덕 화상(普德和尙)의 강하(講下)에서 
<열반경>, <유마경> 등을 수학하였다. 
영취산 혁목암(靈鷲山 赫木庵 : 지금의 통도사 산내암자)의 
낭지(郞智) 화상에게서도 사사했으며, 
당대 최고의 신승(神僧)인 
혜공 화상(惠空和尙)에게서도 사사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는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 법사와 규기 화상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옥에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10년 후 45세 때에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다로 해서 입당하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는 도중 비를 만나 
산속에서 길을 잃고 해매다, 겨우 토굴을 찾아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갈증이 나 토굴속에서 고여 있는 물을 떠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 무덤이었으며 물을 떠마시던 그릇은 
바로 해골 이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하룻밤을 더 지내게 되었는데 
이에 귀신의 작란(作亂)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 


"마음이 생기면 만물의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무덤, 해골물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구나." 
즉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一切唯心造)’는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활연대오를 한 스님은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친 사람으로서 또는 거지행세를 하며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포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화엄경>을 주석하였다. 


▲ 요석공주와 3일간의 사랑, 그리고 파계 

원효가 하루는 미친 듯이 거리에서 외치기를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 
誰許沒柯斧爲斫支天柱(수허몰가부위작지천주)" 라고 하니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만, 태종 무열왕이 그 노래를 듣고 뜻을 알았다고 한다. 


무열왕이 말하기를
"원효가 아마 귀한 집 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으려고 하는구나. 
아버지를 닮아 큰 인물이 되면, 나라에 더 큰 복이 어디 있으랴." 하였다. 
즉, 자루 빠진 도끼는 ‘과부’를 뜻하고, 
하늘을 받칠 기둥은 국가의 인재를 뜻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신부감을 구하던 무열왕에게 좋은 묘안이 떠올랐다. 
이 때에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둘째 딸 요석궁주가 떠올랐던 것이다. 

원효는 워낙 박식하고 뛰어난 고승이라 
자신이 자주 조언을 구하는 까닭에 인연도 있었고 
공주 역시 그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한 번은 공주가 그를 위해 승복과 모란꽃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무열왕은 궁중의 관리를 시켜 
원효를 불러 들이라고 명하였다. 
그 관리가 명을 받들어 그를 찾으려고 
즉시 남산으로부터 문천교(월정교)에서 그를 만나니 
짐짓 원효를 다리 아래로 떠밀어 옷을 적시었다. 
관리가 원효를 대궐로 인도하여 옷을 갈아 입히고 
젖은 옷을 말리고자 하였다.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게로 
원효는 대궐에서 3일 동안 공주와 함께 지냈다. 


승려의 신분으로서는 파계였으나, 
인간 원효에게는 정말 속세에서 한 번 뿐인 꿈같은 나날이었다. 
3일이 지난 후, 아무도 모르게 궁을 빠져 나왔다. 
그 후 요석공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10달이 지난 후, 신라 10현인 중 한 분인 
"설총"을 낳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거리낌이 없는 삶, 대중속에 파고 들며 포교 

스님은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파계하고 
자기를 ‘아랫 것 중의 아래’라는 뜻의 복성거사(卜姓居士) 
혹은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며 
무애행을 폈다. 즉 항간에 나가 표주박에 걸림이 없다는
 ‘무애(無碍)’라는 글을 새겨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거지나 창기들을 비롯한 하층민중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염불(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교화하였다. 


이 때부터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화엄경>의
 ‘모든 것에서 거리낌 없는 사람이라야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스님의 오도적 삶을 크게 확대하고 
사상의 깊이를 심화시켰으며, 
오로지 일심사상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던 것이다.

<자료/ 현대 불교미디어센터>


소요산은 이같은 전설이 얽혀있는 있는 산이다. 
역사를 음미하며 아내와 함께 오르는 소요산은 
그래서 의미가 깊게 다가오는 곳이다. 

원효대사가 대중속 포교를 하며 
수행 정진하던 이 산에, 요석공주가 아들인 설총를 데리고 
머나먼 이곳까지 찾아 '애틋한 부부애' 를 보여 주면서 
후세에 더욱 유명해 졌다. 


