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敎◈Buddha indramang

능엄경(楞嚴經) 제1권

Demian-(無碍) 2012. 7. 4. 17:38


                                   비로자나佛 



능엄경(楞嚴經) 제1권                         

 

 

이 경(經)을 설한 장소와 청중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시라벌성(室羅閥城-사위성)의 기환정사(祇桓精舍-기원정사)에서 

덕 높은 비구들 일천이백오십 명과 함께 계셨다.

 

이들은 모두 번뇌를 여읜[無漏] 큰 아라한들이며 

부처님의 제자로서 불법을 잘 보호해 나갈 뿐만 아니라, 

모든 인과에서 벗어난 분들이었다.

 

또한 여러 국토에서 위의(威儀)를 갖추었으며 

부처님을 따라 법륜(法輪)을 굴리어, 부처님이 유촉하신 것을 

충분히 감당할 만하였으니, 계율을 엄숙하고 깨끗하게 지켜서 

삼계의 큰 모범이 되었고 한량없는 응신(應身)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중생이 바라는 바에 따라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미래의 모든 중생까지도 

고난에서 구제하여 속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분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큰 지혜를 지닌

"사리불"과 "마하목건련"과 "마하구치라"와 

"부루나미다라니자"와 "수보리"와 "우바니사타"등이 으뜸이었다.

 

또 한량없는 벽지불(벽支佛)-

-<연각(緣覺), 독각(獨覺)이라고도 변역하며 스승 없이 혼자 깨달은 이>과 

-아라한[無學]-<모든 것을 다 배우고 깨달았기 때문에 

더 배울 것이 없다고 하여 무학(無學)이라고 한다.>과 

아울러 처음 발심한 사람들까지 여름결제를 마치고 

함께 부처님의 처소에 와서 그 동안에 잘못이 있는 사람은 

모든 대중에게 알리고 참회하였으며, 시방의 보살들도 

의심이 있으면, 부처님께 여쭈어 의심을 풀고, 자비로우면서도 

엄숙하신 부처님을 흠모하여 받들면서 비밀한 이치를 들으려고 하였다.

 

그때 부처님께서 자리를 펴고 편안히 앉으시어 

그 곳에 모인 여러 대중을 위하여 깊고 오묘한 진리를 말씀해 주시니, 

참석하고 있던 청정한 대중들은 아직까지 없었던 법문을 듣게 되었으며, 

"가릉빈가"(迦陵頻伽)-<소리가 매우 아름다운 새로 극락조라고도 하며 

정토, 만다라 등에서는 사람의 머리에 이 새의 몸을 그린다. 

인도에만 산다고 한다.>의 소리와 같은 선음(仙音)이 시방세계에 가득하였다.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보살들 또한 도량에 모여 들었는데 

그 중에서는 "문수사리보살"이 으뜸이었다.

 

 * 경을 설하게 된 동기

 

그때 바사닉왕(波斯匿王)이 부왕을 위하여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재(齋)를 열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성대하게 차린 후 

부처님과 함께 여러 큰 보살들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였다.

 

같은 때에 성중에는 또 장자(長者)와 거사(居士)들이 있어 

스님들을 공양하려 하면서 부처님께서 오셔서 공양에 응해 주시기를 바라므로, 

부처님께서는 문수보살에게 명하시어 여러 보살과 아라한들을 거느리고 가서 

공양에 응하도록 하였다.

 

오직, "아난"만은 이보다 앞서 따로 초청을 받고 멀리 갔다가 

미처 돌아오지 못해서 스님들이 앉는 좌석의 차례[僧次]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 아난은 상좌(上座)와 아사리(阿사梨)도 없이 혼자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날따라 공양거리가 없었으므로 아난은 바루를 들고 지나오던 성안에서 

차례로 밥을 빌게 되었다.

 

마음으로는 한 번도 스님들께 공양한 일이 없는 시주에게 가서 

밥을 얻으리라 생각하고, 깨끗함과 더러움에 상관없이 

찰제리(刹帝利)<인도의 4성(姓) 계급 중 제2위로서 국정에 종사하는 종족>와 

전다라(전陀羅)<백정, 노예 등에 속하는 인도의 최하층 계급>에게도 

평등한 자비를 베풀어 미천함을 가리지 않으려 했다.

그 뜻은 모든 중생에게 한량없는 공덕을 원만히 이루게 하려 함이었다.

 

또 아난은 이미 세존께서, "수보리"와 "대가섭"을 꾸중하실 적에 

‘"아라한"이 되고서도 마음이 평등하지 못하다’고 하신 것을 알고 있었으며,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마음을 활짝 열어 놓으시고 거절함이 없으셨으므로 

그 의심과 비방에서 벗어났음을 흠앙(欽仰)하던 터였다.

 

아난은 큰 성을 지나 작은 성문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위의(威儀)를 엄숙하고 단정하게 하여 공양을 구하였다.

 

그때였다. 

"아난"이 공양을 구하기 위하여 음란한 여인이 사는 집을 지나가다가 

환술을 하는 마등가(冕伽)<작악업(作惡業), 소가종(小家種)이라 번역. 

