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사상과 신선도
배달사상은 세계적인 사상이다.
(신선도는 뭇종교의 뿌리)
1. 신선도의 유래
진정으로 우리민족은 원시적 무속신앙과 외래의 도·불·유(道·佛·儒) 밖에 없는 민족인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면서
고유철학도 고유종교도 없었단 말인가? 그러나 『주역』 풍지관에 따르면 "하늘의 신비한 법도를 보니, 사시(四時)의
운행이 어김없는지라, 이에 성인이 신비한 법도로서 종교를 세우니 천하가 복종하더라"하여 『주역』이 상고시대부터
천도(天道)에 바탕을 둔 종교가 있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천도에 바탕을 둔 심오한 『주역』이 있다는 것
자체가 태고시대부터 종교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또한 신도(神道)·신교(神敎)·신선도·신선교 등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신교가 전승되면서 삼한(고조선)에서는
천신교(天神敎), 부여에서는 대천교(代天敎), 고구려에서는 경천교(敬天敎), 신라에서는 숭천교(崇天敎), 발해에서는
진종교(眞倧敎), 요(遼)와 금(金)에서는 배천교(拜天敎), 만주에서는 주신교(主神敎) 등으로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
최남선도 "조선에는 예로부터 고유신앙이 있었고......이 민족교는 유교·불교에 앞서 있었으며, 유교·불교가 들어온 뒤에도
그대로 나란히 존재하였다"고 주장한다.
김교헌은 단군신교(檀君神敎)의 일파가 지나(支那 : 중국 - 이하 지나로 표기)로 전포하여 선교(仙敎)라 칭하였다 하고,
신채호 역시 우리민족의 삼신오제교(三神五帝敎)가 지나에 전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상·계율·의식·목적·내세관·숭배의 대상·경전 그리고 발생원리와 발생학적 배경 등 종교적 구성요건에 따라
체계적으로 주장하는 학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그것이 문제이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것 모두를 다루기가 너무나 번잡하여
중요한 내용만을 다루고 있다.
2. 환국시대의 신선도
신선도에 대한 근본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민족의 태고사를 간단히 일별해 보기로 한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태고사는 지금까지 연구의 범위에서 제외되어왔고, 사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 하고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는 것처럼 학문하는 풍토 역시 바뀌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삼성밀기(三聖密記)』를 전거로 들면서 우리민족의 태고사를 밝혀주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옛날 파내류산(波柰留山) 아래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었으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여리요 동서가 2만여리니 합하여 환국(桓國)이라 하고 나누면 12개 나라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北海)다" 하였다.
또한 『조대기』를 인용하여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 백성은 부유하고 또한 건실했다.
처음에 환인이 천산(天山)에 살면서 도(道)를 터득하여 오래 살고 몸을 닦아 병이 없었다. 하늘을 대신하여
사람을 교화하니 병란이 없고 사람들이 모두 일하기에 힘써 부지런하므로 스스로 굶거나 추위에 떠는 일이 없었다.
혁서환인·고시리환인·주우양환인·석제임환인·구을리환인·지위리환인에 이르렀는데 혹 단인이라고도 하며 7세를 전하고
역년은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지금부터 약 1만년에서 6천년 어간의 중앙 아시아에 환국이
있었음을 『환단고기』는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집단을 이루면 거기에는 반드시 교육이 따르게 마련이며 교육을 좀더 체계화시키고 구체화시킨 것이
종교교육이다.
『태백일사』를 보면 "삼신(三神)은 하늘을 생성하고(生天) 만물을 가꾸시며(造物) 환인은 사람을 가르쳐
의(義)를 세우니 이로부터 자손이 서로 의(義)와 교(敎)를 전하고, 현묘한 법도를 깨달아 광명이세(光明理世)하였다.
이에 천지인(天地人) 삼극(三極)은 대원일(大圓一)하는 서물(庶物)의 원의인 즉, 천하구환(天下九桓)의 예락이
곧 삼신고제(三神古祭)의 풍속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삼신의 뒤를 환국이라 하고,
환국은 환인천제(桓仁天帝)가 사는 나라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금부터 약 9천 1백여년 전, 아니면 6만 9천여년 전, 중앙 아시아의 천산을 중심으로
광활한 환국이 있었고, 그 나라에 일곱 분의 득도한 환인천제가 있었으며, 천지인 삼신일체에 바탕을 둔
종교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가 밝혀주고 있는 환국시대의 종교교육(신앙)을
간략히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환국에 삼신신앙(三神信仰)이 있었다. 삼신은 신선도의 숭배대상임과 동시에 발생원리이며, 사상으로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설명한다.
