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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楞嚴經) 제8권, 해설 / 김두재

Demian-(無碍) 2012. 11. 18. 17:19


능엄경(楞嚴經) 제8권, 해설.


            

       -발행처; 민족사 / 譯 - 김두재

 

 

점진적으로 닦아 가는 세 가지 법

 

“아난아, 이러한 중생 하나하나의 종류 가운데 

각각 열두 가지 뒤바뀜을 갖춘 것이 

마치 눈을 비비면 허공에 어지러이 헛꽃이 생기는 것과 같아서 

오묘하고 원만하고 참되고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뒤바뀌어서 

이와 같이 허망하고 어지러운 생각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느니라.

 

네가 지금, 부처님의 삼마지를 닦아 증득하려면 

그 근본 원인이 되는 원래의 어지러운 생각에 

세 가지 점진적 순서를 세워 놓아야, 

비로소 제거하여 없앨 수 있으리니, 

이는 마치 깨끗한 그릇에 담겨 있는 

독한 꿀을 제거하고, 끓인 물에 재와 향을 섞어 

그 그릇을 깨끗이 씻어낸 다음에야 

감로를 담을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무엇을 세 가지 점진적인 순서라고 하는가?

첫째는 

닦고 익힘이니 도 닦는 데 

방해되는 근본을 제거하는 것이요,

둘째는 

참된 수행이니, 

그 정성(正性)<탐, 진, 치.- 삼독(三毒)을 말함>을 

없애는 것이요,

셋째는 

더욱 정진하여 나아가는 것이니 

그 현재의 업(業)을 어기고, 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것을 도와주는 원인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이 세계에 열두 가지 종류의 중생이 

스스로 완전할 수가 없어서 

네 가지 식사방법에 의하여 살아가나니, 

그것은 이른바 

씹어 먹는 것과 

접촉으로 먹는 것과 

생각으로 먹는 것과 

의식으로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먹는 것을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하신 것이다.

 

아난아, 일체중생은 

단 것을 먹기 때문에 살고 

독한 것을 먹기 때문에 죽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삼마지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세상의 

다섯 가지 냄새나는 채소를 

끊어야 하느니라.

 

저 다섯 가지 매운 채소는 

익혀 먹으면, 음란한 마음을 발생시키고 

날 것으로 먹으면, 성내는 마음이 더해지나니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매운 채소를 먹는 사람은 

비록 십이부(十二部) 경전을 설법한다고 하더라도 

시방의 하늘이나 신선들이 그 냄새를 싫어하여 

모두가 멀리 떠날 것이요, 

모든 아귀들은 그가 밥 먹을 적에 

그 입술을 핥으므로, 

항상 귀신과 함께 있게 되어 

복덕이 날로 사라져서 

영원히 이익이 없을 것이니라.

 

또 매운 채소를 먹는 사람은 

삼마지를 닦더라도 보살과 하늘과 신선, 

그리고 시방의 선신들이 와서 

수호하지 아니하므로 

힘센 마구니의 왕이 그 틈을 타서 

부처님의 몸으로 가장하고 나타나서는 

설법을 하되 ,

금하는 계율을 그르다고 비방하고 

음행, 성냄, 어리석음을 찬양하리니, 

죽어서는 마왕의 권속이 되었다가 

마구니의 복을 다 받게 되면,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아난아, 보리를 닦는 이는 

이 다섯 가지 매운 채소를 

영원히 끊어야 하나니 

이것은 수행을 증진해 나아가는 

첫 번째 차례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성(正性)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이 중생들이 

"삼마지"에 들어가려면 

먼저, 깨끗한 계율을 엄하게 지켜서 

음욕의 마음을 영원히 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으며, 

불로써, 음식을 깨끗이 하여 

날 것의 기운을 먹지 말아야 한다.


삼마지
삼마지 'samadhi'의 음사. 

삼마제(三摩帝) 삼마제(三摩提)로도 음역되며, 

의역으로는 등지 외에 정(定), 정정(正定), 정의(定義), 

조직정(調直定), 정심행처(正心行處) 등이 있다. 

선정의 이름의 하나로서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 

삼마지: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모아 생각하는 

일심 불란(一心不亂)의 경지(境地). 

삼마제(三摩提). 삼매(三昧). 삼매경(三昧境). 


 

아난아, 저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음란한 마음과 

살생할 마음을 끊지 않고서는 

삼계에서 벗어나는 그러한 이치가 없나니, 

마땅히 음욕을 독사보다 더 무섭게 여기거나 

원수와 도적을 보는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니라.

 

먼저 성문의 네 가지 또는 

여덟 가지 내침을 당하는 계율을 잘 지켜서 

몸을 가다듬어 흔들리지 말고 

그런 다음에 보살의 깨끗한 율의(律儀)를 행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느니라.

 

금하는 계율을 성취하면, 

이 세상에서 서로 낳고 서로 죽이는 일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요, 

훔치는 것과 겁탈을 행하지 아니하여 

서로 빚을 지는 일이 없으면, 

역시 세상에서 갚아야 할 묵은 빚도 없어지리라.

 

이렇게 깨끗한 사람이 

삼마지를 닦으면, 

부모가 낳아 준 육신에 

반드시 천안(天眼)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연히 시방세계를 볼 수 있게 되어 

부처님을 뵈옵고 법문을 들으며, 

직접, 성인의 뜻을 받들어서 

큰 신통을 얻어 시방세계에 노닐면서 

숙명(宿命)이 밝아지고, 

어렵고 험함이 없어지리니 

이것이 수행을 증진해 나아가는 

두 번째 차례라고 하느니라.

 

어떤 것을 현재의 업장이라고 하는가 하면, 

아난아, 이렇게 깨끗하게 

금하는 계율을 지키는 사람이 

마음에 탐욕과 음욕이 없어지면, 

밖의 여섯 가지 대상인 물질에 

대다수가 흘러 빠지지 않게 되리니, 

흘러 빠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근원을 돌려 스스로 돌아가게 되느니라.

 

여섯 가지 대상인 물질을 반연하지 않으면 

여섯 개의 감각 기관은 상대할 것이 없어져서 

흘러감을 되돌려 전일하게 하며 

여섯 가지 작용이 행해지지 아니하며 

시방의 국토가 밝고 깨끗함이 

마치, 유리 속에 밝은 달을 달아놓은 듯 하여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오묘하고 원만하고 

평등하여 크게 편안함을 얻게 될 것이요, 

모든 부처님의 긴밀하고 원만하며 

깨끗하고 오묘함이 다 그 속에 나타나서 

이 사람은 즉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느니라.


* 무생법인(無生法忍)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실상법을 잘 알고, 

  그 진리에 머물러서 흔들리지 않는 지혜.

 

이로부터 점점 닦아서 가는 곳마다 

행동을 일으켜서, 성인의 위치에 

편안히 서게 될 것이니 

이것이 수행을 증진해 나아가는 

세 번째 차례이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욕애가 말라버려서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서로 만나지 않으면, 

앞에 나타나는 남은 바탕이 

다시는 계속하여 생기지 않을 것이요, 

집착하는 마음이 비고 밝아져서 

순수한 지혜만 남게 될 것이며, 

지혜로운 성품이 밝고 원만해져서 

시방세계가 환하게 통하며 

그 지혜가 마른 것을 ‘간혜지(乾慧地)’라고 하느니라.


