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 氣天門◈

<소개글>민족무예-기천문(氣天門) 2대, 문주(門主) 박사규

Demian-(無碍) 2011. 7. 18. 11:44

<소개글>

 

민족무예-기천문(氣天門) 2대, 문주(門主) 박사규

---날아오는 화살 잡는 합장공·멀리보는 幻影신공 터득

 

기천문(氣天門) 2대, 문주(門主) 박사규

 

남대문 의류도매상 하던 20대, 스승 박대양 진인을 만나

 

전통무예 기천문(氣天門)의 박사규(61) 문주(門主)가 하루를 여는 모습이다.

기천문은 산중에서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내려오다 1970년 초대 문주인

박대양(58) 진인(眞人)이 하산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우리 고유의 수련법.

몸의 수련을 통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한다. 한마디로

'몸으로 닦는 도(道)’다. 현재 국내에만 30여 개 도장이 있고,

미국(워싱턴·LA)과 캐나다·일본 등 해외에도 진출해 있다.

그동안 10여 개 대학의 동아리와 직장동호인 모임의 활동까지 감안하면

기천공부를 하는 사람은 족히 수십만명이 된다.

박 문주는 이들을 총괄하는 대표이자 공식적인 최고 사부(師父)다.

 

“기천문이 굳이 문주라는 직함을 쓰는 건

중국의 소림파, 무당파, 화산파처럼 독립된 무예체계를 갖춘

무문(武門)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박 문주가 계룡산에 둥지를 튼것은 12년전.

계룡산의 정기를 받으려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기천을 알리고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바람에서였다. 처음 갑사 쪽에 있다가 신원사 쪽을 거쳐

5년 전 지금의 장소(충남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 1구 안골)에 있던

허름한 농가를 개조해 황토 집을 짓고 ‘기천문 계룡본산’을 열었다.

세 명의 제자와 함께 기거하면서 매주 일요일이면 전국에서 찾아오는

50여 명의 제자를 연천봉 자락 수련장에서 직접 지도한다.

 

고수급 관장들은 물론 학생, 대학 교수, 경찰, 군인, 무당, 스님 등

다양한 직업에 11살부터 70대까지 연령층도 천차만별이다.

시범을 보여 가며 웃는 얼굴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도하지만

형형한 눈빛에서 뿜어나오는 카리스마에 죄다 압도당한다.

아무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못한다.

조금만 삐딱해도 사정없이 죽비로 내리이친다.

영락없이 ‘할아버지 탈을 쓴 호랑이’다.

 

    1977년에 입문

 

기천문에는 수련정도(功力)에 따라 부르는 호칭이 다르다.

단계별로 행인(行人)-공인(功人)-정인(正人)-법인(法人)

-도인(道人)-진인(眞人)-상인(上人) 순이다.

각자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행인에서 공인이 되려면

3년 정도 수련해야 되고, 공인에서 정인이 되려면 또 4년,

정인에서 법인이 되려면 추가 3년 정도의 수련이 필요하다.

진인은 평생 수련해야 될까 말까 하고, 상인은 타고나야 된다.

현재 진인은 초대 문주 한 명뿐이고, 상인은 박 진인의 사부였던

원혜(元慧)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문주는 자신의 ‘품계’에 대해 한사코 노코멘트다.

 

하지만 제자들에 따르면 도인 수준을 넘은 지 오래됐지만

사부인 박 진인을 모시는 입장이라 겸양을 지키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그의 공력을 가늠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내공만 강조하고 무예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친구와

팔뚝 부딪치기로 공력 겨루기를 한 적이 있는데,

상대가 세 번 만에 전치 일주일의 내상을 입고 주저앉아 버렸을 정도다.

또 남대문에서 사업할 때, 무술을 한 깡패 출신 경비 7명과 주차 시비로

싸움이 붙어 ‘대풍역수(大風逆手)’ 둘둘말이(연타석 공격)로

일거에 제압, 지금도 상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박 문주가 기천에 입문한 것은 1977년. 벌써 34년째다.

당시 합기도 5단이었던 그가 친구한테서 서울 약수동에

고수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박 진인한테 도전했다가

참패를 당한 게 계기였다.

 

“당시 제 나이가 스물 아홉으로 합기도를 한 지 10년이 넘어

한창 기량이 무르익은 데다 그해 장충체육관에서

전국무술사범시범단(30명)에 낄 정도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은 터라

무서울 게 없었죠. 사실 그 전에도 18기니 태권도니 각종 무술 고수들과

숱하게 겨뤄봤지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고향친구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뭐 장력(掌力)으로

촛불을 한2010.920개 날리고, 눈 내린 위를 걸어도

보통 사람보다 발자국이 많이 안 나고, 기(氣)로 치료를 하고……,

하여튼 중국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붙어보기 전엔 믿을 수가 없어 도장을 찾아갔죠.

 

간판이‘기천연무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158㎝에 50㎏나 될까 싶은게 중학교 2학년정도로 보이더라고요.

한꺼번에 다섯 명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막상 붙어보니 한수도 못받고 두수 만에 다운되고 말았어요.

나중에 알게 됐지만, 돌제비가 독수리를 공격하는

연비파문(燕飛波紋)이란 수였습니다.

처음 보는 수였으니 당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 길로 사부로 모셨죠. 그분이 바로 박 진인이십니다.”

 

박 문주가 기천인이 된 것은 어쩌면 ‘팔자’였는지 모른다.

기천을 공부하려면 처절하리만큼 혹독한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데

무술에 대한 소질도 있을 뿐 아니라, 강한 집념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이 전남 진도인 박 문주는 어려서부터 ‘깡다구’가 있었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한학자이면서 논농사만 50마지기를 짓는 아버지가

예순셋에 얻은 아들이라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지만

덩치가 왜소(현재 165㎝)해, 업신여김을 당하는 데 대한 반작용이었다.

 

“지기 싫은 성격에 초교 4학년 때부터 동네 형들한테 당수

(그때는 태권도를 그렇게 불렀다)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진도농고 시절엔 복싱을 했고요. 그 바람에 공부는 중간 정도밖에 못했죠.

합기도는 고교 졸업 후 시작했습니다.”

 

1973년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결혼, 3년간 농사를 짓다 상경해

이대 입구에 있는 의상실에 취직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재단과 디자인 보조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배웠다.

지금은 분업이 돼 있지만, 당시엔 두 가지를 다 해야 했다.

 

그렇게 5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남대문시장에서 의류도매를 시작했다.

도매사업과 병행해 이태원에‘미가로(美街路)’라는 브랜드로 여성패션점도 운영했다.

이미 가정도 꾸린 터라 열심히 했다. 장사가 잘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대문에 추가로 도매매장을 내고 ‘미가로’도 두 군데 지점을 냈다.

86아시안게임에 즈음에는 이태원 매장에 국내287최초로 330㎡(100평)짜리

패션쇼룸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태원에서만 하루에 1500만~2000만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도·소매를 합쳐 전체 매출이 하루 5000만원 가량 됐다.

당시로는 엄청난 일로 지금도 패션업계에서는 그의‘성공신화’를 기억하고 있다.

 

“제가 직장생활을 할 때, 우리나라에 기성복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어요.

그러니까 시장에서도 옷을 잘 못 만들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기술력과 경험을 갖춘 데다, 당시로서는 하이패션을 지향한 덕분에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농사를 지을 때도, 상경을 한 뒤에도 한시도 운동을 놓지 않았다.

그 덕에 공력이 절륜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스승은 그가 근기가 있으면서도 문중을 배반하지 않으리라 직감하고

일대일 특별지도를 했다. 수련은 주로 남산, 장충단공원, 삼청공원

그리고 정릉 숲 같은 야외에서 했는데,

처음 3년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아야’ 했다.

 

 

   정공법과 동공법

 

“기천문에서 하는 무예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정지된 상태로 하는 정공법(靜功法)과 움직이면서 하는 동공법(動功法)이 그것이죠.

정공법은 동공을 하기위한 기초작업을 하는거예요. 그런데 정(靜)이라는 것은

정공에도 있고 동공에도 있어요. 동(動)도 마찬가지고요.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이죠.

그러니까 동공이라도 하나의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나를 잃어버리는 삼매의 경지에 이르는 거죠.

그러니까 몇십 번,몇백 번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한 동작을 천 번이고, 이천 번이고 하는 거예요.

 

그분이 작정하고 저에게 이런 수련을 시켰으니, 어땠겠어요?

발에 돌을 매달고 산길을 달리고, 모래 자루를 짊어진 채

온종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정공을 섰습니다.