-인도의 천한 계급. 발길라(鉢吉羅)의 어머니. 그 딸 발길라는 음란한 여자로서 

아난을 보고 반하여, 어미 "마등가"를 졸라서 아난을 홀리게 하였다.>라는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는 사비가라(娑毘迦羅)-<겁비라(劫毘羅), 

가비라(迦毘羅)라고 음역하며, 그 뜻은 누런 머리칼 또는 금색머리로 번역되는데 

수론외도(數論外道)의 시조>의 선범천주(先梵天呪)-<과거 범천(梵天)이 외운 

진언이란 뜻이나 진정한 범천의 진언이 아니고 외도들이 외우던 진언임>를 

외우면서 아난을 끌어들여 음란한 몸으로 비비고 만지면서 아난의 계행을 

깨트리려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이 마등가의 음란한 마술에 걸려든 것을 아시고 

공양을 마치고는 즉시 돌아오시니, 왕과 대신 그리고 장자와 거사들도 

모두 부처님을 따라와서 법문 듣기를 원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정수리로 온갖 보배롭고 두려움 없는 광명을 뿜어 내셨는데, 

그 광명 속에는 다시 천 개의 잎 새로 된 보배로운 연꽃이 생기면서 

부처님의 화신(化身)이 가부좌하고 앉아 신주(神呪)를 설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에게 명하여 그 신주를 가지고 가서 

아난을 구원하게 하시니, 악주(惡呪)가 소멸하므로 

아난과 마등가를 데리고 부처님 계시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난이 부처님을 뵈옵고 이마를 땅에 대어 예를 올리고 

슬피 울면서 한없이 오랜 과거로부터 한결같이 많이 듣기만 했을 뿐 

아직 도력이 온전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그리고는 은근하게 시방의 부처님께서 보리를 이루신 오묘한 

사마타(奢摩他)-<적정(寂靜), 능멸(能滅)이라 번역하며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망념을 끊어 산란함을 없애는 것>와 

삼마바리(三摩鉢리)-<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음을 관하여 

바른 선정을 닦아 수행하는 것>, 그리고 

선나(禪那)-<적관(寂觀). 모든 생각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잊는 것>의 

최초 방편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때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보살과 시방의 큰 아라한과 벽지불 등도 

모두 즐겨 듣기를 원하며 물러가 앉아서 묵묵히 거룩한 가르침을 기다렸다.

 

 

허망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나는 동기(同氣)로서, 정을 같이 나눈 천륜(天倫, 사촌형제)이다.

네가 처음 발심할 적에 나의 법 가운데에서 어떤 거룩한 모양을 보았기에 

세상의 깊고 중한 은애를 미련 없이 버렸는가?”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부처님의 서른두 가지 상이 뛰어나게 미묘하고 아주 특이하며 

형체가 마치 맑은 유리처럼 밝게 비침을 보고서, 이러한 모양은 

욕애로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사옵니다. 왜냐하면, 욕기(慾氣)는 

더럽고 흐려서 비린내, 누린내가 풍겨나고 고름과 피가 뒤섞여서, 

그와 같이 뛰어나게 깨끗하고 미묘하게 밝은 자금광(紫金光) 덩어리를 

발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목마를 때 물을 찾듯이 

우러러보며 부처님을 따라 머리를 깎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아난아,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중생들에게 한없이 오랜 과거로부터 나고 죽음이 계속되는 것은 

항상 머무르는 참 마음의 맑고 밝은 본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허망한 생각이 작용한 탓이니, 이 허망한 생각은 참되지 못하므로 

나고 죽는 세계를 끊임없이 윤회하게 되느니라.

 

만약 네가 지금 가장 높은 보리(菩提)-<최상의 정등정각으로 

위로는 부처님의 혜명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과 조화를 이루어 

"반야지혜"로 "바라밀"을 행하는 것>의 참되고 밝은 성품을 알려거든 

마땅히 정직한 마음으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시방의 여래가 모두 같은 법으로써, 생사(生死)를 벗어났으니 

이는 모두 정직한 마음 때문이었느니라. 마음과 말이 바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지위든 그 중간에 모든 왜곡된 현상이 없었느니라.


아난아, 내가 지금 너에게 묻겠다. 

마땅히 네가 발심한 것은 여래의 서른두 가지 상호 때문이었다고 했는데 

그것을 무엇으로 보았으며 누가 좋아하였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사랑하고 좋아한 것은 제 마음과 눈으로 하였습니다.

눈으로 여래의 거룩한 모습을 뵈옵고 마음에 좋아함이 생겼기 때문에 

제가 발심하여 죽고 나는 세계를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과 같이 참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마음과 눈으로 인한 것이니, 만약 마음과 눈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면 

번뇌를 항복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국왕이 적으로부터 침략을 받고서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하려면, 국왕의 군대가 적병이 있는 곳을 마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 너로 하여금 생사의 세계를 헤매게 하는 것은 

마음과 눈의 허물이니라. 

내가 지금 너에게 묻겠는데, 네 마음과 눈은 어느 곳에 있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세간에 열 가지 다른 중생-<열 가지 다른 중생 

- 다른 중생은 본래 12종인데, 여기서는 토목(土木)과 허공에 흩어져 있는 

두 가지를 제외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非有想), 

비무상(非無想)이다.>들도, 다 같이 식별하는 마음을 지녔사온데 

그것은 몸 속에 있습니다.

