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소개-感想방◈

유.불.선을 두루 통달했던 도인(道人)-정북창鄭北窓

Demian-(無碍) 2012. 11. 15. 21:42


유.불.선을 두루 통달했던 도인(道人)
-북창(北窓) 정염(鄭嶫)

유.불.선을 아우른 조선 도맥(道脈)의 정수(精髓)


북창(北窓) 정염(鄭嶫)-정북창은 
조선 시기의 선도(仙道) 인물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기이한 행적과 일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도교사에서 
학술적으로 차지하는 비중도 크기 때문에 
조선의 선도를 얘기하게 되면,
우선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 
바로 정북창인 것이다. 

정북창은 본명이 렴(嶫), 별호가 북창(北窓)으로 
조선 중종(中宗) 원년(1506) 
온양(溫陽)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후일, 부친인 정순붕(鄭順朋)이 우의정, 
중부(仲父)인 정백붕(鄭百朋)이 
형조판서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전형적인 사대부 가문 출신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벼슬길에는 본래부터 관심이 없어서 
대과(大科)에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의 추천으로 마지못해, 관상감(觀象監)·
혜민서(惠民署)·장악원(掌樂院) 등의 관리를 지냈는데, 
이는 그가 천문(天文)·의약(醫藥)·음률(音律) 등에 
정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포천(抱川) 현감을 끝으로 
더 이상 관직에 있지 않고, 
양주(楊州) 괘라리(掛蘿里)에 은거, 
수련에만 전념하다가 세상을 뜨니 향년 44세, 
때는 명종(明宗) 4년(1549)이었다. 

짧은 생애에 높지 않은 벼슬, 
그의 공적인 삶은 결코 화려할 수 없지만, 
그의 내면의 삶, 도인(道人)으로서의 삶은 
그가 후세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길고 풍성한 의미의 일생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뛰어난 신통력과 예지력의 소유자로
전설에 의하면, 정북창은
"나면서 말을 할 줄 알았다(生而能言)"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자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가 선도를 공부하게 된 과정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김시습(金時習)에서, 중 대주(大珠)로 이어진 
조선 도교(道敎)의 도맥(道脈)을 계승함으로써라고 한다. 

그가 산사(山寺)의 고승들과 교유(交遊)하기를 
즐겨했던 것을 보면, 그의 선도(仙道) 수행에는 
불문(佛門)과의 관계가 적지 않았음이 엿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소싯적부터 
수련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온양 정씨의 가학(家學)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온양 정씨 문중에서는 정북창뿐만 아니라, 
그보다 9세 연장인 종형 계향당(桂香堂) 정초(鄭礎) 역시 
선도의 인물로서 높은 명망을 지니고 있어서 선도 수행은 
정북창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가학(家學)의 한 경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자질로 수련에 몰두했던 정북창이 
일찍이 그 신통력으로 도계(道界)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것임은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한때 그는 산사에 들어가서 
선가(禪家)의 육통법(六通法)을 연마하여, 
사흘 만에, 산 아래 백 리 바깥의 일을 가만히 앉아서 
모두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 중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정씨 집안에서 종을 시골로 심부름 보냈는데 
귀가할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오질 않아 걱정하다 
못해 정북창에게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때 정북창이 잠시 명상에 잠겼다가 말하기를, 
그 종이 아무 고개를 넘어오다가 양반 행차에 
불경한 짓을 해서 붙들려 맞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한참 후, 종이 도착하여 사실을 확인한즉 
과연, 정북창이 말한 바와 같아서 
온 집안이 탄복했다는 이야기이다. 

정북창은 또한 새·짐승의 말을 알아듣기로 유명하였다. 

어느 날, 잔칫집엘 갔다가 새 소리를 듣고 
그 집의 술(酒)이 무덤가에서 거둔 밀로 빚은 것임을 간파한 일, 
그리고 이로 인해 고을 원님에게 붙들려갔다가 
고을 원님이 사생아라는 내력을 
역시 새 소리에 의해 알아낸 일 등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던 설화이다. 