2) 환인천제는 신앙의 최정상에서 삼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고 무위이화(無爲而化)하였다.
무위이화란 종교적 자연주의 교육을 의미한다.
3) 환국에 오훈(五訓)이 있었다. 오훈은 ① 성신불위(誠信不僞), ② 경근불태(敬勤不怠), ③ 효순불위(孝順不違),
④ 염의불음(廉義不淫), ⑤ 겸화불투(謙和不鬪)이다.
4) 환국에 오사(五事)가 있었다. 오사는 ① 우가(牛加)의 주곡(主穀), ② 마가(馬加)의 주명(主命),
③ 구가(狗加)의 주형(主刑), ④ 저가(猪加)의 주병(主病), ⑤ 양가(羊加) 또는 계가(鷄加)의 주선악(主善惡)이다.
5) 매일 조석으로 일출일몰(日出日沒)시에 의식이 있었다.
6) 신선도의 경전으로서 천부경(天符經)이 있었다.
이상은 태고시대의 환국과 그 종교교육(신앙)에 대한 기록을 약술한 것이다. 이는 서구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원시시대의 신앙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를 부정하는 학자도 있을 것이며, 긍정하는 학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타당한 근거없이 기록 그대로 믿는다면 그것은 과학적 사고와 판단을 결여한
맹목적 신앙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무조건 부정하면 이 역시 서구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비과학적 비주체적
사고의 폐단이라 할 수 있다.
우주에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년중에 춘하추동(春夏秋冬)과 하루에도 조주석야(朝晝夕夜)가 있어 돌아가듯,
인류의 문화에도 생성소멸(生成消滅)이 있어 그것이 돌아간다는 자연법칙을 이해할 것이다. 이를 이해하면 현재나 과거나
마찬가지로 어느 한쪽에 고도로 발전된 문명사회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미개한 원시사회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개인에 천재가 있고 조숙한 사람이 있듯, 민족에도 천재적 민족이 있고 조숙한 민족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의 개념을 모든 민족에게 일률적으로 적용시킴은 부당한 억지라 아니할 수 없고, 환국사회에 어느 정도
개화된 문명이 있었다고 할 때, 이를 무조건 부정함은 논리상 모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라리체프가 『시베리아 구석기문화』에서 1975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시베리아 중부
노보시비로크산(Novosibirok山)및 아바칸(Abakan) 산맥의 계곡에서 3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말라이아뉘아 구석기 유물로 알려진 이 자료는 우리의 것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유물들 가운데는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도 있어서 종래의 서양학자들이 설정하여 놓은 원시인의 개념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특이한 것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아무런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바칸 산맥은 중앙 아시아의 바이칼 호수와 매우 가까운 곳으로 환인왕조가 7대 3301년 간 통치할 때의 중심지로
알려져왔는데, 아바칸 산맥의 계곡에서 발견된 유물이 우리의 것과 매우 유사하고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때, 그 때보다도 몇만년 이후인 환국시대의 문화는 상당히 더 발전됐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환인의 환국시대가 비록 태고시대라 하더라도 선사시대(원시시대)라 할 수 없고 그 시대의 종교교육(신앙)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다음은 배달국과 그 종교교육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기에 의하면 환웅천황은 환인의 서자로서, 하늘에서
풍백·우사·운사 등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와 곡(穀)·명(命)·병(病)·형(刑)·선악(善惡) 등
인간의 3백 60여사를 주관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신화같이 풀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민족의 상대비사(上代秘史)이며, 신선도의 비기(秘記)로서 환웅천황이 중앙 아시아의 천산(天山)에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으로 이동하여 득도하고 배달국을 세워 홍익인간 재세이화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시역대기』에 의하면 배달은 환웅이 정한 호니 그가 도읍한 곳은 신시요, 뒤에 청구국(靑邱國)으로 옮겨 18세를 전하고
역년은 1565년이었다 하고, 이어서 18세 환웅의 명호와 재위기간 및 생존한 년세를 하나 하나 모두 밝혀주고 있다.