하고자 하는 욕심과 사랑이 마르고, 

감각기관(六根)과 마주 대한 그 대상(境界)이 끊어지면, 

현전現前의 남은 번뇌가 다시는 상속되지 아니하고(我空

집착했던 마음이 비고(法空) 밝아져서 순수한 지혜만 남게 될 것이다. 

이와같이 지혜의 성품이 밝고 원만해져서 시방세계에 빛나되, 

마른 지혜가 있으리니, 이것을 간혜지(乾慧地)라 한다.

 

욕애의 습기가 처음으로 말라서 

부처님의 법류수(法流水)와 접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마음으로 가운데로 흘러 들어가면 

오묘하고 원만함이 열려 퍼지게 될 것이다.

참되고 오묘하고 원만함을 따라서 

거듭 참되고 오묘함이 발생하며 

오묘한 믿음이, 항상 머물러서 

부질없는 모든 생각이 남김없이 없어지고 

중도가 순진(純眞)하게 되는 것을 

‘신심주(信心住)’라고 하느니라.

 

참된 믿음이 밝고 또렷해서 

일체가 원만하게 통하고 오음과 십이처와 십팔계 

이 세 가지가 가로막거나 방해하지 못하며 

이와 같이 과거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겁을 지내는 동안, 몸을 버리고 

몸을 받던 모든 습기가 모두 앞에 나타나게 되면, 

이 선남자가 그것을 다 기억해 생각해서 

잊어버림이 없는 것을 

‘염심주(念心住)’라고 하느니라.

 

오묘하고 원만함이 순수하고 진실하여 

참다운 정기가 조화를 발하여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의 습기가 

하나의 정밀하고 밝음으로 통해지거든 

오직 정밀하고 밝음으로써 참되고 

깨끗한 곳에 나아가는 것을

 ‘정진심(精進心)’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의 정기가 앞에 나타나서 

순수한 지혜로 되는 것을 

‘혜심주(慧心住)’라고 하느니라.

지혜의 밝음을 잡아가져서 

두루두루 맑고 고요하여 

그 고요하고 오묘한 것이 

항상 섞여 있는 것을 

‘정심주(定心住)’라고 하느니라.

 

선정 속에 빛이 밝음을 발하여 

밝은 성품이 깊이 들어가 

오직,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나지 아니함을 

‘불퇴심(不退心)’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으로 나아감이 편안해서 

보호하여 지키고 잃지 않아 

시방 부처님의 기분과 서로 접촉함을 

‘호법심(護法心)’이라고 하느니라.

 

밝은 깨달음을 보호하고 지켜서 

능히 오묘한 힘으로써,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돌이켜 

부처를 향해 편안히 머무름이 

마치 두 개의 거울이 

빛을 서로 마주하는 것과 같아서 

그 가운데 오묘한 그림자가 

거듭거듭 서로 들어가는 것을 

‘회향심(廻向心)’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의 빛이 가만히 돌아와서 

부처님의 가장 오묘하고 깨끗함을 얻어서 

작용이 없는 경지에 편안히 머물러서 

잃음이 없는 것을 

‘계심주(戒心住)’라고 하느니라.


계에 머무름이 자재하여 시방에 노닐면서 

가는 곳마다 원하는 대로 됨을 

‘원심주(願心住)’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진실한 방편으로 

열 가지 마음을 발하고, 

마음의 정기가 빛을 발해서 

열 가지 작용을 거치며 하나의 마음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을 

‘발심주(發心住)’라고 하느니라.


마음속에서 밝음을 발함이 

마치 맑은 유리 속에 

정밀한 금을 달아놓은 듯하거든 

앞의 오묘한 마음으로 이를 밟아 

지반(地盤)을 이루는 것을 

‘치지주(治地住)’라고 하느니라.

 

심지(心地)에 들어감과 아는 것이 

모두 또렷해지고 밝음을 얻어 

시방에 노닐되, 

머물거나 걸림이 없게 된 것을 

‘수행주(修行住)’라고 하느니라.


행하는 것이 부처님과 같아서 

부처님의 기분을 받음이 

마치 중음신이 스스로 부모를 구할 적에 

음계의 소식이 가만히 통하는 듯해서 

부처님의 종성(種性)으로 들어감을

 ‘생귀주(生貴住)’라고 하느니라.

 

이미, 도태(道胎)에 들어서 

친히, 부처님의 아들을 봉양함이 

마치 세상의 부녀자가 이미 아이를 배서 

사람의 모양으로서 결함이 없는 듯한 것을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라고 하느니라.


용모가 부처님과 같으며 

마음의 형상도 그와 같은 것을 

‘정심주(正心住)’라고 하느니라.

몸과 마음이 합해져서 

날로 점점 자라나는 것을 

‘불퇴주(不退住)’라고 하느니라.

 

십신(十身)의 신령한 모양이 

일시에 구족한 것을 

‘동진주(童眞住)’라고 하느니라.


형체가 이루어지고 태에서 벗어나서 

친히 불자가 된 것을 

‘법왕자주(法王子住)’라고 하느니라.


성인임을 표시함이 

마치, 국왕이 모든 나라의 일을 

태자에게 나누어 맡기며 

저 찰리왕이 세자가 장성하면 

이마에 물을 붓는 의식을 진행하는 것과 같은 것을 

‘관정주(灌頂住)’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부처님의 아들이 되고 나서 

부처님의 한량없이 오묘한 덕을 

완전하게 갖추어서 

시방에 순하게 따르는 것을 

‘환희행(歡喜行)’이라고 하느니라.


능히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을 

‘요익행(饒益行)’이라고 하느니라.


자신도 깨닫고 남도 개닫게 하여 

거스르고 막는 것이 없음을 증득한 것을 

‘성냄과 원한이 없는 행,

-무진한행(無瞋恨行)이라고 하느니라.


갖가지 중생들이 생겨남에 따라서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삼세에 평등하며 

시방에 통달함을 ‘다함이 없는 행,

-무진행(無盡行)’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것이 화합하여 동일해져서 

갖가지 법문에 차오(差誤)가 없게 되는 것을

 ‘어리석고 어지러움을 벗어난 행위,

-이치난행(離癡亂行)’이라고 하느니라.

 

곧 같아진 가운데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나타내며 

하나하나 다른 형상에서 각각 보는 것이 같은 것을

 ‘잘 나타내는 행위[善現行]’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시방의 허공에 이르기까지 

작은 먼지까지도 만족하며, 

하나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나타내어 

티끌을 나타내고 경계를 나타내어도 

서로 머물거나 걸림이 없는 것을 

‘집착이 없는 행위,

-무착행(無着行)’이라고 하느니라.

 

가지가지 앞에 나타나는 것이 

모두 제일의 바라밀다인 것을 

‘존중행(尊重行)’이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원융해서 

능히 시방 모든 부처님의 법칙을 성취한 것을 

‘선법행(善法行)’이라고 하느니라.