삼복 더위 때, 겨울옷을 입힌 채, 포플러나무 300그루를

팔뚝으로 치고 달리기를 두세 번씩 시키기 일쑤였고,

내가신장(內家神掌: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항아리를 안은 형상을 하고

발을 안쪽으로 45도 비틀어 기마자세를 취하는 정공법의 한 가지)을 할 때엔

아예, 사부님이 등에 올라가서 30분이고 1시간이고 앉아 있곤 했습니다.

일반인은 빈 몸으로도 5분 하기 어려운 동작을 말입니다.

한마디로 반 죽이는 겁니다.”

 

스승은 늘 제자를 극한으로 몰아세웠다.

엄살이나 꾀를 부리면 사정없이 몽둥이찜질을 해댔다.

안 맞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내야 했다.

처음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어느 새 저절로 이뤄졌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는 더 참기 어려운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를 안 맞으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통으로 고통을 이겨내도록 하는 스승의 조련법이었다.

온몸이 멍투성이라 공중목욕탕에도 못 갔지만

그러는 사이에 수법(手法)이며 보법(步法), 신법(身法)이 절로 몸에 붙었다.

 

“사부가 어느 날, 제 키 높이의 축대를 선 자리에서 뛰어오르래요.

안 될 것 같아 주춤했더니, ‘당신은 할 수 있다’며

몽둥이로 사정없이 후려치는데, 저도 모르게 붕 날아올랐습니다.

그 뒤론 모둠발로 뛰어 사람 키 정도는 다 밟고 그랬지요.

또 15~20m의 거리에서 화살을 쏘면, 서서 손으로 화살을 잡아야 된대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냥 된대요.

저도 수련을 통해 해보니하까 정말 됩디다.

 

거기까지 가게 되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죠.

사부가 앞에서 죽도나 몽둥이로 계속 쳐주고 그걸 막아내는 훈련을 하다 보면

감각이 익혀집니다. 사정없이 들어오는 매를 맞지 않으려면 딴 도리가 없지요.

화살, 그거 잡아집니다. 제가 체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지만

인간에게 한계란 없어요. 인간의 능력은 정말 무한합니다. 

다만 훈련하기 나름이지요.”

 

그는 그렇게 7년을 보냈다. 웬만한 수는 다 익혔다.

그렇다고 ‘하산’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사부와 일상생활을 함께하며 매일같이 다지기를 했다.

 

“제가 매장에 있으면, 그분이 매장으로 오세요.

그리고 제가 생산라인 공장에 갈 때나 시장에 원단 가지러 갈 때도

함께 가서 원단도 같이 짊어지고 다니면서 교감을 나누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부가 더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주로 새벽에 수련을 했습니다.

새벽 4시 반에 제가 차를 몰고 신당동 댁으로 가서 사부님을 모시고

삼청공원이나 남산에서 2~3시간 수련을 하곤 했습니다.”

 

기천에는 수많은 법이있다.

우선 인사법인 단배공(壇拜功)에 이어, 내가신장·육합단공(六合丹功) 등

기법(氣法=정법)을 통해 축기(畜氣)를 배우고나면,태극 모양을 응용한

반장(攀掌)흐름을 중심으로 신법(身法=동법)으로 나아가게 된다.

신법에는 보법을 바탕으로 각종 권법과 검법 그리고 기천무(氣天舞)가 있다.

보법에는 전진보·외보·금계보·또르륵보·삼성보·팔선보 등이 있고

권법에는 반장·하반장·수낙어각·풍낙어수·육합추·용틀임·낚시걸이

·마법역권·등타·집기내력권·돌개법·등천법·연비파문·양권·

월야차·칠보절권(七寶切拳) 등이 있다. 특히 칠보절권은

대풍역수·일보삼권·일보이권·일보일권·풍수·비연수·금화장으로 이뤄져

하나의 절권만으로도 응용하면 일개 문파를 이룰 정도의 뛰어난 수들이다.

이 밖에도 장백각저·천룡·천여·천라·어룡장·암연투응 등 고급 수들이 있다.

기천의 특징이자 장점은 각 법을 익히면, 검법이나 봉술에도

그대로 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천수련은 단순하다.

한 가지 수를 체화(體化)할 때까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이다.

일법(一法)이 안 되면 만법(萬法)이 무용지물이다. 또한 일 법 일 법이 고통이다.

극한의 고통이라야 심신을 변화시킨다.

수만 번 손바닥으로 진흙이나 나무를 쳐대면, 돌도 부술 수 있고(破石掌),

팔뚝이나 발로 훈련하면, 야구방망이 서너 개는 단번에 박살낼 수 있다.

지금까지 정인이 50여명 밖에 안되고, 법인은 고작 12명뿐이라는 사실은

기천수련이 그만큼 어렵다는 증거다.

 

하지만 박 문주는 파석장은 물론,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내는

합장공(合掌功)뿐만 아니라, 신법의 마지막 단계라 할 수 있는 기천무까지 구사한다.

모든 법의 응용 변화가 자재로울때 가능한 경지다.

심법수련도 경지에 올라, 50대 초 날카롭던 인상을 벗어버린지 오래다.

마음을 분리해, 먼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알 수 있는

환영신공(幻影神功)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기천은 수행의 도

 

그렇다면 그에게 이 같은 비법을 전수해준 "박 진인"은 어떤 인물일까?

 

“사부님은 양양 사람으로 다섯 살 때, 조사부이신 원혜 상인께서 데려다

무예를 가르치시는 바람에 열아홉까지 산생활을 한 분입니다.

조사부는 쌀가마를 공깃돌 다루듯이 하고, ‘솔장법’으로 아름드리 나무를

재로 만들 정도로 공력이 높았답니다.

또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을 가볍게 오르내리는가 하면

저녁에 설악산을 출발해 경북 봉화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다음 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나타나곤 했답니다.

그런 분한테 조련을 받았으니 어련하겠습니까?”

 

박 문주에 따르면, 박 진인은 무예는 비길 데 없는 고수였지만

하산 뒤 세상 물정을 몰라 온갖 풍파를 겪었다.

1972년 계엄령이 선포됐을 때 계룡산 진장암에 있다가 간첩으로 몰려

원혜상인과 교류가 깊었던 탄허(呑虛) 스님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는가 하면

1970년대 중반, 부산 해운대에서 ‘칠성파’ 조직원 7명과 맞장을 떠

‘신화’를 남기는 등 좌충우돌했다. 야구방망이 등으로 무장한 조폭들을

순식간에 서너 명 잠재우고 달아났는데, 비호같이 빠른 것은 둘째 치고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늑대소년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대학생 7명을 일렬로 세워 놓고는 낙엽 스치듯 머리를 밟고 지나가는 시범을 보여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잘 것없는 체수에 이해할 수 없는 무예를

세상이 알아줄 리 없었다. 그래서 박 진인은 기천을 세상에 확인시켜주기 위해

수없이 겨뤘다. 하지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다.

‘스트리트 파이팅’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지자

1976년 서울 약수동에 ‘기천연무장’이란 간판을 내걸고 정식으로 도장을 차렸다.

 

기천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다른 무술의 고수도 많았다.

현재 잘나가고 있는 무술단체의 대표들도 포함돼 있었다.

박 문주가 진인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진인은 기벽(奇癖)이 심해,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우리 사부님은 남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광인(狂人)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분이에요.

기인(奇人) 소리를 듣던 중광 스님을 열 명 붙여놔도 안 돼요.

때때로 한 번씩 탈바가지를 쓰고, 우리 매장에 나타나서는

한복에다 머리핀을 스무 개쯤 붙이는가 하면, 명동 같은 데 가서도

맨발로 덩실덩실 춤추고 그래요.

옆에 따라 다니는 제가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분은 태연히 그러고 다녔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본심을 알려면 한 번 흔들어봐야 한다며

가까운 사람들 사무실을 한 번씩 찾아가서 깽판을 치곤 했습니다.

장난감 총이나 물총을 들고 다니면서, 느닷없이 직장에 찾아가서 쏴 버려요.

이태원 매장에서도 그런 행위를 많이 하셨어요.

 

이웃집에 보석가게가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는 진주 목걸이 같은 걸 그냥 깨물어 버려요. 그러면 제가 해결해야죠.

전생의 인연이라고 여기는 저도 싫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부 곁을 떠나 버렸어요.

제가 처음 여기에 입주할 때도 한바탕하셨죠.

사부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시면서 어디서 탔는지, 검은 안경을 끼고

차 등에 올라탄 채, 춤을 추며 마을로 들어오시더라고요.

마을 사람들과 기천문 식구 150여 명이 그 광경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부님은 어린애 같은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그분이랑 지내려면 동심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래야 견뎌내지 그렇지 않으면 못 견뎌요.”

 

하지만 박 문주는 끝까지 사부를 챙겼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란 믿음에서다. 어찌 생각해보면 멋지지 않나.