여래의 푸른 연꽃 같은 눈을 보아도 그것은 부처님의 얼굴에 있으며, 

제가 지금 네 가지 요소

<네 가지 요소 - 흙(土), 물(水), 불(火), 바람(風)>로 된 저의 육안을 

살펴보아도 제 얼굴에 있으므로 이와 같이 인식하는 마음은 

실로 몸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부처님의 강당에 앉아서 기타림(祇陀林)을 보고 있는데 

강당과 숲이 어디에 있느냐?”

 

“세존이시여, 이 여러 층으로 된 전각 중에 깨끗한 큰 강당은 

급고독원(給孤獨園)에 있고, 기타림은 강당 밖에 있습니다.”

 

“아난아, 너는 이 강당 안에서 먼저 무엇이 보이느냐?”

 

“세존이시여, 저는 강당 안에 있으면서 먼저 부처님을 뵙고 

다음에 대중을 보며, 이와 같이 밖을 바라보아야 

비로소 숲과 동산이 보입니다.”

 

“아난아, 네가 숲과 동산을 본다고 하니 무엇으로 인해서 보느냐?”

 

“세존이시여, 이 큰 강당의 문과 창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에 

제가 강당 안에 있으면서도 멀리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부처님은 대중 가운데서 황금빛 팔을 펴서 

아난의 정수리를 만지시며 아난과 여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삼마제(三摩提)<바른 선정을 닦는 터전. 

-모든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동요하거나 흩어지지 않게 하는 곳>가 있으니 

그 이름이 "대불정수능엄왕"(大佛頂首楞嚴王)으로 만행(萬行)이 다 갖추어졌느니라. 

시방의 여래가 이 유일한 문으로 초출하신 오묘하고 장엄한 길이니 

너는 명심하여 들어라.”

 

아난이 이마를 땅에 대어 예를 올리고 땅에 엎드린 채,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과 같이 몸은 강당 안에 있으나, 문과 창이 활짝 열렸기 때문에 

멀리 수풀과 동산을 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 강당 안에 있으면서 

여래는 보지 못하고 강당 바깥만 볼 수 있겠느냐?”

 

아난이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강당 안에 있으면서 여래는 보지 못하고 

숲과 동산만을 본다고 함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난아, 너도 이와 같으니라. 

너의 신령스런 마음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아나니, 

만약 너의 그 분명하게 아는 마음이 몸속에 있다면 

그때에 마땅히 몸속의 것부터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중생이 먼저 몸속을 보고 난 다음에 

밖의 물건을 본다더냐?

 

비록 염통, 간, 지라, 밥통은 볼 수 없으나 

손톱이 자라고 털이 자라며 힘줄이 움직이고 맥박이 뛰는 것은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알지 못하느냐? 

이렇듯 몸속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밖을 안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네 말대로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몸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아난이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의 이러한 법음(法音)을 듣고 보니, 

제 마음이 실로 몸 밖에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방 안에 등불을 켜 놓으면 

그 불빛이 반드시 방 안을 먼저 비추고 난 뒤에 

방문을 통하여 뜰과 마당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몸속은 보지 못하고, 몸 밖만 보는 것은 

마치 등불이 방 밖에 있어서 방 안을 비추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치가 너무도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부처님의 분명한 이치와 같으리니, 잘못된 생각은 아니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비구들이 마침, 나를 따라서 시라벌성에서 음식을 얻어 가지고 

기타숲으로 돌아왔는데, 나는 이미 공양을 마쳤지만, 너는 비구들을 보아라.

한 사람이 먹어서 여러 사람의 배를 부르게 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모든 비구들이 비록 아라한이 되었으나 

몸과 생명이 같지 않은데 

어떻게 한 사람이 먹어서 여러 사람을 배부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너의 깨닫고 알고, 보고 하는 마음이 정말로 몸 밖에 있다면 

몸과 마음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자연히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은 깨닫지 못할 것이며 

깨달아야 할 것이 몸에 있다면, 마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도라면(兜羅綿)<빛은 눈처럼 희고 부드럽고 깨끗한 솜> 같은 손을 

너에게 보이노니 네 눈으로 볼 때에 마음이 분별하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분별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서로 안다면 어떻게 몸 밖에 있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네가 말한바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몸 밖에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말씀처럼 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몸 안에 있는 것이 아니옵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아서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니, 

제가 지금 생각해 보건대, 숨어 있는 한 곳을 알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한 곳이 어디냐?”

 

아난이 말하였다.

“이 또렷하게 아는 마음이 이미 몸속은 알지 못하고 

몸 밖만 잘 볼 수 있으니 제 생각 같아서는 눈 속에 숨어 있는 듯합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유리그릇을 가져다가 두 눈에 댄 것과 같아서 

비록 물건에 가려졌으나 장애가 되지 않고, 그 눈이 보는 대로 따라서 

곧 분별하나니, 그렇다면 저의 깨닫고 알고하는 마음이 

몸속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눈 속에 있기 때문이고 

분명하게 밖을 보는데, 장애가 없는 것은 눈이 맑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것처럼, 눈 속에 숨어 있는 것이 마치 유리를 댄 것과 같다면 

저 유리를 눈에 댄 사람이 마땅히 유리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산과 강을 볼 적에 유리가 보이겠느냐, 안보이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유리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진실로 유리가 보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만약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다면 

마땅히 산과 강을 볼 적에 어찌하여 눈을 보지 못하느냐?