정북창은 예언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6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유독 셋째인 십죽헌(十竹軒) 정첨(鄭石詹)의 부인인 
구씨(具氏)를 존중함이 유별났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집안은 모두 제수씨의 자손이 될 것인데 
내가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과연 손자 대에 이르러 형제들이 무후(無後)하게 되자 
십죽헌의 자손이 출계(出系)하여 대를 이었다. 

정북창은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휘파람 불기, 즉 소법(嘯法)에 뛰어났다. 
소법(嘯法)은 선도(仙道) 수행에서 
깊은 내단의 공력을 바탕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으로 
중국의 경우 일찍이 위진(魏晉) 시기의 선인(仙人) 
-손등(孫登)이, 이 방면의 대가로 손꼽혔었다. 

언젠가 정북창의 부친인 정순붕(鄭順朋)이 
강원감사로 있을 때 금강산엘 놀러갔었는데 
갑자기 계곡을 진동하는 큰 휘파람 소리가 들려 
시중을 들던 산사의 중들이 놀라, 
용(龍)의 울음소리인가 여겼는데, 
알고보니, 정북창이 낸 소성(嘯聲)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고고한 은일군자(隱逸君子)의 삶...
정북창의 이런 신이한 행적은 당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부친 정순붕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자,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찾아와 
{고국에서 점을 치니, 진인(眞人)을 만나리라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며, 가르침을 청원하였다. 

이때 소문을 듣고 사신으로 왔던 각국 사람들이 
객관(客館)으로 찾아왔는데, 
정북창이 각 나라의 말로 응대하니 
모두들 경탄하고 천인(天人)이라 칭하였다. 

정북창은 짧은 생애 동안 
그의 도력(道力)과 관련한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만년에는 세상에 조금도 뜻을 두지 않고 
고고한 은일군자(隱逸君子)로서의 삶을 지켰다. 

그의 풍채는 마치, 구름을 탄 학처럼 
탈속한 모습이었고 
대낮에도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의 고결한 인품, 
심오한 학문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칭송이 자자하여 
인종(仁宗)이 세자 때에 그의 명성을 듣고, 
즉위하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더불어 
정승을 시켜야 할 인물로 손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후, 
갑자기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44세 되던 해, 
세상에 오래 있지 않을 뜻을 굳힌 듯, 
주위에 미리 이승을 떠날 날짜를 말하고 
스스로 만사(輓詞)를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生讀破萬卷書    평생에 만 권의 책을 읽었고,
日飮盡千鍾酒    하루에 천 잔의 술을 마셨다네.
高談伏羲以上事 복희씨 이전의 일만 얘기하고,
俗說從來不卦口 속된 얘기는 입에 담지도 않았지.
顔回三十稱亞聖 안회는 삼십에도 성인에 버금갔거늘,
先生之壽何其久 선생의 삶은 어찌 그리도 길었던고.

이 시는 그의 도인(道人)으로써의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44세의 수명을, 어찌 그리 길었느냐고 
자문(自問)하는 그의 마음 계제는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여 
절대의 시공간을 노닐고 있는 경지인 것이다. 

그가 조용히 좌화(坐化)한 날, 부근의 주민들이 
그가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는 
백일비승(白日飛昇)의 설화가 후일담처럼 전한다.

유·불·도 삼교에 박통한 학자
지금까지 길게 서술한 정북창을 둘러싼 갖가지 설화들은 
그를 신통력을 지닌 선인으로 장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정북창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가 남긴 저작물을 통해 객관적·학문적으로 분석, 
평가되어야 하는 도교 학자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이제 그의 학문세계, 그리고 그것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가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정북창이 계승하고 있는 
선도(仙道) 의 맥(脈)에 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얘기한 바 있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그는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이어지는 
내단학(內丹學)을 조선에 들여와 
크게 성취시킨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세계는 
도교(道敎)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유교는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가훈(家訓)?에서 
초학자는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반드시 학습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그가 유교를 생활원리로서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교와 더불어 불교도 멀리하지 않았는데, 
자주 산사(山寺)에 가서 수련을 하거나, 
불승(佛僧)들과 교유한 사실이, 그의 시문(詩文)에 나타난다. 

그는 유학자로서 선배인, 서화담(徐花潭)을 존경하였고, 
도인으로서는 수암(守庵)-박지화(朴枝華)와 친하게 사귀었다. 