세상에 사부님 말고, 또 그럴 자가 있을까.

이심전심(以心傳心). 명색이 진인(眞人)인데, 제자의 충심을 모를 리 없었다.

드디어 사제 인연을 맺은 지, 20년 만인 1996년 10월 3일 개천절에

사부는 문주의 법통을 제자에게 물려줬다.

 

박 문주는 대권과 함께 대업을 물려받았다.

대업이란 기천의 틀을 견고히 세우는 동시에

단순한 무술이 아닌, 세상을 구원하는 ‘활명의 법’으로 거듭나게 하라는 주문이다.

그가 문주 자리를 물려받은지, 1년 만에 세속 생활을 정리하고

타던 승용차와 단돈 10만원만 들고 계룡산으로 입산한 것도

바로 대업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기천이 수행의 도입니다.

따라서 무예는 수행의 방편이지, 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불가와는 달리 마음을 바루기 전에 몸의 수행을 강조할 뿐이죠.

그런데 아직도 마음만 바루려고 하는 이들이 많아요.

그러니 깨우치는 사람이 잘 안 나오는 겁니다.

마음의 집이 몸인데 이게 부실해 버리면, 비가 새고 바람에 흔들릴 텐데

그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육신을 쓰고 있는 한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악은 틈만 나면, 창 끝을 들이밉니다.

늘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저는 어떤 수행이고, 돈오점수(頓悟漸修)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기천은 기법과 신법 그리고 심법(心法)이 삼위일체를 이룰 때, 완성된다는 얘기다.

박 문주는 요즘 종종 전통무예 대표들과 모임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는 늘 전통무예의 앞날과 나아갈 길이 화두다.

박 문주는 제대로 된 몸에서 제대로 된 정신이 나오고,

제대로 된 정신이어야,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온다고 강조한다.

 

“전통무예도 이제는 치고받고 하는 ‘술(術)’ 차원에서 벗어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합니다.

국민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데 무예만 한 것이 없습니다.

조사부께서는 일찍이 ‘머지않아 인류가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질병으로

싹쓸이될 텐데,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미리 자가면역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기천이야말로 바로 면역력을 길러주는 구원의 큰 법이니

반드시 널리 알려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선구자의 혜안이죠.”

 

 

      몸의 면역력 키워줘

 

박 문주는 내가신장만 제대로 해도 심신을 바룰 수 있다고 역설한다.

 

“기천의 모든 수행과정이 집약돼 있는 기천의 핵입니다.

발목부터 머리까지 몸의 중요 관절을 모두 꺾어서 역근(易筋)한 상태로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인체 내에서

기가 모든 경락으로 잘 유통되게 해주며, 특히 단전호흡이 저절로 이뤄지게 해줍니다.

그럼으로써 단전호흡을 통해 축적된 기가 신체의 각 부위에 자연적으로 공급되죠.

내가신장만 제대로 수련해도 거의 모든 질병을 자연치유할 수 있어요.

 

특히 내가신장을 서다 보면, 고통을 통해 정신의 정화를 맛볼 수 있으며

심신의 능력이 극도로 강화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신장에 이어

범도→대도→소도→금계독립→허공(伏虎) 순으로 진행되는 걸 합쳐

육합단공(六合丹功)이라고 하는데, 기맥을 열어주고 단전으로 축기가 되도록 해줍니다.

따라서 육합단공을 하면, 기혈순환이 원활해져 몸에 있는 면역력이 극대화됩니다.

실제 간질환 등으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정상을 되찾은 사례가 수없이 많아요.

아마 우리가 종교집단이었으면 난리가 났을 겁니다.”

 

박 문주는 사부인 박 진인의 ‘똥의 도’얘기를 즐겨 한다.

먹기는 엄청 먹는데 싸지 않아 모든 병이 생긴다는 것이다.

각종 성인병 등, 개인의 질병은 물론 사회나 국가의 건강상태를 진단하는 데도

기막히게 유용한 논리다.

있는 자가 (부를) 먹기만 하고 싸지(내놓지) 않다 보니

사회가 병들고 국가가 앓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현실을 꿰뚫는 사자후(獅子吼)다.

 

무예의 역사는 오래다. 기본적으로 수렵채취시대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보다 강한 상대들의 몸짓을 흉내 내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무예는 하나의 원형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한뿌리인데 전수과정에서 나름대로 특정동작을 강조하다 보니

별도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일 뿐이다. 기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박 문주는 국선도나 태껸 등도 원형은 같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기천이 가장 원형에 가깝다고 봅니다.

기천이 산중에서 비전(秘傳)된 사실이 방증입니다.

많은 손을 거치지 않았다는 얘기죠.

기천의 역사는 산중에서 수련하다 임진왜란 같은 국가 위기 때

산에서 내려와 싸우고, 끝나면 다시 산으로 돌아가고 하는 ‘지킴이’의 역사입니다.”

 

사실 기천에 대한 역사적 문헌 증거는 없다.

행하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行而無跡)는 선가의 불문율에 따른 때문이다.

자고로 도라는 것은 특성상 스스로 찾아가 노력해서 깨우치는 것이지

말이나 글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기천은 도(道)다.

그래서 기천의 가르침 중 으뜸은

‘말과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천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단군조선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믿는다.

 

부여의 대천(代天), 고구려 경천(敬天) 혹은 다물(多勿), 백제 교천,

신라 숭천(崇天), 발해 진종(眞倧) 등을 거쳐 내려오다,

고려의 불교, 조선에선 유교에 치여, 산중으로 숨어들어

‘지킴이’들에 의해 명맥만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판소리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듯이, 기천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을 터.

박문주의 바람처럼 세상에 나온지 40년 된 기천이

과연 한민족의 웅비를 도모하는 ‘구원의 큰 법’ 될지 기대해볼 일이다.

 

 <자료출처 : 월간중앙(이만훈/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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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천문(氣天門) 2대 문주(門主) 박사규

걸음걸음은 날으는 구름이요, 한 주먹으로 魔를 타파하니…

 

49세에 계룡산에 입산해 수련생활을 하고 있는 기천문 2대 문주 박사규씨.

1977년 1대 문주 박대양과 일전을 벌여 참패한 후 기천문의 길에 들어선 그는 “기천문이야말로

단군 시대부터 우리와 함께 해온 전통 무예”라고 주장한다. 민족 주체성을 중시하며 기천문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박 문주의 예사롭지 않은 삶을 알아보았다.

계룡산에 머무는 박사규 문주는 수련을 하고 지인들과 도담을 나누거나 수련생들을 지도하며 하루를 보낸다.

이세상에는 직업도 가지가지다. 이색적인 직업을 수소문해 봤더니, ‘문주(門主)’라는 직업이 있다. 문주는 글자

그대로 문파의 주인을 지칭한다. 무협지에 나오는 소림파, 무당파, 화산파의 장문인들이 바로 문주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문주가 무협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현재

국내에도 있다. 기천문(氣天門)이라는 문파의 문주로

불리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박사규(56)씨다.

그는 기천문의 2대 문주로 알려져 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문주가 되는 것일까 궁금했다.

 

 

 

 

박 문주는 백두대간의 중악(中岳)인 계룡산 신원사 입구에 있는 허름한 민박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방안에 들어가니 조그마한 단군 영정이 놓여있는 앉은뱅이책상과 고목나무 밑둥을 다듬어 만든

차상(茶床)이 달랑 있을 뿐이다. 일개 문파의 문주가 기거하는 처소라기에는 너무나 소박하다.

 

그는 평범한 얼굴에 풍채가 우람하지도 않다. 키도 170cm나 될까. 그러나 눈을 보니 달랐다.

예사롭잖은 눈빛에서 어떤 기운이 뭉쳐있음이 느껴졌다. 사람의 내공은 눈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남자 나이 50대 중반이 넘어서면 외모의 매력은 떨어진다. ‘신정(腎精 : 신장에 뭉쳐 있는 정액)’이

고갈되기 때문에 눈빛이 흐려지면서 돈 욕심만 잔뜩 남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박 문주의 눈빛은 50대 후반의 사그라지는 그것이 아니었다. 정(精)을 축적하면서 공력을

충실하게 연마해온 사람의 눈빛이었다. 차상을 마주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49세에 10만원 들고 입산

-가정도 있는데, 어떻게 해서 산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까?

“역대 조사(祖師)들이 불러서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복잡한 질문을 한마디로 압축한다.

역대 조사라고 하면 이 땅에서 도를 닦았던 정신계의 무수한 스승들을 가리킨다.

그 스승들이 자신을 산으로 불렀다는 말이다.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죠.