만일, 눈을 본다면 눈이 곧 대상이 되는 물체와 같아서 

눈이 보는 데를 따라서 분별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고, 

만약, 눈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눈 속에 숨어 있는 것이 마치 유리를 댄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네가 말한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눈 속에 숨어 있음이 

마치 유리를 댄 것과 같다고 함은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중생들의 몸이 장부(臟腑)는 속에 있고 구멍은 밖에 있으니 

장부는 어둡고 구멍은 밝습니다.

지금 제가 부처님을 마주하여 눈을 뜨고 밝음을 보는 것은 

밖을 본다고 하고. 눈을 감고 어둠을 보는 것은 안을 보는 것이라고 하고 싶은데 

그 생각이 어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눈을 감고 어두운 것을 볼 적에 

그 어두운 경계가 눈과 서로 대하였느냐, 대하지 아니하였느냐? 

만일 눈과 대하였다면 

어두운 경계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몸속이라 하겠느냐?

 

만약 몸속이라고 한다면 

어두운 방 안에 있을 적에 해나 달이나 등불이 없으면 

저 어두운 방 안이 전부 너의 삼초(三焦)나 

육부(六腑)-<사람의 인체 속에 있는 밥통, 

대장, 소장, 쓸개, 방광, 삼초를 말함>일 것이며, 

만약 어두운 세계가 눈과 마주하지 않는다면 

본다고 하는 말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만약 밖으로 보는 것을 떠나서 안으로 대하는 것이 성립된다 하여 

눈을 감고 본 어둠을 몸속이라고 한다면, 눈을 뜨고 밝음을 볼 적엔 

어째서 얼굴을 보지 못하느냐? 

만약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안을 대하는 것도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얼굴을 보는 것이 성립된다면 

이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과 눈이 곧 허공에 있어야 하리니, 

어떻게 몸속에 있다고 하겠느냐?

만약 허공에 있다면, 그것은 너의 몸이 아니므로 

그럴 경우 지금 너의 얼굴을 보고 있는 여래까지도 너의 몸이라고 하겠구나.

 

그러니 너의 눈은 이미 알고 있더라도 몸은 깨닫지 못할 것인데 

너는 굳이 고집하여 몸과 눈이 다 같이 안다고 한다면 

이는 마땅히 두 개의 알음알이가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곧 네 한 몸이 마땅히 두 부처를 이루겠구나.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네가 말한 어두운 것을 보는 것이 몸속을 보는 것이라고 함은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일찍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부대중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생김으로 인하여 갖가지 법이 생기며, 

법이 생김으로 인하여 갖가지 마음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곧 생각하는 그 실체가 바로 저의 심성(心性)이라고 봅니다.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도 있는 것이니 

역시 마음은 안과 밖과 중간 세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말하기를 법이 생김으로 인하여 갖가지 마음이 생겨나므로 

합하는 곳을 따라 마음도 있다고 하지만 이 마음은 본체가 없는 것이어서 

합해질 곳도 없다.

만약 본체가 없는데도 합할 수 있다면 이는 십구계(十九界)-<모든 존재는 

6근(根), 6진(塵), 6식(識)의 18계(界)뿐이고 19계는 없다. 

여기서 19계라고 말함은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가 

칠진(七塵)-<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음을 비유한 말.>으로 인하여 

합하는 것이니 그런 이치는 있을 수 없느니라.

 

만약 마음의 본체가 있다면 

가령 네 손으로 네 몸을 찌를 적에 네가 알고 있는 마음은 

몸속에서 나오느냐, 밖에서 들어오느냐?

만약 몸 에서 나온다면 몸속을 보아야 할 것이고 

만약 밖에서 들어온다면 먼저 얼굴부터 보아야 할 것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눈은 보는 것이며, 마음은 아는 것으로, 마음은 눈이 아니거늘 

본다고 하심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눈만이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네가 방 안에 있을 적에 문이 사물을 볼 수 있느냐?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도 아직 눈은 있으니 

마땅히 물건을 본다고 해야 되겠구나. 

만약 물건을 본다면, 어찌 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아난아, 또 너의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만약 반드시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그 실체는 하나이냐, 여럿이냐? 

지금 네 몸에 가득하게 퍼져 있느냐, 

가득하게 퍼져 있지 아니하냐?

 

만약 몸이 하나라면 네가 손으로 한 팔을 찌를 적에 

사지가 다 깨달아야 할 것이며, 

만약 모두가 함께 깨닫는다면 찌른 데가 따로 없어야 하거늘, 

만약 찌른 데가 따로 있다면 

네 몸이 하나라는 것은 자연 성립될 수 없느니라.

 

만약 몸이 여러 개라면 

많은 사람이 되어야 하리니, 어느 것이 네 몸이냐?

