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실존 증명
▷ 소련 과학원 시베리아 분원의 역사언어철학연구소가 발표한 학술서적
「고조선」의주요 내용을 간단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982.11.11 경향신문에도 소개됨.)
*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뿐 아니라 만주와 요동지역을 포함하며,
만주와 요동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했다.
* 고조선은 1천년간 중국지배를 받지 않고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조선 문화의 특징은 비파형 단검 문화다.
* 중국계 기자(箕子)가 고대한국을 지배했다는 기자조선은
한(漢)대에 허위로 꾸며진 것이다.
* 한사군(漢四郡)은 현재의 한반도 밖에 존재했다.
* 고조선 지역 청동기의 시작은 기원전 2천년 후반기로,
고조선은 국가단계로서 초기 철기시대로 추정된다.
--> 이러한 내용들은 지금 우리 국사교과서의 내용과 다르며
강단 비주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가깝다.
강단 주류 사학자가 국사교과서이 내용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이 반영된 국사교과서에는 "청동기가 시작된 BC 1000년경에
와서야 국가단계로 발전했다"고 쓰여 있다.(한사군은 교과서에서 삭제되었지만
여전히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자들도 있음)
▷ 일본의 五鄕淸彦(아고 교히꼬)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中原)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벌인 것이다.
한나라의 한(漢)이라는 국호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한(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간 것에 불과하다."
▷ 대만의 사학자 서량지(徐亮之)
서량지 교수는 그의 저서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은나라, 주나라 무렵의 동이족(東夷族)의 활동범위는 중국 산동반도,
하북성(북경 등지), 발해연안, 하남성, 강소성(상해 등지), 안휘성,
호북성, 요동반도, 조선반도 등이며, 그 활동 중심지는
산동반도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중국학자 이제(李濟)는 물론, 부사년(傅斯年)도
단군 조선족(東夷)의 문화라고 인정한 용산문화(흑도문화)가
감숙성 옆의 섬서성 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충분히 입증되어지는 사실이다.
또한 홍콩대학의 임혜상 교수나 서량지(徐亮之) 는
은나라를 건설한 주인공들이 동이족이라고 밝혔다.
[고사변(古史辯)] 결국 황하문명의 주인공이 은나라이므로
황하문명 건설의 주역은 동이족인 셈이다.]
▷ 김병모 한양대 박물관장
그는 <상고사 왜곡, 그 실체와 대안>이란 글에서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대륙이 은왕조로부터 주왕조로 교체되는
정치적 혼란기인 3100년 전에 랴오닝(요녕) 반도 일대에 살고 있던
동이족의 일파가 주변의 여러 종족의 압박으로부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으로 결속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사회적 결속의 주요 계기인 제사와 전쟁에 사용한 유물이
청동검·청동방울·청동거울인데, 이는 당대 중국인들의 청동기 유물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각각 고조선식, 청동검·방울·거울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고조선식 동검이란,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비파형 동검’이라 불러온 것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 ‘고조선식 동검’을 사용하던 사회가, 오늘날의 랴오닝 반도에서
세력을 굳힌 뒤 팽창하여 송화강 유역에서
대동강·금강 유역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그 지도자가 바로 단군이라는 것이다.
▷ 단국대 윤내현(61) 교수
윤내현 교수는 그의 저서<고조선 연구>에서
중국 랴오닝성에 분포하고 있는 우하량과 홍산 등의
후기 신석기시대 유적지들이 중국 하·상·주왕조가 근거한
황허 유적지와는 다른 성격의 문화이며,
이들을 동이족의 문화에 귀속시켜 고조선과 연결짓는다.
윤 교수는 특히 이 지역에서
‘돌무지 무덤’이 함께 발굴됐음에 주목한다.
‘돌무지 무덤’은 베이징 이남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고구려의 돌무지 무덤과 연결되는
우리 겨레 고유의 무덤 양식이라는 주장이다.
우하량 유적과 홍산문화를 고조선에 연결지으면,
랴오허의 서쪽까지도 고조선의 강역에 들어간다는 주장이 된다.
▷ 단군 관련 史書, 日왕실도서관에 가득...
《 한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군조선'의 실체를 알릴 자료가
어딘가에 쌓여 있다면 우리 상고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을 것이다. 상고사에 관한 국내의 기록은
수많은 전란(戰亂)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삼국유사 등 일부 서책에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한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해
단군조선에 관한 책들을 몽땅 약탈해 태워버렸다는 설까지 있다.
해방 후 출간된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나 '제헌국회사' 등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명령에 의해
1910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말까지 1년2개월 동안
고사서 51종20여만권을 약탈했으며,
'단군조선'에 관한 서적 대부분이 이때 소실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본 궁내청 쇼료부(書陵部:일명 황실도서관)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책들이 쌓여 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 관심을 끈다.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자료에 목말라 하는 상고사 연구자들에겐
'단비'와 같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주장을 한 사람은 1962년에 사망한 박창화(朴昌和) 씨,
1933년부터 12년간 쇼료부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는 일을
담당했던 朴 씨는 해방 후 이 사실을 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
(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털어놨으며, 최근 崔 교수가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1900년초 한성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충북 영동(永同)소학교와 배제고보 등에서 역사를 가르친 朴 씨는
한국상고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쇼료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게 됐다고 한다.
崔 교수는 "내가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45년에
朴 씨를 역사교사로 채용했으며, 그 후 쇼료부에 단군조선 관련 서적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으나, 나와 전공이 무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며 "당시 朴 씨가 쇼료부에서 읽었던
단군조선 관련 서적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줬으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쇼료부 소장본들은 목록으로 정리된 것들만
접근이 가능해 朴 씨의 말이 사실이라도 확인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혹시 새로운 한·일 교류의 시대를 맞아 일본측이
쇼료부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면 몰라도.》 (중앙일보 99.12.6일자 19면)
▷ 일제(日帝) "단군 존재 인정" - 총독부시절 문헌 발견
《 일제시대 일본이 단군의 존재를 인정한 자료와 함께
단군에 대해 종합적으로 연구한 문헌 3권이 발견됐다.