하나하나 모든 것이 깨끗하고 번뇌가 없어진지라 

한결같이 참되고 작위가 없어서 

성품 본래 그대로인 것을 

‘진실행(眞實行)’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신통력을 만족하게 갖추어서 

부처님의 일을 이루고 나서는 순결하게 정진해서 

남아 있던 모든 시름이 멀어지거든 

마땅히 중생을 제도하되 제도한다는 상(相)을 없애고 

작위가 없는 마음으로 돌아가서 

열반의 길로 향하는 것을 

‘일체중생을 구호하되 

중생상을 여윈 회향,

-구호일체중생이중생회향

(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무너뜨려야 할 것은 무너뜨리고 

여의어야 할 것은 여의는 것을 

‘무너뜨릴 것이 없는 회향[不壞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본래 깨달음이 맑고 고요해서 

그 깨달음이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음을 

‘모든 부처님과 같은 회향,

-등일체불회향(等一切佛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정밀하고 참된 것이 밝음을 발하여 

지위가 부처님의 지위와 같아짐을

 ‘모든 곳에 이르는 회향,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세계와 부처님이 서로 들어가되 

걸림이 없는 것을 

‘다함이 없는 공덕장회향,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의 지위와 같은 데서 

그 지위 가운데 각각 깨끗한 원인이 생기고 

그 원인에 의해 빛을 발휘하여 

열반의 도를 취하는 것을 

‘평등한 선근을 순종하여 따르는 회향

-수순평등선근회향(隨順平等善根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참된 선근이 이미 이루어지면, 

시방의 중생들이 모두 나의 본성인지라 

그 성품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중생을 잃지 아니함을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것을 순종하여 따르는 회향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

(隨順等觀一切衆生廻向)’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법에 나아가며, 모든 모양을 여의나니 

나아가고 여의는 두 가지에 집착함이 없는 것을 

‘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참되고 여여한 것을 증득해서 

시방에 걸림이 없는 것을 

‘얽매임이 없이 해탈한 회향,

-무박해탈회향(無縛解脫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성품의 덕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법계에 한량이 없어진 것을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廻向)’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이렇게 깨끗한 마흔 한 가지 마음을 다 하고 난 다음에 

네 가지 오묘하고 원만한 가행(加行)을 이루느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 나갈듯 하면서도 

나가지 못함이, 마치 불을 피울 적에 

그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은 것을 

‘난지(煖地)’라고 하느니라.

 

또 자기의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밟아 오신 것을 이루어서 

의지한 듯 하면서도 의지하지 않음이 

마치 높은 산을 오를 적에 

몸은 허공에 들어갔으나, 

아래는 약간 걸림이 있는 것과 같음을 

‘정지(頂地)’라고 하느니라.

 

마음과 부처 그 두 가지가 같아서 

중도를 증득한 것이 

마치 모든 일에 잘 참는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지 않고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는 것과 같음을

 ‘인지(忍地)’라고 하느니라.

헤아림이 없어져서 

미각(迷覺)과 중도 

그 둘 다 지목할 수 없음을 

‘세제일지(世第一地)’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가장 높은 보리에 대해 잘 통달하여 

그 깨달음이 부처님과 통하여 

부처님의 경계를 다한 것을

 ‘환희지(歡喜地)’라고 하느니라.


다른 성품이 같은 데로 들어가고 

같은 성품도 없어진 것을 

‘이구지(離垢地)’라고 하느니라.


맑음이 지극하여 밝음이 생김을

‘발광지(發光地)’라고 하느니라.

 

밝음이 극진하여 깨달음이 원만함을

 ‘염혜지(焰慧地)’라고 하느니라.


일체의 같고 다름이 지극하지 못한 것을 

‘난승지(難勝地)’라고 하느니라.


작위가 없는 진여가 되어서 

성품이 맑아지고 밝게 드러나는 것을 

‘현전지(現前地)’라고 하느니라.


진여의 끝까지를 다한 것을 

‘원행지(遠行地)’라고 하느니라.


한결같은 진여의 마음뿐인 것을 

‘부동지(不動地)’라고 하느니라.


진여의 작용을 발하는 것을 

‘선혜지(善慧地)’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저 모든 보살들이 

이로부터 이전에 닦고 익히는 공부를 마치고서 

그 공덕이 원만하여졌으므로 

그 경지를 지목하여 

‘닦아 익히는 지위,

-수습위(修習位)’라고 하느니라.


자비의 그늘과 오묘한 구름이 

열반의 바다를 덮은 것을 

‘법운지(法雲地)’라고 하느니라.


부처님은 흐름을 거스르지만 

이러한 보살은 순하게 따라 이르러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 어울리는 것을 

‘등각(等覺)’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간혜의 마음에서부터 등각에 이르러야만 

그 깨달음이 비로소 금강심 가운데에 

첫 간혜지를 얻게 되느니라.


이렇게 거듭거듭 열두 가지를 

홑으로 겹으로 해야만, 

바야흐로, 묘각(妙覺)을 다하여 

최상의 도를 이루느니라.


이 여러 가지 지위에 모두 금강으로 

허깨비와 같은 열 가지 깊은 비유를 관찰하여 

사마타(奢摩他) 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비바사나"로써 

깨끗하게 닦아 증득해서 점차 깊이 들어가야 하느니라.


*비파사나(위빠사나)

불교수행법중 현상을 관찰하는 명상수행법을 이른다. 

비파사나(위빠사나)는 의역하여 

관(觀) 관찰(觀察) 능견(能見) 정견(正見)이라고 풀수 있다. 

쉽게 말해 관수행법(觀修行法)이다. 


*비파사나(毘婆舍那)는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치신 수행법이다. 

비파사나 이전에는 사마타(奢摩他)수행법이 있었다. 

사마타는 하나의 대상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내적 황홀이나 평화와 고요를 체험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기존의 사마타로는 궁극의 경지에 오를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수행법이 "비파사나"인 것이다.

천태종에서는 마음의 본성을 관찰하는 것이라 하여 관심(觀心)이라 하였다.

법상종과 화엄종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 하여 관도(觀道)라고 했다. 

팔리어 경전을 믿는 동남아시아 불교에서는 비파사나를 대단히 중시한다. 

우리나라의 사념처관(四念處觀)도 비파사나의 일종으로 분류한다. 

또한 신라의 고승-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닦았다는 

고골관(枯骨觀)이나 부정관(不淨觀)도 비파사나라고 보아야 한다.

 

아난아, 이것은 

모두가 세 가지 증진법으로 수행하였으므로 

쉰다섯 개 지위의 참된 보리의 길을 

훌륭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이렇게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관찰이라 하고 

이와 다르게 관찰하는 것은 

삿된 관찰이라고 하느니라.”

 

이 경의 이름에 대하여...

 

그때 "문수사리법왕자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경전의 이름을 무엇이라 해야 하며 

저와 중생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전의 이름은

《대불정실 달다반달라 무상보인 시방여래 청정해안

(大佛頂悉 怛多般怛羅  無上寶印 十方如來 淸淨海眼)》이라고 하며, 

또 다른 이름은 친척과 또는 그와 인연 있는 사람을 구호하여 

아난과 이 모임 가운데 있는 성비구니를 제도하여 

변지해(遍知海)에 들게 하는 것이며, 또 다른 이름은

《여래밀인수증요의(如來密因修證了義)》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이름은 《대방광묘련화왕 시방불모다라니주

(大方廣妙蓮華王 十方佛母陀羅尼呪)》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이름은 《관정장구제보살 만행수능엄

(灌頂章句諸菩薩 萬行首楞嚴)》이라고 하니, 

너는 마땅히 받들어 지녀야 한다.”