만약 온몸에 가득 퍼져 있다면 앞에서 찌르는 경우와 같을 것이요, 

온몸에 가득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네 머리에 부딪치고 다시 발에 부딪쳤을 적에 

머리에 느끼는 것이 있으면, 발은 몰라야 할 것인데 

지금 너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도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도 들었사온데 부처님께서 문수 등 

여러 보살들과 함께 실상(實相)에 대해 말씀하실 적에

 ‘마음은 몸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엔 몸속에 있다고 하자니 안을 보지 못하고 

밖에 있다고 하면 서로 알지 못해야 하는데, 

안의 것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에 있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아는 것으로 보아서는 밖에 있다는 것도 옳지 않으니 

그렇다면 지금 서로 알면서도 안은 보지 못하니 마땅히 중간에 있는 것 같사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중간이라고 말하는데 

그 중간은 반드시 막연한 것이 아니어서 있는 데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 중간을 찾아보아라. 중간이 어디냐? 

따로 장소가 있느냐, 몸에 있느냐?

만약 몸에 있을 경우, 변두리에 있다면 중간이 아니요, 

중간에 있다면 몸속과 같으니라.

 

만약 따로 장소가 있다면 표시할 곳이 있느냐, 없느냐? 

표시할 곳이 없다면 이는 없는 것과 같고 

표시할 곳이 있다면 이는 일정하지 아니하리니,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표시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중간이라고 표시했을 때, 동쪽에서 보면 서쪽이 되고 

남쪽에서 보면 북쪽이 된다. 

표시한 그 자체가 이미 혼란스러우니 마음도 따라서 혼란해지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말씀드린 중간이란 것은 그러한 두 가지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세존께서 ‘눈과 물질[色塵]이 반연이 되어 안식이 생기다’고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눈은 분별이 있고 물질은 느낌이 없는 것인데 

의식은 그 중간에서 생겨나니 바로 그곳이 마음이 있는 곳이라고 여겨집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만약 눈과 물질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면 

이 마음 자체가 두 가지를 겸하였느냐, 겸하지 않았느냐?

만약 두 가지를 겸한 것이라면, 눈과 물질이 섞여서 혼란하리니 

물질은 눈처럼 알음알이[분별, 분석]가 없으므로 

적이 되어 둘로 갈라설 것이니, 어떻게 중간이라고 하겠느냐?

 

두 가지를 겸하지 아니하였다면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이는 곧 자체에 성품이 없는 것이리니, 중간이란 어떤 모양이 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중간에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옛날에 보았는데 부처님께서 

대목련, 수보리, 부루나, 사리불, 이 네 분의 제자들과 함께 

법륜(法輪)을 굴리실 적에 늘 말씀하시기를 

‘알고 느끼고 분별하는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곳에도 있는 데가 없어서 

모든 것에 집착함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지금 제가 집착함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알고 느끼고 분별하는 마음이 어느 곳에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 세상과 허공이나 물 속 또는 육지에서 날아다니거나 

걸어 다니는 모든 물상을 ‘일체’라고 하니, 

네가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있다는 것이냐, 없다는 것이냐?

없다면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나니 무엇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냐?

모든 것이 있는데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집착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형상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형상이다.

형상이 있으면 존재하는 것인데 어떻게 집착이 없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집착이 없는 것을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참된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때 아난이 대중 속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공경을 다하며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본래 부처님의 가장 어린 아우로서 부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비록 지금 출가했으나 오히려 귀여워해 주시는 것만 믿고서 

많이 듣기만 하였을 뿐, 번뇌를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비가라의 주문을 꺾어 항복시키지 못하고 

저들에게 홀려 음실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는 참다운 마음이 있는 데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큰 자비로 가엾게 여기시어 

저희들에게 사마타의 길을 열어 보이시어 

모든 천제(闡提)-

-<착한 인연의 뿌리가 끊어져서 바른 법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추악한 소견을 깨뜨리게 하소서.”

 

말을 마치고 난 아난은 몸을 땅에 던지듯이 

엎드려서 여러 대중들과 함께, 목마를 때 물을 찾듯이 

정성을 다하여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였다.

 

그때 세존께서 얼굴로부터 갖가지 광명을 발하시니 

그 빛의 찬란하기가 마치 백 천개의 해와 같았다.

넓은 부처님의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

-<여섯 가지 진동 - 여섯 가지로 진동한 것은 

6식(識) 무명으로 맺어진 허망한 경계를 파괴하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하고 

이와 같이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국토가 일시에 나타나더니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여러 세계를 한 세계가 되게 하셨다.

그 세계 속에 있는 여러 큰 보살들은 모두 제 나라에 있으면서 

합장하고 공경을 다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중생이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여러 가지로 뒤바뀌어서 

그 업의 씨앗이 자연 악차(惡叉)-<인도 말레이반도 등에 나는 교목인데 

이 나무의 열매는 세 개의 씨가 한 곳에 모여 있다고 한다.>의 열매와 같이 

한데 모여 있으며, 수행한 모든 사람들이 최상의 보리를 이루지 못하고 

별도로 성문(聲聞)-<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수행하나 대승법을 깨닫지 못하고 

소승의 견해에 머물러 있는 이>이나 

연각-(緣覺)<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법에 의하지 않고 

홀로 수행하여 깨달은 성자, 독각이라고 함.>을 이루며, 

외도와 하늘과 마왕과 마구니의 권속이 되기도 하니, 

이 모두가 두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뒤섞여 

어지럽게 닦아 익혀왔기 때문인데, 

이는 마치 모래를 삶아서 좋은 음식을 만들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티끌처럼 많은 겁(劫)의 세월을 지낸다 하더라도 

마침내 이룰 수 없느니라.