등산로 계단을 오르면서 
아침에 아내와 겪었던 작은 일들을 되새기며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미안했던 나의 심정을 아는지, 
아내는 말 없이 산으로 오르며 
등산객들과 보폭을 맞추기에 바빴다.
자재암으로 오르는 길에는 계단들도 참 많다. 


그 옛날 남편 원효를 찾아 
어린 설총을 업고 험준한 이 계곡을 찾았던 
요석공주는 심정이 어떠 했을까? 

여기 계신 스님들은 얼마나 이곳을 오르며 수행을 할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이끼가 낀 돌 계단도 운치를 더해 주었다. 


올라야 할 곳은 많고 갈 길은 먼데, 
이끼 낀 돌계단을 잠시 둘러보니 
'낭만'이 동<動>하는 심정이 된다. 
그리고 정상의 오름에서 머물며 생각해 본다.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속세의 생' 과 스님의 '구도의 생' 이 
저기 돌 계단과 함께 갈라지는가 보구나 " 하고. 


계단으로 채워진 역사의 고갯길. 
세월과 함께 수백번도 변했을 소요산만 말없이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 을 담고 있었다.
 


원효와 요석공주 

원효가 화랑이던 청춘시절 

서로 사모하던 원효와 요석공주 
그러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화랑들의 비무대회에서 우승한 

진 여랑과 결혼한 요석공주 

그러나 백제와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요석공주는 

청상과부가 되어 외로운 세월을 보내다가 

출가한 비구승이 되어 돌아온 원효를 

때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때로는 먼발치에서 보게 되면서 

날이 갈수록 사모의 정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저분은 스님이시다.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결심을 하고 출가하신 저 분을 

내가 사모하면 안 되지.’ 

그러나 원효의 잘생긴 모습과 탁월한 설법에 

당시의 왕비와 요석공주는 원효를 짝사랑 하게 되고 
왕비는 원효를 자주 왕궁에 불러들여 설법을 들었다 

그러나 원효는 청춘의 첫사랑 요석과의 열정이 

아직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으니 
불교의 이론과 현실의 마음 작용 사이에서 일어나는 
묘한 번뇌를 격고 있었으리라 사료 된다 

요석공주 또한 아무리 다짐을 해도 

원효가 불도 닦는 승려가 아니라 
학식 높고 말 잘하는 미남자로만 자꾸 생각되고,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날 지경이 되었으리라. 

공주는 용기를 내어 

원효에게 모란꽃과 승려 복을 선물한다. 
원효는 공주의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었다. 

공주는 고민 끝에 

자신의 이런 간절한 연모의 마음을 

아버지 무열왕에게 말한다.
“아바마마.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제 눈에는 나무밖에 보이질 않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좋을 듯하옵니다.”

원효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주의 아름다운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승려였고 상대방은 공주였다. 

두 사람이 결혼을 원하더라도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아마도 내면의 번뇌는 연민과 사랑 

그리고 부처님의 계율과 승려로서의 명예 등 

참으로 많은 것들 속에서 
또 하나의 의문에 부딛쳐 졌으리라 여겨진다. 
인간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곳에서 원효는 또 다른 세계와 만나게 된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남산의 거지 땡초 대안대사의 만남과
그 유명한 요석공주와의 3일간의 사랑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기록된 자료에 의존 하거나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통해 진실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우며 현실의 자기 삶 속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다 

먼저 원효대사와 대안대사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원효대사가 왕궁에서 설법하고자 교자에 올라 

왕실로 가는 도중에 "대안대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남산의 작은 토굴에 사는 대안대사는 

말 그대로 타락한 땡초의 모습이었다. 
흔히 말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홀로 도인인 것이다 

원효는 왕실의 고승대덕이고. 
대안대사는 중생들의 눈에는 

타락한중 (땡초)의 모습이니 

둘은 서로 극과 극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원효가 가마를 타고 왕실로 가던 중. 