 

 

일곱 가지 세계

 

그때 세존께서 이렇게 경전의 이름을 말씀하시니 

그 즉시 아난과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께서 열어 보이신 

밀인반달라(密印般怛羅)의 이치를 들었사오며, 

아울러 이 경의 이치에 걸맞은 이름을 듣고 

선나(禪那)로 성인의 지위를 닦아 가는데 

차츰 더 해가야 할 오묘한 이치를 확실하게 깨달아서 

생각이 비어 엉기게 되었으며 

삼계에서 마음을 닦는 여섯 단계의 미세한 번뇌를 끊게 되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고 합장하여 

공경하며 부처님께 아뢰었다.

“큰 위엄과 덕을 갖추신 세존이시여, 

자비하신 말씀이 막힘이 없어서 

중생들의 미세하게 잠긴 의혹을 잘 열어 보이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오늘날 몸과 마음이 쾌활해져서 

크게 요익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 오묘하고 밝고 참되고 

깨끗한 밝은 마음이 본래 두루두루 원만한 것이라면 

이와 같이 큰 땅덩이의 풀, 

나무와 꿈틀거리는 중생[含靈]들이 

본래 근본인 진여이므로 

이는 곧 여래께서 부처가 된 참다운 실체로서 

부처님의 본체가 진실하거늘, 어째서 또다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신선, 천상" 등이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이 일곱 가지 세계는 본래 저절로 생긴 것입니까? 

아니면 중생의 허망한 습기로 생긴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보련향(寶蓮香)비구니 같은 이는 

보살계를 지키다가 사사로이 음행을 저지르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음란한 짓을 하는 것은 

살생도 아니고 훔치는 것도 아니므로 

업보가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을 하자마자, 여인의 음근에서 

맹렬한 불길이 일어나더니, 

그 다음에 사지의 마디마디 맹렬한 불이 붙었으며 

마침내는 무간지옥에 떨어졌고, 

유리대왕과 선성(善星)비구에 대해서도 

유리는 구담(瞿曇)족성을 죽여 없앴고, 

선성은 ‘모든 법은 없는 것’이라고 망령되게 말하다가 

산 몸뚱이 그대로 모두 아비지옥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지옥은 정해진 곳이 있습니까?

아니면, 자연히 저마다 업보를 일으켜 

각각 스스로 받는 것입니까?

바라옵건대 큰 자비를 베푸시어 

어리석고 어두운 자들을 일깨워 주셔서 

계율을 지키는 중생들로 하여금 

결정한 이치를 듣자옵고, 기뻐서 이마로 받들어 

조심하고 깨끗이 지켜 범함이 없게 하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시원하구나. 그 물음이여,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삿된 소견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 

너는 지금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해 말해 주겠다.

아난아, 모든 중생이 

사실은 본래 참되고 깨끗했건만 

 소견으로 인하여 허망한 습기가 생기나니 

그것으로 인하여 내분과 외분으로 갈라지느니라.

 

아난아, 내분이라고 함은 

곧 중생의 분내(分內)로서 

모든 애욕의 생각으로 인하여, 

허망한 정이 일어나나니 

그 정이 쌓여서 그치지 않으면 

능히 애욕의 물이 생긴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마음에 좋은 음식을 생각하면 

입 속에서 침이 생기고, 

마음으로 앞에 만났던 사람을 생각하여 

가엾게 여기거나, 원한을 품거나 하면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며, 

재물과 보배를 탐내거나 구하면 

마음으로 침을 흘려서, 온몸이 빛나고 윤택해지며 

마음에 집착하여 음욕을 행하면 

남자와 여자의 음근에 자연히 액체가 흐르느니라.

 

아난아, 모든 애욕이 비록 서로 다르지만 

흐르고 맺힘은 같으니, 

윤택하고 촉촉한 습기는 올라가지 못하므로 

자연히 아래로 떨어지게 되나니 

이것을 이름 하여 ‘내분’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외분(外分)이라 함은 

곧 중생의 분외(分外)이니 

모두가 목마르게 우러름으로 인하여 

허망한 생각이 발생하게 된다.

 

그 허망한 생각이 쌓여서 그치지 아니하면 

능히 수승한 기운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중생이 마음에 금하는 계율을 가지면 

온몸이 가볍고 맑아지며, 

마음에 주문이나 보인[印]을 가지면 

돌아봄이 웅장하고 굳세어지고 

마음이 하늘에 나고자 하면 

꿈속에서나 상상 속에서 늘 날아다니고 

마음 속에 부처님 나라에 살고자 하면 

성인의 경지가 아득히 나타나며 

선지식을 잘 섬기면 

스스로 몸과 목숨을 가벼이 하느니라.

 

아난아, 모든 생각이 비록 다르지만 

가볍게 들리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날아 움직이는 것은 잠기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 뛰어넘게 되나니 

이것을 이름 하여 ‘외분’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모든 세간에 나고 죽는 것이 

서로 계속되어서 나는 것은 

습기에 순종함을 따르고 

죽음은 변해 흐름을 따르나니 

목숨이 끊어지려고 하면서 

아직 따뜻한 감촉이 남아 있을 때에 

일생의 선과 악이 한꺼번에 나타나서 

죽음을 거역하고 삶을 따르는 

두 가지 습기가 서로 어울리느니라.

 

순전한 생각은 위로 날아서 

반드시 천상에 나게 되나니 

만약 나르는 마음 가운데, 복과 지혜를 겸하고 

깨끗한 서원가지 겸하였으면 

자연히 마음은 열리어 

시방의 부처를 볼 수 있게 되고 

모든 정토에 서원을 따라 왕생하느니라.

 

정이 적고, 생각이 많으면 

가볍게 들리는 것이 멀지 못하여 

곧 날아다니는 신선이나, 큰 힘을 지닌 귀왕이나 

날아다니는 야차나 걸어 다니는 나찰이 되어서 

사방 하늘에 노닐되, 가는 곳마다 걸림이 없느니라.

 

그 가운데 만약 착한 소원이나 착한 마음이 있어서 

나의 법을 잘 보호하고 지키며 

혹은 금하는 계율을 잘 지켜서 

계를 지키는 사람을 따르거나 

혹 신주를 보호하여 신주를 가진 사람을 따르며, 

혹은 선정을 보호하여 법인을 편안히 보전하면 

그러한 사람은 

친히 부처님의 자리 아래에 머물게 되느니라.

 

감정과 생각이 균등하면 

날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아니하여 

인간에 나게 되는데, 

생각은 밝아서 총명하고 

감정은 어두워서 우둔하게 되느니라.

감정은 많고 생각은 적으면 

가로된 중생에 흘러 들어가게 되어서 

무거운 것은 털 달린 무리가 되고 

가벼운 것은 깃 달린 족속이 되느니라.

 

정이 칠할이고 생각이 삼할이면 

수륜(水輪)에 잠겨 내려가서 

화륜(火輪)의 경계에 태어나서 

맹렬한 불을 받아, 몸이 아귀가 되어서 

항상 불에 타게 되며, 

물도 몸을 해치므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면서, 백 천겁(劫)을 지내느니라.

 

정이 구할이고 생각이 일할이면 

밑으로 화륜을 뚫고 내려가서 

몸이 바람과 불, 이 둘이 서로 어울려 

지나는 곳에 들어가서 

가벼우면 유간지옥에 태어나고 

무거우면 무간지옥에 태어나는 등 

두 가지 지옥이 있느니라.