“지난 십수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도 마음은 항상 산에 있었습니다. 꿩이 콩밭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저도 산을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처자식이 있어 생계에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시간이 나면 3∼4일, 때로는 10일 일정으로 산에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러다가 1997년

마흔아홉살 때, 자연스레 산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때가 되니까 정신계의 스승들이 더 이상

세속적인 삶을 계속할 수 없도록 한 방 놓더군요. 한방 놓을 때, 빨리 눈치채야 합니다.

그때 미적거리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KO 펀치를 맞아요. 저는 빨리 눈치를 채고

산으로 들어왔습니다.

처음 계룡산에 들어올 때 타고 다니던 승용차 1대와 단돈 10만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안 죽고 아직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入山 가능성 큰 사주

-현재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제가 서울 이태원에 옷가게를 갖고 있는데, 지금은 집사람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대로 가족들 생계는 거기서 버는 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박 문주는 2남1녀를 두었다. 자녀들이 이미 장성해 대학을 다니거나, 결혼 적령기에 도달해 있다.

명절이나 제사 때만 서울 집에 들른다.

자식들에겐 미안한 마음뿐이지만 아버지가 의미 있는 길을 가고 있다며 자신의 길을 이해해주는

자식들이 무척 고맙다고.

“박 문주님은 생년·월·일·시가 어떻게 됩니까?”

필자는 특수한 길을 가는 사람을 만나면, 사주팔자를 물어보는 습관이 있다.

산에 들어와 사는 방식은 누구나 쉽게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 입산해서

도를 닦는 것일까. 운명이 타고나는 것이라면 순응하는 게 상책이다.

 

사주는 내 나름대로 터득한 지인지감(知人之鑑)의 한 방법이다.

그는 1949년 2월4일(음력) 진시(辰時)라고 알려줬다. 진시라면 아침 7시 반에서 9시 반까지다.

육십갑자로 환산해 보니, 기축(己丑)年, 병인(丙寅)月, 임진(壬辰)日, 갑진(甲辰)時다.

중요한 대목은 일주이다. 박 문주는 임진일에 태어났다.

壬은 한강과 같은 큰 강물을, 辰은 용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흑룡으로서 힘이 좋은 명조이다.

임진일에 태어난 사람은 융통성과 배짱이 있다고 해석한다.

   

 

어떻게 해서 그가 입산수도 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박 문주의 지지(地支)를 보면, 丑년辰일辰시로 입산할 가능성이 많은 사주다.

사주 전체로 보면 ‘식신생재(食神生財)’격이다.

식신생재란 ‘베풀어놓은 것이 결국 재물로 돌아온다’는 의미. 베풀 줄 아는 기질이므로

재물이 붙을 수 있다. 식신생재 격은 사업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

박 문주처럼 사업을 하다가 입산수도하면, 이 사업적 자질이 어떻게 변하는가?

제자를 키우는 쪽으로 작용한다. 제자도 아무나 키울 수 없다.

식신(食神)이 없는 사람은 제자가 따르지 않는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승이 베풀 줄 알아야 제자도 따르는 법이다. 명리학(命理學)에서 보면

박 문주의 사주는 제자를 키울 수 있는 사주다. 이 사주에서는 甲辰시의 甲이 식신이다.

박 문주 밑에 제자들이 많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이는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다.

 

-계룡산에 들어와 산 지 7년이 되었습니다. 계룡산은 어떤 산이라고 생각합니까?

“민족의 성산(聖山)입니다. 유사 이래 수많은 도인들이 이 산에서 공부했습니다.

공자, 석가, 예수만 성인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 중에도 훌륭한 어른이 많았습니다.

 

그분들은 조용히 살다가 가셨습니다. 어떠한 자취도 남기지 않았어요.

계룡산은 정신세계의 고단자들이 머물다가 간 곳입니다. 자신만의 안테나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어요. 또 계룡산은 인자한 산입니다. 어머니 품 같아 이른바 기돗발이 잘 받습니다.

흔히 다른 산을 섭렵하고 계룡산에 들어와야 좋다고 합니다. 그만큼 계룡산의 기운이 강하다는 뜻이지요.”

 

-안테나로 느낄 수 있는 기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과거에 수행했던 정신세계 고단자의 에너지가 시공을 초월해 남아 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불가나 도가, 요가의 고단자들도 그런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에너지가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한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고단자들이 성취했던 경지라고나 할까. 정신세계의 어떤 경지에 이르면

그에 합당하는 법이 존재합니다. 법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요.

그래서 후학들이 공부할 때 그 법 또는 에너지와 접속하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그 법을 찾아갈 수 있어요.

문제는 자신이 얼마나 예민한 안테나를 세울 수 있느냐죠.

 

산에 들어와 살면서 제 자신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죠.

일찍이 박대양 사부님께서

‘부풀려진 고무풍선에 일침이 가해져서 터질 때는 엄청난 힘이 쏟아질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산에 들어와 살면서 그 의미를 체득했습니다.

 

처음 5년간은 갑사(甲寺) 입구에서 살았습니다.

갑사는 전통적으로 힘이 강한 무인을 많이 배출한 곳이죠.

갑사 주변은 에너지가 거칠고 강합니다.

그래서 역대로 갑사에서 장사 스님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2년 전 신원사(新元寺)로 옮겼는데, 이곳은 갑사에 비해 에너지가 훨씬 부드럽습니다.

살아보면 그걸 압니다.”

계룡산 주변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절터가 있다.

동쪽에는 동학사(東鶴寺), 서쪽에는 갑사(甲寺), 남쪽에는 신원사(新元寺)다.

북쪽에도 원래 절이 있었지만, 폐사되어 현재는 비어있다. 북쪽을 상신리(上莘里)라 부른다.

소설 ‘단’의 주인공 봉우 권태훈(1900∼94) 선생이 상신리에서 오래 살았다.

 

신원사의 특기 사항은 절 오른쪽에 ‘중악단’(中岳壇)’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산신을 모신 곳이 세 군데 있었다. 묘향산의 상악단(上岳壇),

계룡산의 중악단, 지리산의 하악단(下岳壇)이 그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악단과 하악산은 사라졌지만,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만큼 백두대간에서 비중 있는 포인트가 계룡산이요, 5000년 민족 정신사의 뿌리가 보존된 곳이

바로 계룡산 중악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기천문의 문주가 계룡산에서 머무른 것도 우연은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갑사의 강력한 기운을 섭렵한 다음 부드러운 기운을 섭취하려 신원사로

오지 않았나 싶다.

 

단군 시절부터 전수된 기천문

그는 동이 틀 때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고 해가 떨어지면 활동을 중지한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침에는 계룡산 봉우리를 순례한다.

우선 관음봉에 올랐다가 문필봉으로 간다.

천제단이 있는 문필봉에서 수련을 한 후, 연천봉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한바퀴 도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

아침 6시에 시작하면 9시가 약간 넘어 숙소로 돌아온다.

낮 시간에는 혼자 경전을 읽거나 방문객을 맞이한다.

지리산, 모악산, 설악산, 속리산 등에서 공부한 산사람들이

기천문 문주가 계룡산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데,

그들과 도담(道談)을 나누며 기운을 교차하기도 한다.

기를 공부한 사람들은 기운을 교차하면서 상대방의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간파한다.

외공을 닦지 않고 내공만 닦은 사람은 아무래도 기운이 약하다.

주말에는 각지에서 올라오는 기천문 수련생들을 지도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수박도’의 자세.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한다.

세간에서 ‘산중무예’로 알려진 기천문(氣天門)이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전통 무술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해 여러 대학에

기천문이라는 동아리가 결성되기도 했다.

‘보보비운(步步飛雲) 일권타마(一拳打魔)’라는 문구는

대학가 기천문 동아리의 슬로건이다.

걸음걸음은 날으는 구름이요, 한 주먹으로 마를

타파한다’ 문구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통쾌함과

그 어떤 신비함을 느끼게 한다.

 

기천의 기원은 5,000년 전 단군으로거슬러올라간다.

고조선에서 시작해 고구려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를 이어

현재에 이어졌다는 것. 우리나라 상고사의 전통과 궤를

같이하는 만큼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문파다.

상고사의 중요한 경전으로 여기는

‘천부경’과 ‘한단고기’는 기천의 이론적 배경이다.

 

기천은 겉으로 보면 무술이지만 한 단계 더 들어가면

한민족에게 면면히 내려온 마음 닦는 법이기도 하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말이 있듯 안으로는 심성을 닦고 밖으로는 몸을 닦는다.

먼저 몸을 강철같이 단련하고 그 과정에서 몸의 모든 기맥이 뚫리면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비우면 부수적으로 몸은 저절로 닦아진다고 본다.

하지만, 기천은 몸이 먼저고 마음이 그 다음이다.