 

그 두 가지 근본이란 무엇인가?

아난아, 하나는 시작이 없는 나고 죽음의 근본이니, 

지금 너와 모든 중생들이 반연(攀緣)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요,

 

둘째는 시작이 없는 보리와 열반의 원래 깨끗한 본체이니, 

원래부터 밝은 너의 식정(識精)

-<중생의 진심, 즉 정밀하고 밝은 지식>이 

모든 인연을 만드는데, 바로 그 인연으로 인하여 

본래의 참다운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러 중생들은 

이렇게 본래부터 밝았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록 종일토록 행하여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여러 갈래의 중생세계로 잘못 빠져들게 되느니라.

아난아, 네가 지금 사마타의 길을 알아서 생사에서 벗어나려고 하니, 

지금 다시 너에게 묻겠노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난 후, 

부처님께서는 황금빛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것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아난이 대답하였다.

“보입니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

 

“저는 부처님께서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서 

저의 마음과 눈에 비추는 것을 봅니다.”

 

“너는 무엇으로 보느냐?”

 

“저와 대중들은 다 같이 눈으로 보옵니다.”

 

“네가 지금 나에게 대답하기를 ‘부처님께서 손가락을 구부려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서 제 마음과 눈에 비춘다.’고 하였는데 

네 눈은 본다고 하겠지만, 무엇을 마음이라 하여 

나의 주먹이 비추는 것을 받아들이느냐?”

 

“부처님께서 저에게 지금 마음이 있는 곳을 물으시므로 

제가 마음을 미루어 찾아보았사온데, 

이렇게 미루어 찾는 바로 그것을 저는 마음이라고 생각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아난아, 그것은 네 마음이 아니니라.”

 

아난이 흠칫 놀라면서 자리를 비켜서서 합장하고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것이 저의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앞에 나타난 대상 물질의 허망한 모양에 대한 생각이다.

너의 참다운 성품을 현혹시키는 것이니 

이는 네가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도적을 아들로 잘못 인정하고 있어서 

너의 본래 항상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고 죽는 세계를 윤회하고 있느니라.”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사랑하는 아우입니다.

마음으로 부처님을 사모하였으므로 저를 출가하게 하였사오니 

저의 마음이 어찌 부처님만을 공양하오리까?

 

나아가 항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국토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여러 부처님과 훌륭하신 스승님을 섬기는 것과 큰 용맹을 발해서 

행하기 어려운 모든 일들을 행하는 것도 모두가 이 마음으로 하는 것이며, 

비록 법을 비방하고 훌륭한 근기에서 영원히 물러난다 하더라도 

오직 이 마음일 따름인데, 만약 이렇게 발생하는 분명한 것을 

마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마음이 없는 것이 

마치 토목(土木)과 같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깨닫고 알고 하는 것을 여의면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으리니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까? 

저는 참으로 놀랐사오며 

아울러 여기 모인 대중들도 의혹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큰 자비를 베푸시어 깨닫지 못한 저희들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그때 세존께서 아난과 여러 대중에게 가르침을 열어 보임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나지도 죽지도 않는 법을 아는 지혜를 증득하게 하려고 

사자좌(獅子座)에서 아난의 정수리를 만지며 말씀하셨다.

 

“여래께서는 항상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은 

오직 마음이 나타내는 것이며, 

모든 원인과 결과와 세계의 작은 티끌까지도 

마음으로 인하여 실체를 이룬다.’고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약 모든 세계의 온갖 것 가운데 

저 풀잎이나 실오라기까지라도 그 근원을 따져 보면 

모두 본체의 성질이 있으며, 비록 허공까지도 이름과 모양이 있거늘 

더구나 깨끗하고 오묘하고 밝은 마음은 

모든 마음의 본성(本性)이 되는 것이니 어찌 실체가 없겠느냐?

 

만약 네가 분별하고 깨닫고 관찰하여 분명하게 아는 그 성품을

 ‘마음’이라고 고집한다면, 이 마음은 마땅히 온갖 빛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접촉과 법 등 상대되는 모든 대상을 여의고 

서로 따로 온전한 성품이 있겠느냐?

 

즉, 다시 말하면 네가 지금 나의 법문을 듣는 것, 역시 

소리로 인하여 분별함이 있는 것과 같으니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모든 것을 없애고 

안으로 그윽이 한가함을 지킨다 하더라도 

그 또한 법진(法塵)을 분별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느니라.

 

나는 네게 명령하여 마음이 아닌 것으로 고집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가 마음에 대하여 세밀하고 자세하게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만약 앞에 나타나는 대상을 여의고도 분별하는 심성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너의 마음이겠지만. 만약 분별하는 심성이 

앞에 나타난 대상을 여읜 후에 실체가 없어지는 것이라면 

이는 앞에 나타나는 대상을 분별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 앞에 나타나는 대상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약 변하여 없어질 때에는 이 마음이 곧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을 것이니, 

그렇다면 너의 법신도 함께 끊어져 없어질 것이니라. 