대안 대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대안 대사는 술에 취해 거지꼴을 하고서는 

가마 위의 원효대사에게,

부처님 말씀에...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는데. 
어떤 놈은 복이 많아 사람위에 사람이 타고 가며. 
(사람을 가마에 태우고 가는 것)
좋은 옷을 걸치고 , 좋은 곳만 들락거리느냐……?

또 어떤 놈은 천지가 내 집이고. 

내 법당이니 걸림도 없고.막힘도 없으며.천지가 다 내 것인데 
어떤 놈이 더 편한가. 어디 한번 해보자 하며 고함을 치니 
그 소리가 원효에게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로 들렸고 
다른 사람들은 술 먹은 미친 중놈의 미친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원효는 자기 신분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날따라. 비가 부슬 부슬 내렸고. 

왕실에가 설법을 하는데. 요석공주가 비에 옷이 젖어.

속살이 살짝 들어다 보이는 요염한 자태로 앉아있었다 
순간적으로 동하는 자신을 보면서 잠을 설치고.
다음날. 원효는 대안 대사를 찾아 나섰다. 

토굴 안에는 죽은 어미 곁에 

오소리(호랑이?) 새끼가 끙끙대며 슬피 울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애처롭고 슬퍼서 .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해주고 있는데.
대안대사가 돌아와 목탁을 치고 있는 원효를 보며 

뭐하는 거냐고 물으니 
원효는 어미가 죽어 울고 있기에. 염불을 한다고 했다. 

대안대사는 혀를 차며 쯔쯔쯔 …….
배고플 때, 밥을 주는 것이 염불이니라……. 
하며 아랫마을에서 동냥해온 젖을 물리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원효는 또 한 번. 대안에게. 매를 맞는 기분이었다.


아~하. 미친 승이 아니라,고승 대덕 이로구나 
원효는 정식으로 무릎을 꿇고, 자초지종 자신의 얘기를 했다. 
그러자 대한 대사는. 좋다. 좋다. 날 따라와라. 

"대안대사"는 원효를 대리고 서라벌 (신라의수도)의 
어느 대포 집에 들어가 여자 둘을 사이에 두고서, 술을 마셨다. 

원효는 술은 않먹는다.여자도.멀리한다. 하며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대안 대사... 
진리를 가는 데는, 

마음 따로, 몸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니라.

극락을 갈려면. 

추락을 맛보아야지. 극락을 가는 거야……. 라고,
원효에게 말했다

이래도 법에 걸리고, 저래도 경계에 걸려서는 . 
영원히 한발자락도 나갈 수가 없을 것이야.

요석이 꾀거든, 하루 밤을 보내고. 
목탁을 쳐 주거라…….

그리고 그걸 뛰어 넘어라…….

원효는 요석을 사모하는 마음과 
이름 있는 승려의 신분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으리라.

자극을 받은 원효는 답답한 마음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닌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라는 의미의 노래다. 


사람들은 원효가 거리에서 부르는 이 노래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무열왕은 원효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하~ 마침내 내 자식이 대사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항시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공주를 애석해 하던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대사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는 
그런데 대사가 내 딸과 결혼하려고 과연 승복까지 벗을까?” 
생각하던 무열왕은 

어느 날 신하를 시켜 거리를 돌아다니는 

원효를 찾아 요석 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한다. 

신하는 어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다니다가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고 있는 원효와 맞닥뜨린다. 
그 신하가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던 원효는 
신하의 모습이 먼 곳에서 보이자 짐짓 발을 헛디딘 체 
문천교 아래 냇물에 풍덩 빠진다. 

요석 궁으로 보내진 원효의 젖은 옷을 갈아입힌 요석공주는 
단 3일간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원효와 요석은 삼일 낮과 밤을 함께 했다 
꿈같은 삼일이 지나고 . 

원효는 요석에게 얘기를 하고 떠나려고 하니. 