꽉 막힌 사무실에서 만성운동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기천의 몸 닦는 노하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천의 유래가 단군까지 소급된다고 하셨는데, 그걸 입증할 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문헌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파에서 사용하는 기본예법 중 ‘단배공(檀拜功)’이라는

인사법이 있습니다. 정확한 표현은 ‘단군배공(檀君拜功)’으로 단군에게 올리는 인사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단군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 때문에 ‘단군배공’을 ‘단배공’으로 줄여서 불렀던 것이죠.

기천에서 스승께 인사드릴 때 취하는 인사법이 바로 단배공입니다.

기천을 지켜온 역대 지킴이들로부터 쭉 내려온 인사법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기천은 단군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마침 문하생 2명이 박 문주에게 장중하면서도 복잡한 절차를 따라 하직 인사를 했다.

양손과 양발 끝에 기를 모아서 태산이 엎드린다는 심정으로 하는 인사로 4∼5분이 걸렸다.

인사하는 문하생의 무릎과 발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자체가 엄청난 수련으로 보였다.

저절로 단전에 에너지가 모아질 것 같았다. 박 문주는 이것이 바로 단배공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부터 무예의 전통 단절

-단군 이래로 기천이 전해져왔다는 또 다른 근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납니다. 벽화에 수렵도가 있어요. 말을 타고 활을 겨누면서

사냥하는 모습이죠. 그 반대편에 보통 ‘수박도’라고 부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남자가 웃통을 벗고 두 손을 들어 상대방과 겨루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자세가 기천에서 연습하는 자세 중 하나입니다. 이 한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기천에서는 이 자세를 ‘범도자세(虎勢)’라고 불러요. 범이 웅크리고 있는 자세로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저희도 이 자세를 많이 연습합니다.

그런데 그 자세가 벽화에 나와 있는 겁니다. 기천을 모르는 사람은 벽화를 보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천을 아는 사람은 대번에 그 의미를 알아차리죠.

이걸로 보아 기천은 고구려 시대에도 행해졌던 겁니다.

한쪽에는 수렵도, 다른 한쪽에는 범도자세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고구려 남자들의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고구려 시대를 대표하는 놀이가 ‘수렵’과 ‘기천’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수렵이 일종의 군사훈련이었다면 기천은 개인 차원의 무술연마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기천 동작 하나하나는 바로 전쟁터에 투입될 수 있어요. 칼을 잡으면 곧바로 검법이 됩니다.

고구려 남자들이 평소 이러한 연마를 했기에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사강국 고구려를 지탱했던 이면에는 기천이 있었다는 거죠. 기천을 맨손으로 하면 권법(拳法)이요,

봉(棒)을 들고 하면 봉술이 되고, 검을 들면 검법(劍法)이요, 활을 들면 궁술(弓術)이 되고,

창(槍)을 들면 창법(槍法)이 됩니다.

   

 

기천문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의선인(早衣仙人)에 관한 것입니다. 고구려 선맥(仙脈)에 조의선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조의(早衣)는 검은 옷을 뜻합니다. 즉 검은 옷을 입은 선인이라는 뜻이죠. 고구려의 조의선인들은 국난을 당하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지켰습니다. 당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조의선인

 3만명이 이들과 맞써 싸워 이겼습니다. 그런데 기천의 역대 스승들도 검은 옷을 입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천에서는 이들 조의선인을 기천을 수행했던 사람들로 추정합니다.

 

또 하나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연개소문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부터 집을 나와 전국 각지의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기천을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천의 수련단계 중 ‘상박권(上膊拳)’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호랑이가 공격을 하기 위해 엎드려 있다가 솟구치는 자세입니다.

솟구치면서 상대의 윗부분, 즉 관자놀이나 턱을 강타할 수 있는데 그 파괴력이 엄청납니다.

상박권은 기천에서도 고급과정에 속하는 자세로 배우기 힘들기로 유명합니다.

연개소문은 상박권을 연마하다가 중도에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연개소문은 하산한 후 중국의 무술 고수들과 겨뤘지만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나라 태종의 팔대장군(八大將軍)을 기천의 무학(武學)으로 제압했을 뿐 아니라

중국 무림을 평정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은 정치인이기에 앞서 중국 무림세계에도 널리 알려진 무술의 고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더라도 기천은 고구려 시대에도 존재했던 무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를 볼까요.

고려 공민왕릉 석상의 옷매무새를 보면

양쪽 허리춤 부분에 매듭이 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기천의 입장에서 이 매듭을 주목합니다. 기천에서도 양쪽 허리춤에 매듭을 합니다.

저를 가르친 박대양 사부님도 양쪽 허리춤에 매듭을 짓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대양 사부님이 어렸을 적 설악산에서 공부할 때에도 조사부(祖師父)인 원혜상인이

반드시 양쪽 허리춤에다 매듭을 짓도록 지도했다고 합니다. 이 매듭은 기천 옷매무새의 관습입니다.

저는 그 전통을 공민왕릉 석상 매무새에서 발견했습니다.

고려시대까지도 기천으로 상징되는 상무정신이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시대입니다. 암흑시대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무예의 전통이 거의 끊어져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금만 특수한 능력이 있어도 탄압을 했습니다.

문(文)을 숭상하면서 무인을 천대하고 억압했죠.

그래서 전통 무술은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간신히 그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이처럼 실날같이 이어져 오던 맥이 20세기 후반에 들어 수면 위로 나온 것입니다.

기천이 이렇게 세상에 등장한 것은 실로 수백년 만의 일입니다. 저로서는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박 문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천은 고구려의 상무적 전통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로 이어진 정신의 정수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까.

고구려 정신의 핵심은 민족의 주체성이다. 그것이 많이 남아 있는 도맥이 바로 선가(仙家)다.

필자는 유·불·선 삼교 가운데 민족의 주체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한다.

선가는 고구려와 많이 겹친다. 기천은 고구려와 선가의 유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단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원혜상인과 1대 문주 박대양

박 문주의 이야기와 ‘기천’이란 책을 참고해 기천이 이어져 온 도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 박사규 문주의 사부는 박대양(朴大洋 : 1952∼현재) 진인이다. 박대양은 기천문의 1대 문주이다.

박대양이 기천에 입문해 현재까지 살아온 과정은 한편의 대하소설이다.

박대양은 강원도 양양 사람이다. 다섯 살이 되던 해 겨울, 양양의 설악산 계곡에서 얼음을 치고 놀다가

얼음이 깨져 계곡에 빠졌다고 한다. 이때 지나가던 노인이 그를 살려줬고, 이 일을 계기로

노인과 어린 박대양은 인연을 맺게 됐다.

노인은 설악산 밑에 있는 암자인 보광암에 기거하고 있었다. 어린 박대양은 보광암에 자주 놀러갔다.

할아버지가 사탕도 주고 무동도 태워주면서 예뻐했기 때문이다.

보광암에는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스님이 노인을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어린 박대양은 “스님도 할아버지인데 왜 저 할아버지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느냐?”고 물었다.

스님 왈 “내가 어렸을 때도 저분은 할아버지였고 지금도 할아버지다”라고 답변했다.

이 노인이 바로 기천문의 지킴이였던 원혜상인(元慧上人)이다.

상인은 기천의 최고수를 일컫는 호칭이다.

   

 

1957년 원혜상인은 박대양의 어머니에게 승낙을 받고 아이를 설악산으로 데려갔다.

원혜상인은 박대양을 등에 업은 다음 눈을 감게 했다. 그는 경공술을 써서 거의 날아갔다고 한다.

바람소리가 휙휙 들리고 산이 휙휙 지나갔다. 눈을 떠보니 어딘지 모르는 깊은 산속이었다.

후일 설악산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날부터 혹독한 산중 수련이 시작됐다.

처음 3년간은 내가신장(內家神掌)만 했다.

선 채로 양쪽 무릎을 오무려 맞대고 두 손은 눈 높이에서 교차한 자세로 서 있는 자세다.

이렇게 서 있으면 단전으로 모든 기운이 모인다. 대단히 힘든 자세로

보통 사람은 5분 이상 버티기 힘들다.

필자도 해봤지만 바들바들 떨려서 도저히 5분을 넘기지 못했다.

박대양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오직 이 자세만 취하는 훈련을 받았다.

 

식사는 거의 생식이었다. 어떤 때는 산짐승의 고기로 만든 육포조각을 먹기도 했다.

가끔 원혜상인이 마을에서 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왔는데, 마치 한 손으로 접시를 들 듯 가볍게 들고

단숨에 산을 올라왔다. 평상시 거처는 자연동굴이었다. 동굴 앞에는 대나무 발이 쳐있었다.

그런데 원혜상인은 동굴을 드나들 때 동굴 입구의 발을 건드리지 않았다.