그러면 그 무엇이 나지도 죽지도 않는 법을 닦아서 증득하겠느냐?”

 

그때 아난과 대중들은 묵묵히 넋이 나간 듯하였다. 

계속해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에서 수학(修學)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 비록 차례로 이어서 닦는 아홉 가지 선정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번뇌를 다 끊어 "아라한"이 되지 못한 것은 

모두 저 나고 죽고 하는 허망한 생각에 집착해서 

진실한 것인 양, 오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 비록 많이 듣기는 하였으나 

성인의 과업을 성취하진 못했느니라.”

 

 

참된 견해란 무엇인가?

 

아난이 그 말을 다 듣고 난 후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엎드려 꿇어앉아서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하였사오나 

부처님의 위엄과 신령스러움만 믿고서 

늘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애써 닦지 아니하여도 

부처님께서 나에게 삼매(三昧)를 얻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여겼습니다.

 

몸과 마음은 본래 서로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저의 본심을 잃었으니, 몸은 비록 출가하였으나 

마음은 도에 들어가지 못함이 

마치 가난한 아이가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간 것과 같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제 아무리 불법을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듣지 아니한 것과 같음을 알았사오니 

이는 마치 사람이 말로만 음식을 말하고 

먹지 않으면 결코 배부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두 가지 장애[二障]

-<열반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번뇌의 장애[煩惱障]와 

앎의 장애[所知障]를 두 가지 장애라고 한다.>에 얽매인 것은 

진실로 고요하고 항상한 심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니,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궁하고 외로운 것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오묘하고 밝은 마음을 발하여 저의 도안(道眼)을 열어 주소서.”

 

그때 부처님께서 

가슴의 만(卍)자로부터 보배의 빛을 뿜어내시니 

그 찬란하고 밝은 빛은 백 천 가지 색으로 어울렸다.

부처님께서는 그 빛을 시방의 티끌처럼 많고 넓은 부처님의 세계에 

일시에 두루 퍼지게 하여 시방에 있는 보배로운 사찰과 

모든 부처님의 정수리에 닿게 하셨다가 다시 되돌려서 

아난과 여러 대중에게 이르게 하셨다. 

그런 후에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큰 법 깃발

-<법 깃발 - 삿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법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 진리의 깃발.>을 세우고, 

시방의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오묘하고 은밀하며 

비밀스럽고도 깨끗한 밝은 성품을 깨우쳐 

깨끗한 눈을 뜨게 하리라.

 

아난아, 네가 아까 내게 대답하기를

 ‘빛나는 주먹을 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주먹의 광명은 무엇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며 

어떻게 주먹이 되었으며 너는 무엇으로 보았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부처님의 온 몸은 염부단금(閻浮檀金)

-<강에서 난다는 붉은 색깔의 최상품의 금(金)>이므로 

보배의 산처럼 빛나옵니다. 때문에 광명이 있는 것이고 

저는 그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 수레바퀴 같은 무늬가 있는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쥐고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으므로 주먹이 되었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진실한 말로써 네게 말하나니, 

지혜 있는 모든 사람들을 비유로써 깨닫게 하리라.

아난아, 내 손이 없으면 내 주먹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이 

만약 네 눈이 없으면 네가 보는 것도 이루어질 수 없으리니 

네 눈을 내 주먹과 같은 이치로 비유하면 그 의미가 서로 통하겠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저의 눈이 없으면 

제가 보는 것은 이미 이루어질 수 없으리니, 

여래의 주먹에 비유하면 사실과 이치가 서로 통할 듯하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서로 통한다고 말하였으나 그 이치는 그렇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내 손이 없으면 주먹은 반드시 없겠지만 

저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네가 시험 삼아 길에 나아가서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면 

그 소경은 ‘지금 내 눈에는 오직 까맣게 어두운 것만 보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이치로 보건대 앞의 대상이 어두울지언정 보는 것이야 

어찌 없다고 하겠느냐?”

 

“모든 소경들이 눈앞에 

오직 까맣게 어두운 것만 보이는 것을 어떻게 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난아, 모든 소경들은 눈이 멀어서 

오직 까맣게 어두운 것만 보는 것과 

저 눈을 가진 사람이 깜깜한 방에 있는 

그 두 가지 깜깜한 현상이 다르냐? 다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 깜깜한 방에 있는 사람과 

저 소경들의 캄캄함을 비교해 보면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아난아, 만일 눈 먼 사람이 대상이 캄캄한 것만 보다가 

홀연히 눈의 광명을 되찾게 되면, 

반대로 그 대상의 갖가지 빛깔을 보게 되리니 

이것을 ‘눈이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 어두운 방 안에 있던 사람이 대상이 캄캄한 것만 보다가 

홀연히 등불을 켜면 역시 대상의 갖가지 빛깔을 볼 것이니 

이것은 마땅히 등불이 보는 것이라고 해야겠구나.