박지화 역시 당시 도계의 저명한 인물로 
후일 수선(水仙)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정북창의 사후(死後), 정북창의 막내동생 
고옥(古玉) 정작(鄭 )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학문내용, 교유관계 등을 종합해볼 때 
정북창은 유·불·도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입장에 섰던 
도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세인들의 정북창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이 점에 주목하여 
그를 삼교에 박통(博通)한 인물로 자주 표현하였다. 

한학(漢學) 사대가(四大家) 중의 일인이었던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들어보자. 

북창은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러워 널리 삼교에 통달하였는데, 
수련은 도교와 비슷하고, 
깨달음은 불교와 흡사하나, 
윤리는 우리 유교를 근본으로 하였다

北窓生而靈異 博通三敎 其修攝似道 
解悟類禪 而倫常行 誼一本吾儒

진인의 경지를 추구한 수련인...

그러나 정북창은 유불선-삼교에 널리 통달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인의 경지를 추구하였던 수련인이었다. 

그의 선도 이론은 그가 남긴 저작 
『용호비결(龍虎秘訣)』을 통해 파악해볼 수 있다. 
『용호비결』은 당시 수련인들이 
중국 도서(道書)에만 의존해, 
어렵게 공부하던 실정에서 탈피하여 
한국 선도의 입장에서 
새롭고 쉽게 쓰여진 도서로서 
정북창의 한국 선도에 대한 자부심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정북창이 소시에 중국에 갔을 때 
한 중국 도사를 만났는데, 그가 조선의 선도를 깔보자 
정북창이 청산유수로 선도 이론을 설파하여 
그를 굴복시켰다는 일화, 역시 정북창이 평소에 
한국 선도에 대해 주체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아무튼 『용호비결』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도서이자,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창작된 
최초의 도서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정북창은 이 책의 첫머리에서 
우선 단경(丹經)의 왕이라 칭하는 
『참동계(參同契)』의 난삽함을 비판하고 
초학자를 위하여 
쉽게 선도에 입문할 수 있는 수련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서 
폐기(閉氣)·태식(胎息)·주천화후(周天火候) 등 
각 수련 법식에 따른 수련의 효과, 
즉 신체적 징후 및 정신적 경지에 대해 
명쾌히 해설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도서(道書) "용호비결"

이러한 『용호비결』이 
한국 도교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높다. 

우선 『용호비결』은 정북창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의 선도 수행자들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서 
정북창을 비롯한 조선의 선도 수행자들을 
단학파(丹學派)라고 불렀는데,『용호비결』은 
바로 이 조선 단학파의 교과서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용호비결』은 조선의 의학 사상, 
특히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허준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다. 
『동의보감』의 기획에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이 관계했는데, 
정북창의 막내 아우-"정작"이 유의(儒醫)로서 참여하여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하였다. 

『용호비결』에서 전개된 정기신론(精氣神論)이 
『동의보감』의 독특한 도교 의학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이 밖에도 정북창은 
각 방면에 걸친 그의 탁월한 도력으로 인하여 
후대에 이르러 점술·풍수학(風水學)의 대가, 
의술의 달인(達人) 등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근세에는 신흥종교 측에 의해, 
말세를 예언한 도통자로서 추앙되기도 한다. 

아울러 온양 정씨 일문에서는 
정북창과 그의 종형 정초(鄭礎) 이후에도 
정작(鄭 )·정지승(鄭之升)·정회(鄭晦)·
정돈시(鄭敦始)·정두경(鄭斗卿) 등 
조선도교사상 저명한 선도 인물들이 연속 배출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정북창이 그의 일문에 미친 
사상적 영향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정북창의 대표적 저작으로는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 부록된 『용호비결』을 비롯, 
온양 정씨 문집인 『온성세고(溫城世稿)』에 실린 
45수(首)의 시와 ?가훈?이 있다. 