너무 빨라서 발을 들어올리는 것을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발의 틈새 사이로 연기처럼

빠져나간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큰 나무 한 그루를 ‘솔장법’으로 치면 벼락에 맞은 듯 재가 됐고 쌀 한 가마니 정도는 공깃돌 들 듯

가볍게 다뤘다. 또한 ‘돌단장’으로 집채만한 바위를 축구공 차듯 발로 차버릴 수 있었다.

또한 축지법을 구사했으며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을 마음대로 뛰어내리고 올라가는 경공법도 구사했다. 저녁 무렵 설악산을 출발해 경북 봉화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다음날 새벽에 설악산에 돌아오는 일이

예사였다. 물론 걸어서 다녔다.

 

‘진법’을 펼치기도 했다. 박대양이 수련도중에 하도 힘이 들어서 도망치려고 몇 번 시도했다.

하루종일 도망쳐도 처음 수련하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진법’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원혜상인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평범했고 키도 170cm를 넘지 않았지만 힘은 장사였다.

박대양은 5세 때 입산하여 19세 때까지 설악산에서 기천을 연마했다. 엄청난 고행의 과정이었다.

스승이 시키니까 무조건 한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속가에 있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 박대양은

어머니를 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원혜상인은

“네가 3년만 더 공부한 후 어머니를 만나면 어떻겠냐”고 제자를 달랬지만,

박대양은 산을 내려가겠다고 계속 떼를 썼다. 1970년 박대양은 나머지 3년 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하산했다. 당시 원혜상인의 나이는 159세였다고 한다.

그가 하산한 지 3년 후 원혜상인은 세상을 떠났다.

 

모래사장에 발자국 남기지 않아

산속에서 기천만 공부한 박대양은 사바세계에서 온갖 풍파를 겪는다.

1972년 계엄령이 선포됐을 때 계룡산에 있던 박대양은 간첩으로 체포된다.

호적이 없어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었던 것. 영락없이 간첩으로 몰릴 판이었는데, 산을 내려올 때

문득 스승님이 당부하던 말씀이 생각났다.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탄허(呑虛) 스님을 찾아라.

그러면 도와줄 것이다.”

간신히 연락이 닿은 탄허 스님이 신원보증을 해줘 경찰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강원도 설악산과 오대산 일대의 불교계 고승들은 원혜상인의 도력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허 스님이 원혜상인을 만날 때는 삼배를 올렸다.

두 사람은 가끔 만나 이런저런 도담을 나누는 사이였던 것 같다.

 

무술은 절정의 고수였지만 사회 경험이 전혀 없었던 박대양은 속세에 내려와 좌충우돌한다.

1970년대 중반 부산에서의 일이다. 당시 부산에는 칠성파라 불리는 조폭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박대양을 한번 손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맞짱을 뜨기로 했다.

박대양이 해운대 백사장에 가보니 칠성파 멤버 14∼15명이 각목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박대양은 바람처럼 빠르게 그들을 때려 눕혔다.

어찌나 빠른지 주먹과 발이 어디서 나오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싸움이 끝나갈 무렵, 박대양은 모래사장을 빠져나갔는데,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칠성파가 놀란 것은 열댓 명이 한 사람에게 패했다는 것보다

그가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훗날 부산지역에 ‘늑대소년’이 나타났다는 괴담이 떠돌기도 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것은 어떤 비법일까. 일종의 비보법(飛步法)이다.

칠성보(七星步)를 보여준 것으로,

후일 박대양은 7명의 제자를 일렬로 세우고 머리 위를 밟고 지나갔지만

제자들은 낙엽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것으로 느꼈다고 한다.

이것이 칠성보인데 해운대 백사장에서 칠성파는 그 칠성보에 놀란 셈이다.

   

 

박 문주의 방에는 조그마한 단군 영정이 놓여있는 앉은뱅이책상과 고목나무 밑둥을 다듬어 만든 차상이 하나 있었다. 문파의 문주가 기거하는 처소라기엔 너무도 소박하다.

박대양은 19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내로라하는 무술 고수들과 무수한 실전대결을 펼쳤는데, 밀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속세가 싫어져 다시 산에 들어가 7년 동안 스님생활을 하기도 했다.

1대 문주 박대양은 1996년 제자인 박사규에게 문주의 자리를 넘겼다. 박대양은 지금은 결혼해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다. 박사규가 스승인 박대양을 만나게 된 사연도 매우 흥미롭다. 박사규는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다. 진도는 예향인 호남에서도 알아주는 예향의 본거지다. ‘진도에서는 개도 붓을 물고 다닌다’ ‘진도 남자 중에서 북 장단과 판소리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

진도에서 성장한 박사규는 예인적인 기질이 있으면서도 무술을 좋아했다. 10대 후반부터 합기도를 시작해 합기도 공인 5단에 이르렀다. 1970년대 후반 장충체육관에 전국 합기도 고단자 30인이 초청되어 시범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박사규도 30인 안에 들었을 정도로 고단자였다. 그러다가 무술의 고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바로 박대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당시 고단자가 있으면 찾아가서 한판 붙는 것이 유행이었다.

 

세 살 어린 박대양 스승으로 모셔

 

박대양이 있는 서울 약수동에 찾아갔다. 1977년 박사규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다. 합기도 고단자라는 자존심을 가지고 한판 붙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박대양의 한 수도 제대로 받아낼 수 없었다. 박대양이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렸지만 무릎을 꿇고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다. 3년 동안 박대양을 직접 모시면서 혹독한 수련을 감당했다. 박대양 사부는 기벽(奇癖)이 있어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했는데, 박사규는 스승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드디어 1997년 그의 나이 49세 때 세속생활을 정리하고 계룡산에 들어왔다. 문주라는 법통을 이어받은 지 1년만이었다.

요즘 박 문주는 전통 춤사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기천의 동작 하나하나가 전통 춤동작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통 춤 동작이 3박자인데, 기천의 동작들도 3박자다. 3박자로 이뤄진 국악의 리듬에 맞춰 기천의 동작을 펼치면 그 자체가 바로 춤이 된다.

박 문주는 진도 출신의 ‘씻김굿 무형문화재’인 박병천(72)씨의 무가(巫歌) 녹음테이프를 수시로 듣는다. 박병천은 진도에서 8대째 내려오는 세습무(世襲巫)로 진도 씻김굿과 진도북춤을 이어받은 명인. 그는 박병천의 가락을 들으면 흡사 기천의 동작들을 위한 장단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가장 천대받았던 무속인들이 상고시대부터 내려오는 민족의 리듬과 가락을 보존해 왔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趙龍憲

●1961년 전남 순천 출생
●원광대 대학원 불교민속학 전공, 철학박사
●한·중·일 삼국의 600여개 사찰과 암자를 현장 답사
●원광대 초빙교수
●저서 : ‘나는 산으로 간다’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고심 끝에 박 문주는 ‘무예와 춤은 동전의 양면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도(武道)는 예도(藝道)로 통하고 예도는 무도로 통한다. 따라서 무도와 예도는 한 마음에서 갈라져 나온 오누이인 것이다. 그 한 마음은 기천의 심법(心法)이자 단군의 심법이며 ‘천부경’과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심법이자 결국 우리 민족의 얼이다. 기천의 2대 문주 박사규는 힘주어 말한다.

“기천은 우리민족의 얼입니다. 얼이 없어지면 민족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끝)

 

http://cafe.daum.net/alchem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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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반탄(反彈)의 민족무예 기천문(氣天門)
상대방을 한방에 눕히는 ‘殺手’
관련이슈 : 박정진의 무맥
  • 십팔기(十八技)가 우리의 족보 있는 무예의 보고라면 기천문(氣天門)은 족보가 제대로 없이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내려온 선가(仙家)의 보고이다. 때때로 문화는 족보가 없이도 면면히 내려와 문화인자(文化因子)로 인하여 새롭게 재생되고 부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천문에도 권법을 비롯하여 검법과 창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 특유의 단전호흡법인 기법(氣法)마저도 계승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기천문에서는 대륙의 기질과 사나운 북풍과 맞서 싸우면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삶을 읽을 수 있다. 택견이 유희적 성격이 강하였다면 기천은 살수(殺手)로 바로 이어지는 무예였다.