요석공주. 원효대사 가슴을 만지면서. 어딜 가시든지.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깊고 넓은 이 가슴 속에 
티끌보다도 작은 먼지보다도 적은 나를 

어느 한구석 기댈 데는 없는지요? 했다

원효는 

있다도 없고 없다도 없으며 감도 없고 옴도 없으며. 
더불어 나도 없는데. 그대가 어디 머물 자리가 있겠느냐?

요석은 원효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리고 그 후 단 3일간의 사랑으로 원효가 떠나가고... 

요석공주는 . 배가 불러. 

설총을 낳은 것은 655년에서 660년. 사이이다 

후일 신라 십현의 한사람이며 
우리 옛 문장 "이두"를 완성시킨 설총이라는 

원효의 아들을 낳아 원효를 바라보듯, 훌륭하게 키우며 
먼발치에서. 몸을 숨기며 소식을 듣고 보곤 했는데. 
죽을 때까지 정식으로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원효는 한바탕 꿈이요. 허깨비 였구나~! 하면서 
이름 모를 작은 절로 가서. 

승복을 벗고 불목한이 되어 
다시 행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수행을 했고. 
경기도 소요산 자해암에서 수행중 깨친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면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만법이 멸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우치며 .
화엄경을 달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고.번역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긴다.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3일간의 사랑...그리고 원효의 파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요석공주 - 3일간의 사랑으로, 
  신라의 십현(十賢)인, "설총"을 낳고
  고승을 파계시킨 비련의 여인 
  당대 최고 고승-원효대사를 
  민중 품으로 인도한 대보살

   요석(瑤石)공주,
    한국이 낳은 최고의 고승 원효(元曉)대사를 
    파계시킨 사연 많은 과부 요석공주
    후대인들의 기록에서는 
    요석과 원효의 관계를 ‘3일간의 사랑’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효의 연인, 요석은 행복했을까,,,,,,,?!
    삼국유사에는 요석의 목소리가 
    단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기에
    그 주변 이야기들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수밖에 없다.
 
    원효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어느 날 
    비틀거리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수호몰가부,아작지천주]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그리하면,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아무도 그뜻을 아는사람이 없었으나  
    신라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는
    “대사가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서는 요석궁의 과부 공주에게 
    원효를 데려가라고 했다.

    명을 받은 궁리(宮吏)가 원효를 찾으니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는 중이었다.
    문천교에 숨어있던 나졸들이 원효에게 
    요석궁으로 갈것을 청하나
    대사께서 껄껄 웃으며 거절하자

    무예를 겨루어서 이기면, 
    대사의 뜻대로 하라는 나졸들의 뜻에 따르나 
    나졸들이 덤비는대로, 원효는 
    이들을 가볍게 들어 문천교 밑으로 빠뜨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나졸마져 황황해지자
    원효는 일부러 문천교 아래에 빠져 
    옷을 적시고는, 옷을 말리기 위해 요석궁을 찾아갔다.

    3일간 요석궁에 머문 원효는 
     그 길로 궁을 나서고,
    공주에게는 태기가 있더니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인, 설총을 낳았다.
    ...중략...
 
    원효가 기거하는 혈사(穴寺) 바로 옆집에 
    설총이 살았으며,
    원효가 죽은 후에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유골을
    조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의 뜻을 표했는데,
    어느 날, 설총이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다.
     -〈삼국유사 원효불기조〉

    설총이라는 존재는 
    원효와 요석의 관계를 유추하는데 
    커다란 실마리를 제공한다.

    만약, 원효가 
    요석공주와 그 아들을 평생토록 내팽개치고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토록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으며,
    후일 위대한 학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은
    결코 아버지를 자신의 표상으로 삼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가 주석하는 절 바로 옆에 집을 짓고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설총은 불교학자가 아니라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유학자가 되었다.
    위대한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평생 그 그림자를 쫒은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우뚝 선, 거목으로 자란 것이다.
    
    이는 원효가 불교의 틀을 넘어선 
    대자유인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설총 또한 사자에게서 태어난 
    또 한 마리의 당당한 사자였음을 반증한다.