 

순전한 정은 곧 잠겨서 

가장 큰 아비지옥에 떨어지나니 

만약 잠기는 마음 가운데 

대승을 비방하거나, 

부처님께서 금하시는 계율을 헐뜯으며 

허망하게 거짓 법을 말하거나 

헛되이 시주님의 보시를 탐내거나 

외람되게 공경을 받거나, 

오역(五逆)죄-<(五逆罪)-

첫째, 

절이나 탑, 경전이나 불상을 불사르며 삼보의 재물을 훔치는 것. 

둘째, 

삼승법을 비방하거나 성인의 가르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셋째, 

스님들을 욕하는 것. 

넷째, 

소승의 오욕죄를 범하는 것. 

다섯째, 

인과의 진리를 믿지 않고 선업을 행하지 않는 것>나 

십중(十重, 열 가지 계율)죄를 지으면 

또 시방의 아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지은 대로 따르는 악업이 

비록 스스로 부른 것이나 

모든 같은 분수 가운데 

함께 받는 원래의 경지가 있느니라.

 

 

지옥의 세계

 

아난아, 그러한 것들은 

모두 저 중생들 스스로가 지은 업보대로 감응된 것이니 

열 가지 익힌 버릇이 씨앗이 되어 

여섯 가지 교보(交報)를 받느니라.


무엇을 열 가지 원인이라고 하는가?

 

아난아, 첫째는 

음란한 버릇으로 접촉함은 

서로가 비비는 데서 생겨나는데 

서로 비비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맹렬한 불길이 그 가운데서 일어나니 

마치, 사람이 손을 서로 비비면 

뜨거운 기운이 생기는 것과 같다.

두 가지 버릇이 서로 타오르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가서, 무쇠 평상과 구리 기둥 등으로 

가하는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음란하고 방탕함을 지목하여 

‘애욕의 불’이라고 이름 하였고 

보살은 음욕 보기를 

마치, 불구덩이를 피하듯이 하느니라.

 

둘째는 탐욕의 버릇으로 

서로 계량함이 서로를 빨아들이는데서 생기는데 

빨아들이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므로 

추위가 쌓이고 단단한 얼음이 

그 가운데서 얼어붙나니, 

이는 마치 사람이 입으로 바람을 들이마시면 

찬 감촉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두 가지 버릇이 서로 업신여기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가서 타타(咤咤), 파파(波波), 라라(羅羅) 등 

벌벌 떨면서 청련, 적련, 백련, 한빙 등의 지옥에서 

추위에 떠는 고초를 받는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많이 구하는 것을 지목하여

 ‘탐냄의 물’이라고 똑같이 이름 하였고 

보살은 탐욕 보기를 

마치, 장해(瘴海)를 피하듯이 하느니라.

 

셋째는 거만한 버릇으로 

서로 업신여김이 서로가 뽐내는 데서 생기는데 

뽐내는 마음이 치달려서,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에 

허공으로 날고 파도로 달려가서 

그 파도가 쌓여 물이 되나니 

이는 마치, 사람이 입술에 혀를 대고 빨아서 맛을 보면 

그로 인하여 물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두 가지 버릇이 서로 고동(鼓動)치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가서 핏물, 잿물, 뜨거운 모래, 

독기 있는 바다와 구리 녹인 물을 마시는 등의 고통을 받는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거만한 것을 지목하여 

‘마시기만 하면 바보가 되는 물’이라고 이름 하였고 

보살은 거만함을 보면, 큰물을 피하듯이 하느니라.

 

넷째는 성내는 버릇으로서 

서로 충돌함이 서로를 거스르는데서 생기는데 

거스름이 맺혀서 그치지 않으면 

마음의 열이 불길을 발하여 

기운을 녹여서 쇠가 되기 때문에 

칼산, 쇠곤장, 세원진 칼, 

칼수레, 도끼, 작두, 창, 톱 등으로 가하는 고통을 받게 되나니 

이는 마치 사람이 원한을 품으면, 살기가 날아 움직이는 것과 같다.

 

두 가지 버릇이 서로 공격하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가서 거세당하고[宮], 잘리고[割], 

목을 베이고[斬], 도끼로 찍히고[斫], 

톱으로 썰리고[剉], 찔리고[刺], 

몽둥이로 맞고[槌], 치는[擊]등의 고통을 받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성내고 분해하는 것을 지목하여 

‘예리한 칼날’이라고 이름 하였고 

보살은 성내는 것 보기를 

살해당하는 것을 피하듯이 하느니라.

 

다섯째는 간사한 버릇으로 

서로 조화하는 데서 생기는데, 그렇게 인기(引起)하여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에 

밧줄과 나무로 목을 조르거나 비트는듯 함을 느끼나니 

이는 마치 밭에 물을 대면 

풀과 나무가 나서 자라는 것과 같으니라.

 

두 가지 버릇이 서로 뻗어나므로 

지옥에 들어가 쇠고랑과 수갑과 항쇄, 족쇄와 곤장, 

회초리, 방망이 등의 형구로 가하는 고초를 받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간사함을 지목하여 

‘참소하여 해치는 것’이라고 이름 하였고 

보살은 간사한 것 보기를 

승냥이나 이리처럼 두려워하느니라.

 

여섯째는 속이는 버릇으로 

서로 속임이 서로를 무고하는 데서 생기는 

무고함이 그치지 않아서 

마음을 날려 간사함을 지으므로 

티끌과 흙과 똥, 오줌 같은 

더럽고 깨끗하지 못함을 느끼게 되나니 

이는 마치 티끌이 바람에 날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두 가지 버릇이 서로 더해지므로 

지옥에 들어가서, 빠지거나 차 올리는 것과 

날았다 떨어졌다 하는 것과 

뜨고 가라앉는 것 등의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속이는 것을 지목하여 ‘겁살’이라고 이름하고 

보살은 속이는 것 보기를 

뱀을 밟는 것처럼 여기느니라.

 

일곱째는 원망하는 버릇으로 

서로 미워함이 서로가 원한을 품은 데서 생기는데 

이와 같으므로 돌을 날리고 

바위를 던지고 뒤주에 가두고 함거(檻車)에 싣고 

독 속에 넣고 부대에 넣어 메치는 등의 고통을 느끼게 되나니 

이는 마치 음흉하고 독한 사람이 

가슴에 악을 품어 쌓아 두는 것과 같으니라.

 

두 가지 버릇이 서로 한을 머금고 있으므로 

지옥에 들어가서 던지고 차이고 얽어매고 때리고 

쏘고 당기고 움켜쥐는 등의 고통을 느끼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원한 품은 집을 지목하여 

‘위해귀(違害鬼)’라고 하고 

보살은 원한 있는 이를 보기를 

마치 독술을 마시는 것처럼 여기느니라.

 

여덟째는 나쁜 소견으로 

서로 변명하는 살가야견(薩迦耶見, 身見), 

견취(見取), 계금취(戒禁取) 등, 

삿된 깨달음의 모든 업이 

서로 어기고 거부하는 데서 생기는데 

어겨 배반함이 생겨 나오므로 

왕사와 관리가 문서로 증명하고 집행하나니 

이는 마치 길 가는 사람이 오가면서 

서로 마주 보는 것과 같으니라.

 

두 가지 버릇이 서로 어우러지기 때문에 

심문하고 고문하고 조사하고 수색하고 들추어내고 

증거를 대고 선동자, 악동자가 손에 문서를 들고 

변론하는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사악한 소견을 지목하여 

‘소견의 구덩이’라고 이름 하였고 

보살은 허망하고 편협한 고집쟁이 보기를 

마치 독한 구렁에 빠지는 것처럼 여기느니라.