그의 묘소는 
생시에 그가 집안의 장지로 친히 잡아두었던 
경기도 양주군 사정동(砂井洞) 산록에 있는데, 
이 산은 온양 정씨의 선영(先塋)으로 
현재까지 6백여 년 동안 잘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남양주군에는 그가 은거, 수련했던 장소가 
지금도 "정씨골"이라는 명칭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유.불.선을 두루 통달했던 도인(道人)
-북창(北窓) 정염(鄭嶫)
유.불.선을 아우른 조선 도맥(道脈)의 정수(精髓)
북창(北窓) 정염(鄭嶫)-정북창은 
조선 시기의 선도(仙道) 인물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기이한 행적과 일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도교사에서 
학술적으로 차지하는 비중도 크기 때문에 
조선의 선도를 얘기하게 되면,
우선 떠올리게 되는 인물이 
바로 정북창인 것이다. 
정북창은 본명이 렴(嶫), 별호가 북창(北窓)으로 
조선 중종(中宗) 원년(1506) 
온양(溫陽)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후일, 부친인 정순붕(鄭順朋)이 우의정, 
중부(仲父)인 정백붕(鄭百朋)이 
형조판서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니 
전형적인 사대부 가문 출신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벼슬길에는 본래부터 관심이 없어서 
대과(大科)에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의 추천으로 마지못해, 관상감(觀象監)·
혜민서(惠民署)·장악원(掌樂院) 등의 관리를 지냈는데, 
이는 그가 천문(天文)·의약(醫藥)·음률(音律) 등에 
정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포천(抱川) 현감을 끝으로 
더 이상 관직에 있지 않고, 
양주(楊州) 괘라리(掛蘿里)에 은거, 
수련에만 전념하다가 세상을 뜨니 향년 44세, 
때는 명종(明宗) 4년(1549)이었다. 
짧은 생애에 높지 않은 벼슬, 
그의 공적인 삶은 결코 화려할 수 없지만, 
그의 내면의 삶, 도인(道人)으로서의 삶은 
그가 후세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길고 풍성한 의미의 일생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뛰어난 신통력과 예지력의 소유자로
전설에 의하면, 정북창은
"나면서 말을 할 줄 알았다(生而能言)"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자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가 선도를 공부하게 된 과정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김시습(金時習)에서, 중 대주(大珠)로 이어진 
조선 도교(道敎)의 도맥(道脈)을 계승함으로써라고 한다. 
그가 산사(山寺)의 고승들과 교유(交遊)하기를 
즐겨했던 것을 보면, 그의 선도(仙道) 수행에는 
불문(佛門)과의 관계가 적지 않았음이 엿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소싯적부터 
수련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온양 정씨의 가학(家學)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온양 정씨 문중에서는 정북창뿐만 아니라, 
그보다 9세 연장인 종형 계향당(桂香堂) 정초(鄭礎) 역시 
선도의 인물로서 높은 명망을 지니고 있어서 선도 수행은 
정북창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가학(家學)의 한 경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자질로 수련에 몰두했던 정북창이 
일찍이 그 신통력으로 도계(道界)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것임은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한때 그는 산사에 들어가서 
선가(禪家)의 육통법(六通法)을 연마하여, 
사흘 만에, 산 아래 백 리 바깥의 일을 가만히 앉아서 
모두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 중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정씨 집안에서 종을 시골로 심부름 보냈는데 
귀가할 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오질 않아 걱정하다 
못해 정북창에게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때 정북창이 잠시 명상에 잠겼다가 말하기를, 
그 종이 아무 고개를 넘어오다가 양반 행차에 
불경한 짓을 해서 붙들려 맞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한참 후, 종이 도착하여 사실을 확인한즉 
과연, 정북창이 말한 바와 같아서 
온 집안이 탄복했다는 이야기이다. 
정북창은 또한 새·짐승의 말을 알아듣기로 유명하였다. 
어느 날, 잔칫집엘 갔다가 새 소리를 듣고 
그 집의 술(酒)이 무덤가에서 거둔 밀로 빚은 것임을 간파한 일, 
그리고 이로 인해 고을 원님에게 붙들려갔다가 
고을 원님이 사생아라는 내력을 
역시 새 소리에 의해 알아낸 일 등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던 설화이다. 
정북창은 예언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6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유독 셋째인 십죽헌(十竹軒) 정첨(鄭石詹)의 부인인 