 

만약 등불이 보는 것이라면, 이는 등불이 능히 보는 것이므로 

등불이라고 이름 하지 못할 것이며, 또 등불이 보는 것이라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등불은 빛을 나타낼 수 있을지언정 이렇게 보는 것은 

눈이지 등불이 아니며, 눈은 빛깔을 나타낼 수 있을지언정 

이렇게 보는 성품은 마음이지 눈이 아니니라.”

 

아난은 다시 이 말을 듣고서도 여러 대중들과 함께 

아무런 말없이 잠자코 있었으나, 마음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여래께서 자비하신 음성으로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합장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자비하신 가르침을 기다렸다.

그때 세존께서는 도라면(兜羅綿)처럼 부드러운 그물 모양의 빛나는 손을 들어 

수레바퀴 같은 무늬가 있는 다섯 손가락을 편 채로 

아난과 여러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 도를 이루고 녹야원(鹿野園)에서 교진여 등 

다섯 비구와 너희 사부대중을 위하여 말하기를,

 ‘모든 중생이 보리와 아라한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모두 객진번뇌(客塵煩惱)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므로 객(客)이라 하고 

미세하여 수없이 많으므로 진(塵)이라 한다.>로 인하여 

그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너희들은 그 때 무엇을 깨달아서 지금 성인의 과업을 이루었느냐?”

 

그때 교진여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지금 장로로서 대중 가운데에서 

유독 저만이 ‘알았다’는 이름을 얻은 것은 

‘객진(客塵)’이란 두 글자를 깨닫고 성인의 과업을 이룩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길가는 사람이 

객주 집에 들어가 잠을 자거나 밥을 먹다가 밥 먹고 잠자는 일을 마치고는 

행장을 꾸려서 머물 여가도 없이 다시 길을 떠나지만 

객주집 주인은 떠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머물지 못하는 사람은 나그네이고 

머무는 사람은 주인이니, 머물러 있지 못하는 이를 ‘나그네’라고 할 것입니다.

 

또 비유하면 비가 개이고 밝은 태양이 떠오르면 

햇빛이 문틈으로 들어와 밝게 비치는데 

그때, 허공에는 떠다니는 작은 먼지가 있어 

이리저리 날아다니지만 허공은 고요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맑고 고요한 것은 허공이요, 

움직이는 것은 티끌이므로 저는 움직이는 것을 

‘먼지’라고 정의를 내리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 앞에서 

다섯 손가락을 구부렸다가 펴고 폈다가 구부리시며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느냐?”

 

아난이 대답하였다.

“저는 여래께서 온갖 보배로운 수레바퀴 같은 손바닥을 

대중 앞에서 폈다 쥐었다 하시는 것을 봅니다.”

 

“네가 내 손이 대중 앞에서 폈다 쥐었다 함을 본다고 했는데, 

그것은 내 손이 폈다 쥐었다 하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보는 것이 펴졌다 쥐어졌다 하는 것이냐?”

 

“세존께서 대중 앞에서 보배의 손을 폈다 쥐었다 하시므로 

제가 여래의 손이 스스로 폈다 쥐었다 하심을 본 것이지 

저의 보는 것이 펴졌다 쥐어졌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것이 움직였고 어느 것이 가만히 있었느냐?”

 

“부처님의 손도 가만히 있지 아니하였습니다만, 

저의 보는 것도 오히려 고요하다고 할 것이 없는데 

어느 것을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고집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니라.”

 

이때 부처님께서 손바닥으로부터 

한 줄기의 보배광명을 뿜어 아난의 오른쪽에 있게 하니, 

아난이 머리를 돌려 오른쪽을 보았다. 

또 한 줄기 빛을 뿜어 아난의 왼쪽에 있게 하니 

아난이 또 머리를 돌려 왼쪽을 보거늘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머리가 지금 무엇 때문에 움직였느냐?”

 

“여래께서 보배의 빛을 내시어

 나의 왼쪽, 오른쪽에 보내셨기 때문에 왼쪽과 오른쪽을 보느라고 

머리가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아난아, 네가 부처님의 보배의 빛을 보느라고 

머리가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였다고 하니, 

그것은 네 머리가 움직인 것이냐, 

아니면 보는 것이 움직인 것이냐?”

 

“세존이시여, 저의 머리가 저절로 움직인 것이지 

저의 보는 성품은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조차 없으니 

어찌 움직였다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널리 대중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만약 중생들이 동요하는 것을 

대상 물질[塵]이라하고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나그네라 한다면, 

너희들은 아난의 머리가 스스로 움직였을 뿐 

는 것은 움직이지 않았음을 관찰하고, 

또 너희가 나의 손은 스스로 폈다 쥐었다 하였으되 

보는 것은 펴졌다 쥐어졌다 함이 없는 것임을 깨달아라.

 

어찌하여 지금 너희는 동요하는 것을 몸으로 여기고 

또한 대상인 물질이라고 생각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마다 생겼다 없어졌다 하면서 참다운 성품을 잃어버리고 

뒤바뀐 짓을 하느냐? 

더욱이 성품의 참마음은 잃어버리고 물체를 몸인 줄 알고 있으면서 

그 속을 돌고 돌아 스스로 끌려 다니느냐?”


 

-제1권 끝. / 발행처 - 민족사 / 譯 - 김두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