 

아홉째는 모함하는 버릇으로 

서로 모함함이 서로를 비방하는 데에서 생기므로 

산과 합하고 돌과 합하여 

연자와 맷돌로 갈고 부수는 등의 고통을 느끼게 되나니 

이는 마치 남을 모함하여 해치는 사람이 

선량한 사람을 핍박하는 것과 같으니라.

 

두 가지 버릇이 서로 배척하기 때문에 

누르고 비틀고 때리고 뭉개고 치고 쥐어짜고 

거꾸로 매다는 등의 고통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모함하고 비방하는 것을 지목하여 

‘모함하는 범’이라고 이름 하였고 

보살은 바르지 못한 것 보기를 

마치 벼락을 만난 것처럼 여기느니라.

 

열째는 송사(소송)하는 버릇으로 

서로 시끄러움이 서로를 가리고 숨기는 데서 생기므로 

거울로 비춰 보고 촛불로 비춤을 느끼게 되나니 

이는 마치 햇볕에 그림자를 숨길 수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두 가지 버릇이 서로 고발하므로 

악한 벗, 업보의 거울, 불구슬로 묵은 업보를 파헤치고 

대질해서 징험하는 모든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덮어 감추는 것을 지목하여

 ‘음흉한 도적’이라고 이름 하였고 

보살은 덮어 가리는 것 보기를 

마치 높은 산을 머리에 이고 

큰 바다를 건너는 것처럼 여기느니라.

 

어떤 것을 여섯 가지 교보(交報)라고 하는가?

아난아, 모든 중생이 

여섯 가지 의식으로 업보를 짓고 

불러들이는 악한 과보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따라 나오느니라.

어찌하여 악한 과보가 

여섯 개의 감각기관으로부터 나온다고 하느냐?

 

첫째는 

보는 업보가 악한 결과를 불러오나니 

이 보는 업(業)이 어울리면, 곧 죽으려 할 때에 

먼저 맹렬한 불길이 시방세계에 가득함을 보게 되고, 

죽는 자의 영혼이 날아가 떨어져 

연기를 타고서 무간지옥에 들어가 

두 가지 모양을 발하여 밝히게 되느니라.

그 하나는 밝게 보이는 것으로 

갖가지 흉악한 사물들만 두루 볼 수 있게 되어서 

한량없는 두려움이 생기게 되고, 

다른 하나는 어둡게 보이는 것이니 

깜깜하여 보이지 않아서 

한량없는 공포증이 생기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보는 불이 듣는 것을 태우면, 

끓는 물[鑊湯]과 이글거리는 구리 녹은 물[洋銅]이 되고, 

숨을 태우면, 검은 연기와 붉은 불꽃이 되며, 

맛을 태우면, 볶은 철환과 쇳물죽이 되고, 

접촉을 태우면, 뜨거운 재와 숯이 되며, 

마음을 태우면, 별똥 불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허공세계에 타오르게 되느니라.

 

둘째는 

듣는 과보가 나쁜 결과를 불러들이나니 

이 듣는 업보가 어울리면, 죽으려 할 적에 

먼저 파도가 천지를 삼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죽은 자의 영혼이 내려 쏟아져 

흐름을 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서 

두 가지 모양을 발하여 밝히게 되느니라.

그 하나는 귀가 열려서 

갖가지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정신이 혼란해지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귀가 막혀서 

고요하여 듣지 못하므로 

넋이 빠져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듣는 파도를 듣는 것에 쏟아 부으면 

꾸짖고 따지는 것이 되고, 

보는 것에 쏟아 부으면 

우레가 되거나 성난 소리가 되고 

악독한 기운이 되며, 

숨 쉬는 데 쏟아 부으면, 비가 되고 안개가 되며 

갖가지 독충을 뿌려서 몸에 두루 하게 되고, 

맛보는 데 쏟아 부으면, 고름이 되고 피가 되며 

갖가지 더러운 것이 되고, 

접촉에 쏟아 부으면, 짐승이 되거나 귀신이 되며 

똥이 되거나 오줌이 되고, 

뜻에 쏟아 부으면, 번개가 되고 우박이 되어서 

마음과 혼을 부수느니라.

 

셋째는 

냄새 맡는 업보가 악한 결과를 불러오는 것인데 

이 맡는 업보가 어울리면 

죽으려 할 적에, 먼저 독한 기운이 

멀고 가까운 데 꽉 차는 것을 보게 되나니

죽은 자의 영혼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라 

무간지옥에 들어가서 

두 가지 모양을 발하여 밝히게 되느니라.

그 하나는 코가 열려서 

모든 악한 기운을 맡고, 숨이 막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코가 막혀서 

기운이 막혀 숨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하여 기절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맡는 기운이 숨 쉬는 것과 충돌하면, 

막힘[質]이 되고 통함[履]이 되며, 

보는 것과 충돌하면, 

불이 되고 횃불이 되며, 

듣는 것과 충돌하면, 

빠지는 것이 되거나 넘치는 것이 되고 끓는 것이 되며, 

맛과 충돌하면, 썩거나 쉬게 되고, 

감촉과 충돌하면, 터지거나 끈적거림이 되며 

큰 살덩어리 산이 되어서 

백, 천의 눈이 있는데 한량없는 것들이 빨아 먹으며 

생각에 충돌하면, 재나 유행성 질병이 되거나 나는 모래가 되어서 몸을 부수느니라.

 

넷째는 

맛의 업보가 악한 결과를 불러내는 것인데 

이 맛의 업보가 어울리면, 죽으려 할 적에 

먼저 철망(鐵網)에 맹렬할 불꽃이 사납게 치솟아서 

세계를 뒤덮는 것을 보게 되나니 

죽은 자의 영혼이 아래로 떨어져 

그물에 걸려, 그 머리가 거꾸로 매달리며 

무간지옥에 들어가서 

두 가지 모양을 발하여 밝히느니라.

그 하나는 들이쉬는 기운으로 

찬 얼음이 맺혀 살이 얼어터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뿜는 기운으로서 

맹렬한 불길이 날려 골수를 태우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맛을 보는 것이 맛보는 데 닿으면, 

받들어 모시거나 참게 되고, 

보는 것에 닿으면 타는 쇠나 돌이 되며, 

듣는 것에 닿으면 예리한 무기나 칼이 되고, 

숨 쉬는 것에 닿으면 큰 철장이 되어 

국토를 가득 덮으며, 

감촉에 닿으면 활이나 화살이 되고 

탄알이나 쏘는 것이 되며, 

생각에 닿으면, 나는 뜨거운 쇠가 되어 

공중에서 비 오듯 쏟아지느니라.

 

다섯째는 

접촉의 과보가 악한 결과를 불러들이나니, 

이 감촉의 업보가 어우러지면, 임종할 적에 

먼저 큰 산이 사면으로 와서 합함을 보고 

죽은 자의 영혼이 큰 철성에 불뱀, 불개, 

호랑이와 이리, 사자와 소머리를 한, 옥졸과 

말머리를 한, 나찰이 손에 창을 쥐고 

성문으로 몰아넣어, 무간지옥에 들어가 

두 가지 모양이 발하여 밝혀지느니라.