    “한 뭉치의 흙을 던지면, 
    개는 흙뭉치를 따라가 물지만,
    사자는 던진 사람을 좇아가 문다”는 
    아함부 경전의 가르침처럼
    원효에게서 배출된 아들은 
    아버지가 받아들인 불교를 배우는 대신
    아버지가 불교를 통해 완성해낸
    ‘걸림이 없는’ 삶의 방식을 배웠던 것이다.
    그 가운데 요석이라는 존재가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을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분명 원효는 
    요석이나 설총만을 위해 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았을 것도 짐작이 가능하다.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자는 
    한 길로 생사를 뛰어 넘는다’는
    화엄경의 구절이 적힌, 호리병을 들고 다녔던 
    방랑객에게
    성욕도 장애가 되지 못했거늘, 
    하물며, 처자식이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요석은 원효로 하여금 
    아무 것에도 걸림 없는 삶을 열어준
    최고의 도반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녀의 크고 넓은 품은 원효로 하여금 
    청정비구라는, 법력 높은 고승이라는, 
    또 신라 최고의 엘리트라는
    모든 ‘멍에’를 훌훌 벗겨주었던 것이다.
 
    요석도 여인인 이상, 정인을 그리워하며
    때로는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며,
    때로는 절망이 불길처럼 번져 
    가슴을 새까맣게 태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토록 사랑한 사람인데 
    어찌, 마음 한구석에 
    조금의 원망과 설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흔들림 없는 사랑 앞에선 
    혼란의 폭이 조금씩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바위 같은 사랑! 
    그 사랑이 비록, 
    자신이 바라는 애착의 형태가 아닐 지라도
    그 마음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는 
    그 확신이 들어서는 경계에 이르면
    그 사랑은 상대를 독점하겠다는 소유욕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원력의 에너지로 승화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남자는 좋은 여자를,
    훌륭한 여자는 훌륭한 남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원효가 살았던 시절은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이상을 위해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젊은이들의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했던 혼란의 시기였다.
    자식과 지아비를 잃은 신라인들에게 
    어찌, 승리감만 가득했겠으며,
    나라를 잃고 노예의 처지로 전락한 
    백제와 고구려인들에게
    어찌, 이해와 자비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었으랴.

    이 혼란의 시기에 스스로 파계승이 된 원효는
    주정뱅이들과 저자거리에서 노닐고 
    거지와 도적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가르치며
    한마음으로 생사를 뛰어넘는 
    대자유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일승사상은 작게 본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크게 본다면 
    범부의 삶과 부처의 삶이 다르지 않음의 설파이다.
 
    삼국통일이라는 혼란의 시기는 
    원효라는 위대한 고승을 배출했고,
    그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자신의 역할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비구승의 모습으로 
    후대의 사표가 되는 대신,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보살의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요석공주는 원효를 사자좌에서 끌어내 
    민중 속으로 보낸 인도자에 다름 아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통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던 
    용기 있는 사나이, 원효.

    그를 향한 그리움에 고통이 끊이질 않았다 해도
    그녀는 커다란 그 기둥을 자신의 의지처로 삼았을 것이며,
    그를 통해 보살도를 향한 구도의 열정을 불태웠을 것이다.
 
    사실 원효는 
    그 누구보다 계율을 중시한 스님이었다.
    그는 『보살계본지범요기』를 지을 정도로 
    계율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계는 작은 구절에 연연하는 
    소승의 계가 아니라
    그 계 또한 많은 인연에 의탁해서 생겨난 
    유동적인 대상이었다.

    욕망에 집착하면, 그 사랑은 죄가 되지만,
    고요한 마음으로 성찰하는 욕망은 
    진리로 가는 해탈문이 된다.
 
    사랑 때문에 극락에도 갈 수 있고, 
    지옥에도 떨어질 수 있다.
    중생들의 사랑이야 그 극락과 지옥을 
    하루에도 수천번씩 오르내리는 과정이지만,
    위대한 성사 원효의 사랑은 자신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한 여인과 더불어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는 보살도였으며,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대자유의 길이었다. 
    그런 원효의 금란가사를 벗기고 
    민중으로 인도한 대보살이 
    바로, 요석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