구씨(具氏)를 존중함이 유별났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집안은 모두 제수씨의 자손이 될 것인데 
내가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과연 손자 대에 이르러 형제들이 무후(無後)하게 되자 
십죽헌의 자손이 출계(出系)하여 대를 이었다. 
정북창은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특히 휘파람 불기, 즉 소법(嘯法)에 뛰어났다. 
소법(嘯法)은 선도(仙道) 수행에서 
깊은 내단의 공력을 바탕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으로 
중국의 경우 일찍이 위진(魏晉) 시기의 선인(仙人) 
-손등(孫登)이, 이 방면의 대가로 손꼽혔었다. 
언젠가 정북창의 부친인 정순붕(鄭順朋)이 
강원감사로 있을 때 금강산엘 놀러갔었는데 
갑자기 계곡을 진동하는 큰 휘파람 소리가 들려 
시중을 들던 산사의 중들이 놀라, 
용(龍)의 울음소리인가 여겼는데, 
알고보니, 정북창이 낸 소성(嘯聲)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고고한 은일군자(隱逸君子)의 삶...
정북창의 이런 신이한 행적은 당시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일찍이 부친 정순붕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가 어린 나이로 수행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자,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찾아와 
{고국에서 점을 치니, 진인(眞人)을 만나리라 했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며, 가르침을 청원하였다. 
이때 소문을 듣고 사신으로 왔던 각국 사람들이 
객관(客館)으로 찾아왔는데, 
정북창이 각 나라의 말로 응대하니 
모두들 경탄하고 천인(天人)이라 칭하였다. 
정북창은 짧은 생애 동안 
그의 도력(道力)과 관련한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만년에는 세상에 조금도 뜻을 두지 않고 
고고한 은일군자(隱逸君子)로서의 삶을 지켰다. 
그의 풍채는 마치, 구름을 탄 학처럼 
탈속한 모습이었고 
대낮에도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의 고결한 인품, 
심오한 학문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칭송이 자자하여 
인종(仁宗)이 세자 때에 그의 명성을 듣고, 
즉위하면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더불어 
정승을 시켜야 할 인물로 손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후, 
갑자기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44세 되던 해, 
세상에 오래 있지 않을 뜻을 굳힌 듯, 
주위에 미리 이승을 떠날 날짜를 말하고 
스스로 만사(輓詞)를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生讀破萬卷書 평생에 만 권의 책을 읽었고,
日飮盡千鍾酒 하루에 천 잔의 술을 마셨다네.
高談伏羲以上事 복희씨 이전의 일만 얘기하고,
俗說從來不卦口 속된 얘기는 입에 담지도 않았지.
顔回三十稱亞聖 안회는 삼십에도 성인에 버금갔거늘,
先生之壽何其久 선생의 삶은 어찌 그리도 길었던고.
이 시는 그의 도인으로써의 삶을 
요약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4세의 수명을 어찌 그리 길었느냐고 
자문(自問)하는 그의 마음 계제는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여 
절대의 시공간을 노닐고 있는 경지인 것이다. 
그가 조용히 좌화(坐化)한 날, 부근의 주민들이 
그가 구름을 타고 승천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는 
백일비승(白日飛昇)의 설화가 후일담처럼 전한다.
유·불·도 삼교에 박통한 학자
지금까지 길게 서술한 정북창을 둘러싼 갖가지 설화들은 
그를 신통력을 지닌 선인으로 장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정북창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었고 
따라서 그가 남긴 저작물을 통해 객관적·학문적으로 분석, 
평가되어야 하는 도교 학자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다. 
이제 그의 학문세계, 그리고 그것에 대한 
후세인들의 평가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정북창이 계승하고 있는 
선도(仙道) 의 맥(脈)에 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얘기한 바 있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그는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이어지는 
내단학(內丹學)을 조선에 들여와 
크게 성취시킨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세계는 
도교(道敎)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유교는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가훈(家訓)?에서 
초학자는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반드시 학습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그가 유교를 생활원리로서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교와 더불어 불교도 멀리하지 않았는데, 
자주 산사(山寺)에 가서 수련을 하거나, 