그 하나는 접촉과 함하는 것이니 

산이 합해져서 몸을 핍박하여 

뼈와 살과 피가 무너져 터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접촉을 여의는 것이니 

칼이 몸에 닿아 심장과 간장이 찢어지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접촉과 합함이 접촉에 닿으면 

길이나 옥문을 지키거나, 관청이나 문초하는 곳이 되고, 

보는 것에 닿으면, 

태우거나 사르게 되며, 

듣는 것에 닿으면, 

때리거나 치거나 찌르거나 쏘게 되고, 

숨 쉬는 것에 닿으면, 

긁거나 조르거나 고문하거나 얽어매게 되며, 

맛보는 것에 닿으면, 

갈거나 목에 사슬을 씌우거나 베거나 잘리게 되고, 

생각하는 것에 닿으면, 

떨어뜨리거나 날리거나 삶거나 굽게 되느니라.

 

여섯째는 

생각의 과보가 악한 결과를 불러들이는데 

이 생각의 업보에 어울리면, 임종할 적에 

먼저 모진 바람이 불어와 무너뜨리는 것을 보게 되나니 

죽은 영혼이 바람에 날려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돌아 떨어지며 

바람을 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서 

두 가지 모양을 발하여 밝히게 되느니라.

그 하나는 깨닫지 못함이니 

미혹함이 지극해지면 거칠어져서 

분주하게 달려 쉬지 않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미혹하지 않음이니 

깨달으면, 괴로워서 한량없이 삶기거나 

태움을 당하는 고통을 받아 참기 어려우니라.

 

이와 같이 

삿된 생각이 생각에 맺히면 

방향이나 장소가 되고, 

보는 것에 맺히면 

거울이나 증명하는 것이 되며, 

듣는 데에 맺히면 

크게 합하는 돌이 되고, 

얼음, 서리, 흙이나 안개가 되며, 

호흡에 맺히면 

큰 불수레, 불배, 불함거가 되고, 

맛봄에 맺히면 

크게 울부짖고 후회하게 되고 울게 되며, 

접촉에 맺히면 

크게도 되고 작게도 되어 

하루 사이에 만 번 나고, 만 번 죽으며 

엎치락뒤치락하게 되느니라.

 

아난아, 이것을 이름 하여 

지옥의 열 가지 원인과 

여섯 가지 결과라고 하나니 

모두가 중생들의 미망(迷妄)으로 지어진 것이니라.

만약 모든 중생들이 

여섯 개의 감각기관으로 

악한 업을 한꺼번에 지으면, 

이 사람은 즉시 아비지옥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끝없는 세월을 지내게 되느니라.

 

여섯 개의 감각기관이 각각 지었거나 

그 지은 것이 대상 물질과 감각기관을 겸했으면 

이 사람은 즉시 팔 무간지옥에 들어가느니라.

몸과 입 그리고 뜻, 이 세 가지로 

살생, 도적질, 음행을 행하면 

이 사람은 즉시, 십팔지옥에 들어가느니라.

세 가지 업보를 겸하지 않고 

중간에 혹 한 가지 살생만 하거나 

다른 한 가지 도적질만 하였으면 

이 사람은 즉시, 삼십육지옥에 들어가느니라.

드러나고 드러나서 

어느 한 감각기관이 

단순하게 하나의 업보만 범하면 

이 사람은 즉시 백팔지옥에 들어가느니라.

 

이로 말미암아서 

중생이 따로따로 지었으나 

세계에서는 분수가 같은 지옥에 들어가나니, 

이는 허망한 생각으로 발생한 것이지 

본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니라.

 

귀신의 세계

 

또 아난아, 이 모든 중생들이 

계율을 그르다 하여 지키지 아니하였거나 

보살계를 범하였거나 

부처님의 열반을 헐뜯었거나 

그 밖에 여러 가지 업보로 

오랜 세월 동안 불에 타는 과보를 받다가 

뒤에 다시 죄가 끝나면, 

모든 귀신의 형체를 받느니라.

 

만약 본래의 업인에서 

물질을 탐하여 죄가 된 이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물질을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괴귀(怪鬼)’이고, 

여색을 탐하여 죄가 된 그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바람을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발귀’이며, 

미혹을 탐하여 죄가 된 그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짐승을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매귀’이고, 

원한을 탐하여 죄가 된 그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곤충을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고독귀’이다.

 

기억을 탐하다가 죄가 된 그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쇠퇴한 운수를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여귀’이고, 

거만함을 탐하다가 죄가 된 그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기운을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아귀’이며, 

거짓말을 탐하다가 죄가 된 그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그윽한 어두움을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염귀’이고, 

밝음을 탐하다가 죄가 된 그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정령을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망양귀’이다.

 

성취하기를 탐하여 죄가 된 그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밝음을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역사귀’이고, 

파당을 탐하다가 죄가 된 그러한 사람은 

죄가 끝나면, 사람을 만나 형체를 이루나니 

그 이름이 ‘전송귀’이다.

 

아난아, 이 사람들은 

모두 순수한 감정으로 추락하였다가 

업보의 불이 타서 말라지면 

위로 올라가서, 귀신이 되나니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스스로 망상의 업보로써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니 만약 보리를 깨달으면 

오묘한 성품이 원만하게 밝아져서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니라.

 

축생의 세계

 

또 아난아, 

귀신의 업보가 이미 다 끝나면 

정과 생각이 둘 다 공허하게 되어 

비로소 세상에서 

원래 빚졌던 사람이나, 

원수끼리 서로 만나게 되나니 

그 몸은 축생이 되어서 

묵은 빚을 갚게 되느니라.

 

물건에 붙었던 괴귀(怪鬼)는 

물건이 사라지고 업보가 다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올빼미의 종류가 되고, 

바람에 붙었던 가뭄 귀신이 

바람이 사라지고 업보가 다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구징(咎徵)

-<흉한 징조이니, 상양(商羊)이 물에서 춤추고 

박쥐가 사람을 부르는 따위이다.> 같은 

이상한 종류가 되며, 

짐승에게 붙었던 매귀(魅鬼)가 

짐승이 죽고 업보가 다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여우같은 종류가 되고, 

곤충에 붙었던 고귀(蠱鬼)는 

곤충이 죽고 업보가 다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독한 종류가 되느니라.

 

쇠운을 만났던 여귀(麗鬼)는 

쇠운이 끝나고 업보가 다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회충 같은 종류가 되고, 

기운을 받았던 귀신은 

어두움이 사라지고 업보가 다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잡아먹히는 종류가 되느니라.

 

어두움에 붙었던 귀신은 

어두움이 사라지고 업보가 다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의복의 원류를 만드는 종류가 되고, 


정령(精靈)과 어울렸던 귀신은 

어울림이 사라지고 업보가 다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계절을 따라다니는 종류가 되며, 

밝음과 어울렸던 귀신은 

밝음이 사라지고 업보가 끝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좋은 일을 알리는 여러 가지 종류가 되고, 

사람에게 의지하였던 귀신은 

사람이 죽고 업보가 끝나면 

세상에 생겨나는데 

대부분 사람을 따르는 종류가 되느니라.

 

아난아, 이들은 모두가 

업보의 불길이 말라버렸으므로 

저 묵은 빚을 갚고, 다시 축생이 되었으니 

그런 것들도 모두가 허망한 업보로 불러들인 것이다.


만약 보리를 깨달으면 

곧 이 허망한 인연들이,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네가 말한 것과 같이 

보련향 등과 유리왕과 선정비구와 같은 악업은 

본래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요,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며 

사람이 준 것도 아니니라.