또한 『환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환국의 말에 안파견(安巴堅)이 삼위산과 태백산을 내려다 보고 모두가 홍익인간할 만하므로 누구를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가첨이 말하기를 서자부(庶子部)에 환웅(桓雄)이 있는데 용기에 겸하여 어질고 지혜가 있습니다.
일찍이 홍익인간으로 세상을 개혁할 뜻이 있으므로 태백산에 보내어 다스리게 함이 좋을 듯 합니다 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삼종(三種)을 주고 조칙(詔勅)하여 이르기를 '이제 군(君)은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교도 3천을 이끌고 가서 천도를 깨치어 종교를 세우고 재세이화하여 만세홍범이 되게 하라'하였다.‥‥
이에 환웅이 3천의 교도를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오니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황(桓雄天皇)이라 하였다.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하고
무릇 인간의 3백 60여사를 주관하여 재세이화하고 홍익인간 하였다.
환웅천황이 천도(天道)를 크게 깨치어 교화를 베풀 때, 천경(天經)을 연(演)하고 신고(神誥)를 강(講)하여
크게 무리를 가르쳤다.‥‥때에 구환(九桓)이 모두 하나같이 삼신을 조상으로 하였다. 소도를 주관하고
관경을 주관하여 무리와 의론하여 하나로 화백(和白)하고 아울러 지(智)와 생(生)을 모두 닦아
천궁(天宮)에서 살았다".
위의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환웅천황의 원주지는 중앙아시아 천산(天山) 환국(桓國) 서자부(庶子部)였다.1)
2) 환웅천황이 태백산에 이르러 "천도를 깨치어 삼신으로 종교를 세우고(開天以三神立敎)" 권선징악하는 법을 세웠다.
3) 환웅천황이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설하였다.
4) 환웅천황이 소도를 주관하고 무리와 의론하여 하나로 화백하였다.
5) 환웅천황이 주곡·주명·주형·주병·주선악 등 5사와 그밖에 3백 60여사를 주관하여 홍익인간 재세이화하였다.
이를 종합해 말하면 환웅천황이 백두산에서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를 크게 깨치어
도교·불교·유교 삼교일체의 신선도를 설파하고 홍익인간 재세이화하였다는 것이다.
즉 세계인류가 원시의 미몽에서 깨기 전, 우리민족은 합리적인 종교를 창설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래서 이것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민족은
그 기념행사를 해마다 치르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단군세기에 의하면 단군임검이 개천(開天) 1565년 음력 10월 3일에 이르러 백두산 단목 밑에서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구환(九桓)의 추대를 받아 조선국을 세웠다고 하였다.
금년은 단기 4330년이다. 따라서 환웅천황이
백두산 천지 신단수 밑에서 개천입교(開天立敎:천도를 깨치어 종교를 세우다)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5894년 전, 음력 10월 3일인 것이다. 즉, 4330+1565-1=5894년 음력 10월 3일인 것이다.
또한 단군임검이 조선국을 건국한 때는 지금부터 4329년 전 음력 10월 3일이 된다.
따라서 우리민족이 해마다 치르는 개천절 행사는
첫째, 환웅천황이 백두산 천지 신단수 밑에서 천도를 크게 깨치어(開天) 지금부터 5894년 전
음력 10월 3일에 신선도를 베푼데 대한 기념행사이며.
둘째, 단군임검이 지금부터 4329년 전 음력 10월 3일, 백두산 신시 단목하에서 조선국을 건국한 데에 대한 기념행사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8월 15일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우리민족이 해방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했다는 두 가지 뜻을
지니는 것과 같은 격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음력 10월 3일의 개천절 행사는
민족혼의 탄생과 국가의 탄생이라는 두 가지의 뜻을 기념하는 행사로써 최대 최고의 명절이며 기념행사인 것이다.