불승(佛僧)들과 교유한 사실이, 그의 시문(詩文)에 나타난다. 
그는 유학자로서 선배인, 서화담(徐花潭)을 존경하였고, 
도인으로서는 수암(守庵)-박지화(朴枝華)와 친하게 사귀었다. 
박지화 역시 당시 도계의 저명한 인물로 
후일 수선(水仙)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정북창의 사후(死後), 정북창의 막내동생 
고옥(古玉) 정작(鄭 )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학문내용, 교유관계 등을 종합해볼 때 
정북창은 유·불·도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입장에 섰던 
도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세인들의 정북창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이 점에 주목하여 
그를 삼교에 박통(博通)한 인물로 자주 표현하였다. 
한학(漢學) 사대가(四大家) 중의 일인이었던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들어보자. 
북창은 태어날 때부터 
신령스러워 널리 삼교에 통달하였는데, 
수련은 도교와 비슷하고, 
깨달음은 불교와 흡사하나, 
윤리는 우리 유교를 근본으로 하였다
北窓生而靈異 博通三敎 其修攝似道 
解悟類禪 而倫常行 誼一本吾儒
진인의 경지를 추구한 수련인...
그러나 정북창은 유불선-삼교에 널리 통달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인의 경지를 추구하였던 수련인이었다. 
그의 선도 이론은 그가 남긴 저작 
『용호비결(龍虎秘訣)』을 통해 파악해볼 수 있다. 
『용호비결』은 당시 수련인들이 
중국 도서(道書)에만 의존해, 
어렵게 공부하던 실정에서 탈피하여 
한국 선도의 입장에서 
새롭고 쉽게 쓰여진 도서로서 
정북창의 한국 선도에 대한 자부심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정북창이 소시에 중국에 갔을 때 
한 중국 도사를 만났는데, 그가 조선의 선도를 깔보자 
정북창이 청산유수로 선도 이론을 설파하여 
그를 굴복시켰다는 일화, 역시 정북창이 평소에 
한국 선도에 대해 주체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아무튼 『용호비결』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도서이자,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창작된 
최초의 도서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정북창은 이 책의 첫머리에서 
우선 단경(丹經)의 왕이라 칭하는 
『참동계(參同契)』의 난삽함을 비판하고 
초학자를 위하여 
쉽게 선도에 입문할 수 있는 수련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서 
폐기(閉氣)·태식(胎息)·주천화후(周天火候) 등 
각 수련 법식에 따른 수련의 효과, 
즉 신체적 징후 및 정신적 경지에 대해 
명쾌히 해설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도서(道書) "용호비결"
이러한 『용호비결』이 
한국 도교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매우 높다. 
우선 『용호비결』은 정북창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의 선도 수행자들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서 
정북창을 비롯한 조선의 선도 수행자들을 
단학파(丹學派)라고 불렀는데,『용호비결』은 
바로 이 조선 단학파의 교과서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용호비결』은 조선의 의학 사상, 
특히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허준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다. 
『동의보감』의 기획에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이 관계했는데, 
정북창의 막내 아우-"정작"이 유의(儒醫)로서 참여하여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하였다. 
『용호비결』에서 전개된 정기신론(精氣神論)이 
『동의보감』의 독특한 도교 의학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이 밖에도 정북창은 
각 방면에 걸친 그의 탁월한 도력으로 인하여 
후대에 이르러 점술·풍수학(風水學)의 대가, 
의술의 달인(達人) 등으로 평가되기도 하며, 
근세에는 신흥종교 측에 의해, 
말세를 예언한 도통자로서 추앙되기도 한다. 
아울러 온양 정씨 일문에서는 
정북창과 그의 종형 정초(鄭礎) 이후에도 
정작(鄭 )·정지승(鄭之升)·정회(鄭晦)·
정돈시(鄭敦始)·정두경(鄭斗卿) 등 
조선도교사상 저명한 선도 인물들이 연속 배출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정북창이 그의 일문에 미친 
사상적 영향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정북창의 대표적 저작으로는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 부록된 『용호비결』을 비롯, 
온양 정씨 문집인 『온성세고(溫城世稿)』에 실린 
45수(首)의 시와 ?가훈?이 있다. 
그의 묘소는 
생시에 그가 집안의 장지로 친히 잡아두었던 
경기도 양주군 사정동(砂井洞) 산록에 있는데, 
이 산은 온양 정씨의 선영(先塋)으로 
현재까지 6백여 년 동안 잘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남양주군에는 그가 은거, 수련했던 장소가 
지금도 "정씨골"이라는 명칭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