    ◇박사규 기천문 2대 문주가 단군에게 예를 올리는 단배공 자세를 하고 있다.
    민족의 성산(聖山), 백두산을 거점으로 형성된 한민족 고유의 무예 기천문(氣天門). 그동안 말로만 전해오고 귀로만 들려오던 산중무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기천은 설악산에서 수련해 오던 1대 문주(門主) 박대양(朴大洋) 진인(眞人)이 1970년대 시중에 내려옴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그동안 기천은 산에서 산으로 옮겨가면서 비전으로 전해왔는데 백두산에서 태백산으로, 태백산에서 설악산으로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왔다. 백두산 시대는 전설 같은 시대이고, 태백산 시대는 박대양 진인의 스승인 원혜상인(元慧上人)의 시대이고, 그 이전은 민족의 지킴이가 전해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킴이는 글자 그대로 이 땅의 지킴이다. 지킴이는 민족의 위기 때마다 홀연히 나타나서 장수들을 도와주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기천문을 비유하자면 바로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옛날 백두산은 대풍산(大風山)이었다. ‘큰 바람 산’이다. 그래서 기천의 일곱 가지 보배 같은 절권(七寶切拳)에서 그 처음이 바로 대풍(大風)이다. 대풍이란 싸움에서 상대방의 몸에 바짝 붙어서 벌이는 역수(逆手)이다. 여기서 웬만한 무예는 모두 나가떨어진다. 그 다음이 풍수(風手)이다. 풍수는 반탄(反彈)의 수로 원으로 감아서 치는 것을 말한다. 반탄이란 항상 힘을 쓰려는 방향과 반대로 역근(逆筋)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목표인 합(合)에 도달하는, 공격의 탄력성을 높이는 것이다. 또 끊어서 치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연결하며 쭉쭉 밀어서 찔러주는 솜씨는 엄청난 파괴력과 함께 언제나 예상 밖의 권법(拳法)을 하나 더 가지고 있어서 상대의 허점을 공격한다.

    쉽게 말하면 반탄이란 움직이려는 방향과 반대로 먼저 움직여서 반작용의 힘을 사용하여 계속 탄력성을 잃지 않고 공격할 수 있는 원(圓)의 무예이다. 이것은 공격이 실패하였을 때 방어에도 효과적이고 다시 다른 수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수이다. 기천에서 비연수(飛燕手)는 정말 살수(殺手)이다. 상대를 한 방에 눕히는 수이다. 산에 가면 돌제비라는 것이 있다. 돌제비는 몸집이 작지만 몇 마리가 모이면 독수리도 막아낸다. 그 돌제비가 날개를 치면서 독수리를 막아내는 것에 비유한 수이다. 이 비연수는 현재 2대 문주인 박사규(朴士奎·60세) 도인(道人)이 자신의 합기도 실력으로 1대 문주인 박대양 진인에게 승부를 걸었다가 순식간에 나가떨어지고 무릎을 꿇음으로써 기천에 입문하게 된 문제의 살수이다.

    바람의 무예, 가장 탄력성이 높은 무예, 기천은 선가(仙家)나 도가(道家)의 특성상 기록을 회피하고 산중비전(山中秘傳)으로 전해왔기에 오직 무예의 실증으로 민족의 주인임을 당당히 내세울 수밖에 없다. 기천문인이면 누구나 “말이나 글에 집착하지 말고 몸으로만 수행하라”는 좌우명을 잊지 않고 있다. 내가신장(內家神將)은 기천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고 무게도 형체도 이름도 없는 것에 도전하는 도반들은 처음이자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가신장의 자세를 통해 기(氣)의 오묘한 세계에 접한다.

    ◇박사규 문주가 제자들의 내가신장을 테스트하고 있다.
    기천이란 ‘몸으로 닦는 도(道)’이다. 기천의 도학은 ‘몸으로 중용을 깨닫는 도’라고 한다. 내가신장은 ‘기천태양역근마법내가산장’(氣天太陽易筋馬法內家神將)의 줄임말이다. 내가신장에서 역근법(易筋法)은 기천문의 독특한 수련법이다. 반탄(反彈)은 역근의 원리가 있기에 가능하다. 흔히 역근법은 달마의 소림무술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실은 바로 기천의 핵심이론이다. 역근은 역으로 꼬아서 힘이 안배가 되게 하는 이치에 따르는 것인데 생고무를 꼬아놓았을 때 원상태로 돌아가는 힘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처음엔 어렵지만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첩경이다. 기천문은 단학(丹學)에서도 가장 정면승부를 하는 수련법이다.

    내가신장의 기마(騎馬)자세는 억지로 단전호흡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단전호흡을 하게 되고, 저절로 온몸이 떨리고 진동을 경험하게 되는 기법(氣法)이다. 내가신장 하나라도 금강(金剛)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내가신장은 기천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하늘의 기(氣)를 내세우는 기천문은 실지로 내용에서는 ‘지천합틀무(地天合틀無)’라는 역순의 원리를 숨기고 있다. 여기서 ‘틀’이란 태극을 말하는데 발음의 운을 위해서 ‘틀’이라는 말로 대체하였다. 왜 땅이 먼저인가. 인간은 땅에 사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땅에 살기 때문에 하늘을 동경하고 하늘의 법칙인 천부(天符)에 충실히 하려고 한다.

    “원이 흐르다 멈추는 곳에 최대한 힘을 집중해서 공격한다. 공격은 흐르는 원 속의 한 점에 대한 순간적인 집중이다. 순간적인 집중이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 흐르는 이치는 물(水)과 같고 집중의 이치는 불(火)과 같다.” 물과 불의 이치를 무예에 그대로 적용한 무예, 기천문. 손 씀씀이는 화려한 꽃봉오리(手手花英)와 같고 걸음걸이는 나는 구름(步步飛雲)과 같다. 여기에 이르면 기천의 무예는 하늘과 땅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고(氣武天然) 한 자세는 아름답고 장엄하다(一態美儼). 이는 기천명(氣天銘)의 한 구절이다.

    21세기는 ‘기(氣)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한중일 삼국의 학자와 도인들에게 회자하고 있다. 기(氣)과학, 기(氣)산업이 활발하게 거론되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 기천의 무예는 고구려뿐 아니라 북방민족 전반에 퍼졌던 것이다. 부여에서는 대천(代天)이라고 하였고, 고구려는 경천(敬天) 혹은 다물, 백제는 교천, 신라는 숭천(崇天), 발해는 진종(眞倧)이라고 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하늘을 가지고 여러 뜻을 노는 것을 좋아했다. 천손족인 까닭이다.

    기천의 단계는 처음에 입문하면 행인(行人), 그리고 공인(功人), 정인(正人), 법인(法人), 도인(道人), 진인(眞人), 상인(上人)으로 나뉜다. 입문하면 처음에 행인(行人)이고, 한 10년 하면 공인(功人), 또 한 10년 하면 정인(正人)이 된다. 그 위에 법인(法人), 도인(道人)이 있다. 진인(眞人)이 되려면 거의 평생을 바쳐야 하고 상인(上人)이 되는 것은 노력이라기보다는 타고나야 한다. 내공 위주의 정적인 수련을 정공(靜功, 正功), 외공 위주의 동적인 수련을 동공(動功)이라고 한다.

    ◇산중수련에 취해 있는 여성수련자들. 기천문에는 여성무예인 천선녀 전설이 있다.
    옛말에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고 감천이면 순천(順天)하고 순천이면 응천(應天)하고 응천이면 청천(聽天)하고 청천이면 낙천(樂天)하고 낙천이면 대천(待天)하고 대천이면 두대천(頭戴天)하고 두대천이면 도천(禱天)하고 도천이면 시천(侍天)하고 시천이면 강천(講天)하고 강천이면 대효(大孝)하고 대효이면 안충(安衷)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하늘을 대하는 마음이 점점 층을 달리하여 승화됨을 말한다.

    기천의 종가는 어디까지나 한민족이다. 따라서 민족웅비를 무예로 뒷받침한 것을 찾는다면 바로 기천이고, 고구려 무술의 흔적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기천이다. 기천인들은 단군에게 예를 올리는 단배공(檀拜功)을 외치면서 수련에 들어간다. 단배공은 하늘과 땅의 가운데에 내가 있음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단배공은 단군배공(檀君拜功)의 줄임말이다. 지기(地氣)를 양손과 양발 끝에 모아 태산이 엎드리는 듯이 하는 인사법이다. 한 번 할 때 4∼5분을 한다. 이것 자체가 수련이다. 기천인들은 항상 산(山)의 이미지를 연상하면서 무술에 들어간다. 산은 한민족 문화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수행은 먼 산 오르듯이 한다. 힘을 쓸 때는 산을 들어올리듯이 하고 산을 밀듯이 하고 산을 내리누르듯이 한다.