자신의 허망한 생각으로 불러들인 것이므로 

스스로 돌려받는 것이니 

보리의 마음속에서는 

모두 부질없이 허망한 생각으로 엉켜 맺혀진 것이다.

 

인간의 세계

 

또 다시 아난아, 

이러한 축생들이 묵은 빚을 갚을 적에 

만약, 그 갚는 이가 갚을 것보다 더 갚았으면 

그러한 중생들은 다시 사람이 되어서 

지난 날, 더 갚았던 것을 도로 찾게 되나니, 

만약, 그 사람이 힘이 있고 겸하여 복덕이 있으면 

인간 세상에서 사람의 몸을 버리지 않고 

더 받았던 것을 능력껏 갚아 주겠지만 

만약, 복이 없는 이라면 

다시 축생이 되어서 더 받았던 것을 갚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돈이나 재물을 쓰거나 

혹 그 힘을 부릴 적에 

보상이 충분하면, 그만두어야 하거늘, 

만일, 그 중간에 상대의 목숨을 죽이거나 

그 고기를 먹으면, 그러한 것은 

티끌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도록 

서로 잡아먹고 서로 죽이는 것이 

마치 굴러가는 바퀴가 

서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과 같아서 

끊임이 없으리니, "사마타"를 닦거나 

부처가 세상에 출현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치게 할 수가 없느니라.

 

너는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올빼미의 종류가 

갚을 만큼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면, 

어리석고 미련한 무리에 참여하게 되고, 

저 흉한 것을 알리는 종류는 

갚을 만큼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면 

이상한 무리에 참여하게 되며, 

저 여우의 종류가 갚을 만큼 갚고나서

형상을 회복하여,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면 

용렬한 무리에 참여하게 되고, 

저 독한 종류가 갚을 만큼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면 

사나운 무리패에 참여하게 되며, 

저 회충의 종류가 갚을 만큼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사람으로 태어나면 

미천한 무리에 참여하게 되고, 

저 잡아먹히는 종류가 갚을 만큼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면 

유약한 무리에 참여하게 되느니라.

 

저 의복의 원료가 되던 종류가 

갚을 만큼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면, 

노력하는 무리에 참여하게 되고, 

저 때를 알리던 종류가 갚을 만큼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면 

총명한 무리에 참여하게 되고, 

저 계절을 따르던 종류가 

갚을 만큼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면 

통달하는 무리에 참여하게 되느니라.

 

아난아, 그들은 

다 묵은 빚을 갚았기 때문에 

다시 사람의 길을 회복하였으니 

모두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업보에 얽혀서 

뒤바뀌어 서로 낳고 서로 죽이고 하느니라.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거나 

바른 법을 듣지 못하여 

번뇌 속에서 법이 그렇게 윤전하도록 되어 있나니 

그러한 무리를 일러서‘가련한 자’라고 이름 하느니라.

 

신선의 세계

 

아난아, 또 어떤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의지해서 삼마지를 닦지 아니하고 

따로 허망한 생각을 닦아 생각을 보존하고 

형체를 견고하게 하여 

인적이 미치지 않는 산림(山林)으로만 다니는 

열 가지 신선이 있느니라.

 

아난아, 저 모든 중생들이 

약을 먹어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하여 

먹는 도가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지행선(地行仙)’이라 하고, 


풀과 나무를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하여 

약의 도가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비행선(飛行仙)’이라고 하느니라.

 

금석을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해서 

변화하는 도가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유행선(遊行仙)’이라고 하고,


행동거지를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해서 

기운과 정기가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공행선(空行仙)’이라고 하느니라.

 

진액을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해서 

덕을 윤택하게 하여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천행선(天行仙)’이라고 하고, 


정색(精色)을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해서 

순수한 기운을 마셔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통행선(通行仙)’이라고 하느니라.

 

주문과 금계를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해서 

술법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도행선(道行仙)’이라고 하고, 


생각을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해서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조행선(照行仙)’이라고 하느니라.

 

사귀어 어울림을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해서 

감응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정행선(精行仙)’이라고 하고, 


변화를 견고하게 하기를 쉬지 아니하여 

깨달음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이는 

‘절행선(絶行仙)’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사람은 

모두 다 사람들 중에서 마음을 단련하되 

바른 깨달음을 닦지 아니하고 

따로 장생하는 이치를 터득하여 

수명이 천만 세를 사는데, 

깊은 산 속이나, 혹은 큰 바닷가 섬 등의 

인적이 이르지 않는 곳에서 산다.

그들도 윤회하는 허망한 생각으로 

유전(流轉)하면서 삼매를 닦지 아니하였으므로 

과보가 다하면, 흩어져서 

여러 세계의 부류에 들어가느니라.

 

천상의 세계

 

아난아,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항상 머물기를 구하지 아니하여서 

아내와 첩에 대한 은애를 버리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삿된 음욕에는 마음이 흘러 빠져들지 않아서 

맑고 고요하여 빛을 발하는 이는 

죽은 뒤에 해와 달을 이웃하게 되나니 

이와 같은 한 무리는 그 이름을 

‘사천왕천(四天王天)’이라고 하느니라.

 

자기 아내에게도 

음욕과 애욕이 더욱 얇아져서 

깨끗하게 지낼 적에 

온전한 재미를 느끼지 못한 이는 

죽은 뒤에 해와 달의 밝은 경계를 초월하여 

인간의 정상에 살게 되나니 

그와 같은 무리가 사는 곳, 

그 이름이 ‘도리천(忉利天)’이니라.

 

만나면, 애욕에 잠깐 어울리기는 하나 

떠나면 생각이 곧 없어져서 

인간 세상의 일에 동요함은 적고 

고요함이 많은 이는 

죽은 뒤에 허공중에서 밝게 편안히 머물러 

해와 달의 광명이 올려 비추어도 미치지 못하므로 

이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광명이 있나니, 

그와 같은 한 무리는 

‘수염마천(須燄摩天)’이라고 하느니라.

 

모든 시간에는 

언제든지 고요했다가도 

꼭 접촉해야 할 대상이 오면, 

이를 거절하지 못하는 이는 

죽은 뒤에 위로 올라가서 

정밀하고 미묘해져서 

아래 세계의 사람이나 

하늘의 경계에 접하지 아니하며 

이 세계가 다하기에 이르더라도 

삼재가 미치지 못하는 이러한 한 무리는 

‘도솔타천(兜率陀天)’이라고 하느니라.

 

자신은 애욕의 마음이 없되, 

상대방의 요청에 따라서 행동하므로 

무심하게 행동할 적에 

그 맛이 밀랍을 씹는 듯한 이는 

죽은 뒤에 초월하여, 변화하는 곳에 나나니 

그와 같은 한 무리는

 ‘낙화변천(樂變化天)’이라고 하느니라.

 

세상에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세상과 함께 일을 행하여서 

일을 행하는 어울림에 있어 

분명히 초월한 이는 

죽은 뒤에 변화가 있고, 

변화가 없는 데에서 

두루 초월하여 벗어나나니 

그와 같은 한 무리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이 여섯 하늘이 

형상은 비록 동요하는 데에서 벗어났으나, 

마음의 자취가 아직은 서로 어울리니 

처음부터 여기까지를 일러서 

모두 ‘욕계’라고 하느니라.”

 

-제8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