그래서 음력 10월은 년중, 상달 (上달 ; 최고의 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천절이야 말로 환웅천황이 개천입교(開天立敎)하여 신선도를 설파했다는 살아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민족혼을 반은 찾은 기분이다. 민족적 주체의식도 되살아나고, 칠흑같은 광야에 먼동이 떠오르듯
민족의 전도가 밝아오는 기분이다.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
다음은 단군조선 시대의 종교교육(신앙)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초대 단군임검으로부터 시작하여
단군 고열가제까지 47세 2096년 간 계속된다. 『신단실기』 교화원류편을 보면 단군임검(檀君壬儉)도 신인(神人)으로서
풍백·우사·운사 등 신관을 거느리고, 종교를 세워 주곡·주병·주형·주선악 및 의복·음식·궁실·편발(編髮) 등
인간의 366사로서 흑수(黑水)에서 한남(漢南)에 이르는 구족(九族)을 다스렸다 하고, 『단군세기』에는
단군임검이 삼신에게 제사하고 조선국을 세운 후 신시의 옛 규범을 부활하여 천범팔조(天範八條)를 설했다고 했다.
제11세 단군 도해제조를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해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고 매우 장려하였다.
천제 환웅유상(桓雄遺像)을 봉안했는데 두상에는 태양처럼 광채가 섬섬하였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단수 아래 환화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인(天符印)을 가지고, 대원일(大圓一)의 그림을 누전에 걸었으니 이를 일러 거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齋戒)하시고 이레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四海)를 움직이는 듯 했다.‥‥
3월에 남산에서 삼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술과 선물을 바치고 나서 치사를 한 후에 술을 따랐다.
이 날밤 술을 특사하여 국인과 더불어 환음하고, 백희(百戱)를 보았다. 누전에 올라 경(經)을 논(論)하고
고(誥)를 연(演)하였다. 오가(五加)에게 이르기를 이후부터는 죽이는 것을 금하고 방생하며
옥을 풀어 밥을 먹이고 사형을 없애라고 하였다. 내외의 사람들이 듣고 기뻐하였다."
이상을 보면 단군조선 시대의 신앙은 오늘날 불교사찰의 본당인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고 불교행사를 치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대웅전은 본디 초대 환웅을 모시던 곳). 그러므로 단군조선 시대는 신선도가 극히 융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청학집(靑鶴集)』을 보면
환인은 동방선파(東方仙派)의 조종(祖宗)으로서 그 신선사상이 환웅천황과 단군임검을 거쳐 문박씨(文朴氏)를
매개로 신라의 영랑(永郞)에게 전승되고 있는데,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를 보면 환인의 신선사상이 문박씨를 거쳐
을밀(乙密)·영랑(永郞)·안유(晏留)·보덕(普德)·성여(聖女) 등 고구려·백제·신라의 선인(仙人)들에게 전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선도가 신라에 와서도 대행하여 고려 의종 23년 3월 무자일에 내린 신령(新令)을 보면 "선풍(仙風)을 숭상하라.
옛날 신라에 선풍이 대행하여 그로 말미암아 용천(龍天:임금)이 환열하고 민물(民物:백성)이 안녕하였다"고 했는가 하면,
신라의 사선(四仙)이 놀던 유적으로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통천의 사선봉(四仙峰)과 총석정(叢石亭),
간성의 선유담(仙遊潭)과 영랑호(永郞湖), 금강산의 영랑봉(永郞峰), 장연의 아랑포(阿郞浦)와 강릉의 한송정(寒松亭)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신선사상이 대행하였고, 고려 때에도 왕검교(王儉敎)니 재가승(在家僧)이니 하여
다소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원나라 몽고군이 약 백년에 걸쳐 고려를 지배할 때, 그 탄압에 못이겨
신선도는 완전히 불교 속으로 은닉하게 되었다.
또한 근세조선 때에는 송나라의 주자학 일변도 정책으로 다른 사상을 거론하면 그러한 사람을 사문난적(斯門亂賊)이라
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하였고, 일제시대 또한 식민정책에 의해 고유사상을 근거없는 미신 또는 사이비종교로 취급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신선도는 우리민족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져 "삼신상제·삼신제왕·삼신할머니·삼신풀이"니 하는 이름으로
겨우 그 뿌리만이 민속에 남아있을 정도이고, 그 사상이나 계율이 무엇인지 오리무중이다.
따라서 신선도의 발생원리가 천도(天道)라 하나, 원시시대에 천도란 있을 수 있느냐 하고 무시하게 되며, 그 사상이나
계율의 존재도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신선도의 모든 것을 외래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그에 대한 기록이나
서적을 왜곡하거나 위서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 다물(多勿)-이시명(李時明) - 문학서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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