    기천문 2대 문주 박사규 도인(道人)을 만나러 계룡산을 찾았다. 기천문이 문주(門主)라는 직함을 쓰는 것은 중국의 소림파, 무당파, 화산파처럼 독립된 무술체계를 가진 무문(武門)임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계룡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동학사(東鶴寺)와 신원사(新元寺)로 가는 삼거리에서 신원사 쪽으로 한 100여m 올라가니 기천문으로 올라가는 팻말이 보였다. 입구에서 차로 10여분 들어가니 ‘氣天門’이라는 큼지막한 입석이 보였다. 주변에는 암자, 당집이 산기슭에 늘어서 있었다. 계룡산 동쪽에는 동학사, 서쪽에는 갑사(甲寺), 남쪽에는 신원사가 있다. 북쪽에도 원래 절이 있었지만 폐사되어 현재는 비어 있다. 북쪽을 상신리(上莘里)라 부른다. 소설 ‘단’의 주인공 봉우 권태훈(1900∼1994) 옹이 상신리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신원사 오른쪽에 ‘중악단’(中岳壇)’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 국가적인 차원에서 산신을 모신 곳이 세 군데 있었다. 묘향산의 상악단(上岳壇), 계룡산의 중악단, 지리산의 하악단(下岳壇)이 그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악단과 하악산은 사라졌지만,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만큼 백두대간에서 비중 있는 포인트가 계룡산이다. 5000년 민족 정신사의 뿌리가 보존된 곳이 바로 계룡산 중악단이다. 계룡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변혁의 산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김해 모악산(母岳山)이다. 이들 산들은 모두 평지에 솟아 있는 산이다.

    박사규 문주가 계룡산에서 머무른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그는 갑사에 5년, 신원사에 2년 머물렀던 적이 있으며 여기에 ‘기천문 계룡본산’(鷄龍本山, 충남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 1구 191-1번지)을 잡은 것은 5년 전(단기 4540년 4월 24일)이다. 계룡산 일대에 머문 것은 12년째다. 마침 주말이라 전국에 흩어진 기천인들이 많이 모였다. 허름한 시골집을 개조해서 아담한 황토집 본산을 만들었다. 마당은 제자들로 붐빈다. 그의 호는 중용(中庸)이다. 호를 경전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 특이하여 물었다. “호가 중용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좀 과분한 이름이지만 그 이름 때문이라도 실천을 하려고 배수진을 친 셈이지요.”

    황토집 방안에 들어가니 조그마한 단군 영정이 놓여 있고 앉은뱅이 책상과 고목나무 밑둥을 다듬어 만든 널찍한 차상(茶床)이 있다. 그는 평범한 얼굴에 풍채가 우람하지도 않다. 키도 170㎝나 될까. 그러나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다. 올해 회갑을 맞은 그였지만 아직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고 얼굴은 동안이다. 몸 전체에서 기운이 넘쳐나고 있었다.

    박 문주는 매일 아침 6시부터 9시 반까지 산을 탄다. 연천봉, 문필봉, 관음봉의 10㎞ 코스를 돌면서 갖가지 무술동작을 연마한다.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에는 전국에서 찾아온 제자 30∼40명과 함께 연천봉 밑에서 수련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돈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지만, 계룡산을 찾아오는 제자들과 내방객들에게 삶의 활력을 선사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 연천봉 아래 수련장은 본산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다. 이날도 밝은 햇살이 비쳐드는 숲에서 행해지는 수련은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엄한 가르침과 신체적 고통을 정면 돌파함으로써 기(氣)를 일찍 터득하게 하는 정공법을 택하고 있었다. 확실한 축기로 아랫배가 다북 차면 반탄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수법(手法), 신법(身法), 보법(步法)으로 힘찬 기상과 저절로 행해지는 듯한 원운동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기천에 입문한 뒤 그는 대양진인의 혹독한 가르침을 이겨냈다. 그가 2대 문주에 오른 날이 1996년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현재 박문주를 거쳐 간 기천인은 줄잡아 1000여명에 이른다. 도장은 전국에 20여곳이 되며 대학교 동아리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는 “미래를 위한 종자(種子)를 얻기 위해 산중수련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5년 수련 경력의 오미숙씨(간호사)는 “40이 되자 몸에서 에너지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어요. 마침 서울 경복궁에서 행해진 기천(氣天) 공연을 보고 다음날 바로 이곳을 찾았습니다. 저에게는 기가 막힐 정도로 몸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내공이 쌓이고부터 ‘기천을 하는 것은 단순히 신체훈련이나 무술연마를 하는 것이 아니고 기천의 흐름 속에서 배달민족의 정신과 혈맥을 느껴야 한다’는 사부님의 말씀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기천의 역사가 40여년이 되었어도 현재 정인은 8명, 법인은 11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어렵다. 올해로 법인(法人) 승급을 앞두고 있는 조정현(曺定鉉)씨는 “민족의 얼을 찾기 위해 생사를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세계문화를 운운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전통산중 무예 계룡산의
기천문 본문 심사

 

 

문턱이 높지 않은 계룡산 기천문

남도를 걸으며 김포를 생각하다⑤
2010년 09월 08일 (수) 12:59:28 정현채 gimpon681@hanmail.net

운무를 피어내는 계룡산을 보며 대학에서 태권도를 함께했던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천문(氣天門) 박사규 문주님이 계시는 곳을 묻기 위해서다. 문주님은 10년 전에

갑사 근방에 계실 때 찾아뵌 적이 있었다. 지금은 신원사 근방에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대전에서 생활하는 후배님이 전화를 받는다. 계룡에 와서 문주님께

인사나 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기천문의 위치를 묻고 걸어서 간다고 이야기 했다.

걷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승용차로 가거나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천문 계룡 본산 표지석



갑사 가는 방향으로 20분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안부를 묻고 통화를 마쳤다.

하루 밤을 지내서 그런지 다리는 걷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이십분이면 가까운 거리니

부담이 없다. 갑사 가는 방향이 어느 곳인지 도로 표지판을 살폈다. 시간도 넉넉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10분을 걸어도 15분을 걸어도 안내를 받은 중간에 보여야 할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다. 가던 길을 되돌아 가게에 가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모퉁이만

돌아가면 나온다고 한다.

 

   

기천문 계룡본산



계룡산 자락에는 굿당을 하는 안내판도 많다. 모퉁이를 돌아서 저만치 도로변에는

할아버지 몇 분이 앉아 계신다. 아침부터 일을 하셨는지 소주와 막걸리를 드시고 계셨다.

길에서 인사를 하고 지나는 중에 물 한잔 먹고 가라고 부른다.

어른이 부르는데 지나치는 것도 예의가 아닌가 싶어 인사를 하고 잔을 받았다. 막걸리다.

빈속에 한잔을 하니 뱃속은 물파스를 바른 것 같이 쏴하다. 한잔 더 권하는 것을 사양하고

길을 나섰다.

시골 길을 걷다보면 마을 분들이 조금만 가면 된다는 이야기는 보통 30분을 넘는 경우가

있다. 그 분들은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거리가 가깝게 여길 것이고, 초행길인 사람은

멀게 느껴지기 때문 일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조금만 가면된다는 거리가 1시간을

넘어서고 있다.

 

   

길에서 만난 세월이 익은 옥수수

후배는 승용차로 가는 것으로 잘못 알았을 것이고, 할머니는 평생을 사신 곳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결국 가깝다는 생각은 포기하고 가다보면 나오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이

되어 걸었다.

명리학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린 집을 지나서 마을길로 올라가니 기천문 표지석이 보였다. 문주님이 아침 식사 중이라, 차 한 잔을 들고 계룡산을 보면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몇 분이 지난 후 문주님을 뵈었다. “기천은 문턱이 높지 않다는” 후배의 말대로 도인풍의

문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집 마당에 마련된 천막에 앉아 일상을 나누는 편안한 시간이다.

기천(氣天)의 육합(六合) 중에서 내가신장에 구원의 법이 있다는 말씀을 듣기도 하고

걷기를 하면서 배고픔을 모르고 걸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몸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생활에서의 수행이 필요함을 느꼈다. 김포에서도 기천문을 작년에 열어 김포시민에게

기회가 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문을 닫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걷다가 만나는 이러한 시간은 뜻이 깊다.

 

   

계룡산 신원사 방향 아침 길



이번에 걷기는 높은 산과 더위로 쉽지 않았다. 며칠간은 왜! 사서 고생하나 싶지만, 끝나는

시점에서는 더 걷고 싶은 욕심이 발현한다. 날씨와 다리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걷기에

몰입을 할 수 있었으나 중간 중간에 버스로 이동하여 대둔산 석천암과 계룡의 기천문을

방문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높으면 높은 데로, 낮으면 낮은 데로, 깊으면 깊은 데로, 얕으면 얕은 데로,

사람과 모든 생명체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 이 땅이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 그런 것은 없다.

계룡산도 산은 깊고 높아도 거부하는 것이 없듯이 내가 살아가는 김포에서도 서로가 뜻이

통(通)하고 편하게 만나는 생활의 길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길에서 길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여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