서지학자 이종학(李種學·독도박물관장) 씨는 2일, 단군 존재를 인정한
이왕직(李王職)의 문서 일부(9쪽)와 단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 발행 조선사료(朝鮮史料) 3권을 공개했다.
이왕직이란 일제시대에 조선왕족의 재산 등을 관리하던 기관.
이 기관에서 1938년 발행한 제목·필자 미상의 문서 중
종묘(宗廟)의 기원 부분에 "단군은 정사(正史)에 전하지 않아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단군에 대한 기록을 사실로 본다"며
"특히 사마천의 기록과 삼국유사·동사 고기 등
많은 역사서를 참고해 볼 때
단군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조선사료 중 '단군조선(檀君朝鮮)'
'단군건국설(檀君建國說)' '기자조선(箕子朝鮮)' 편은
단군의 출생과 이동, 그리고 신화의 구체적인 내용 등을
삼국유사·동국통감·동 사강목 등 다양한 역사책을 바탕으로
총정리 해놓고 있어 일제의 단군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반영한다.
李관장은 "한반도 강점 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단군의 존재를 부정했던 일제가 발행한 문서에
단군의 존재가 인정돼 있는 것은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99.10.3일자 10면)
▷ 고조선 토기 출현 - 미송리형 토기
◎ 國內 소장가 ‘미송리型’ 7점 첫 공개/그동안 實物 없어
중앙박물관선 자료사진으로 전시/59년 北韓 평북동굴서 발굴한 것보다
완벽한 상태. 남한에서 모습을 드러내리라곤 상상도 못하던
고조선 토기들이 대거 출현해 학계는 놀라움과 함께 흥분에 싸여 있다.
그동안 국내에는 실물이 한점도 없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북한의 자료사진만을 전시하고 있던, 고조선 미송리형(美松里刑) 토기가
한 소장가에 의해 31일 7점이나 공개됐다.
경기도 의왕시에 사는 김영길(金永吉·81) 옹이, 소장한 이 유물은
그의 부친인 김봉명(金鳳明·북한에서 생사불명)씨가 일제 때
구입한 것으로 지금까지 가치를 모른 채 보관해 오다가
이날 공개한 것. 토기들이 일상에 쓰인 후 실로 3천년만에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고조선 미송리형 토기는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까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문토기로 지난 59년 3월 북한이
평북 의주군 미송리 동굴유적에서 발굴해 널리 알려졌고,
북한에서는 비파형(琵琶型) 동검(銅劍)과 함께
고조선의 표지(標識) 유물로 ‘최고의 토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토기는 북한 박물관이 소장한 토기들보다
상태가 더 온전해 놀라움을 더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토기에는
표주박의 위아래를 잘라낸 모양에 표면이 매끄럽고
고리모양의 손잡이까지 달린 전형적인 미송리형 토기 2점을 비롯,
목부분이 짧거나 바루(鉢盂) 모양의 토기 등
변형 미송리형 토기들이 5점이나 포함돼 있어
연구자들에겐 그 자태가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
정영호(鄭永鎬·교원대 박물관장) 교수는
“광복 이래 고고학계에 내린 최대의 선물”이라며
한동안 상기된 표정이었다. (중앙일보1998-04-01 1면)
◎ 모두 國寶級… 고고학 대사건-
” 學界 흥분/日帝때 北서 수집… 가치를 잘 몰라서 50년 방치
고조선 토기의 국내 출현은 근래 보기 드문 고고학적 대사건이다.
미송리형 토기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토기이기 때문.
학계가 흥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유전(趙由典)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아, 때가 되니 다 나오는구먼…”하며 반가움을 표시할 정도.
이번 유물의 등장은 ‘고조선 붐’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우리 학계의 고조선 연구는
북한과 중국의 논문 등을 바탕으로 한 간접연구에 그쳤던 게 사실.
이번 유물의 출현으로 1차자료를 근거로 한 생생한 연구가 가능해졌다.
........ (중앙일보1998-04-01 3면)
▷ 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 결과
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단군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개시는 다른 지역보다 늦지 않았으며,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는 황하(黃河)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 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날에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문화의 발전이 늦을 것으로 믿어왔다.
지금까지 확인된「청동기문화」연대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주거지 유적)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적(고인돌 무덤)에서
서기전 2500년경으로, 만주(요녕성)에서는 하가점하층문화
(夏家店下層文化)에서 서기전 241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중국 황하유역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에서는
서기전 2200년경으로,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문화는 서기전 17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문화 개시연대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근래의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한민족은 외부로부터의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거나,
"그 주체가 예·맥족(濊·貊族)이었을 것이다"는 등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한민족은 외부로부터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리고 예·맥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이다.
일제는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하여 한반도에는
청동기 유물조차 없다고 부인했다. 또한 우리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 → 연해주 → 한반도」로 이어지는「전파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도 이렇게 교육되어지고 있다.
임효재(任孝宰; 1941∼)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전 한국고고학회 회장)가 발굴한, 8천년(서기전 6천년경)된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유적(주거지 유적) 등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고유문화를 형성한 후,
전파문화를 흡수했음이 분명하다(흑요석제 석기는 백두산이 원산지임).
오산리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시베리아 신석기 유적보다
2천년이상이나 앞서는데 현재까지도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는
'한민족의 기원'은 물론, '문화전파설'은 하루 빨리 수정돼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단군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청동기문화의 전개연대를
서기전 1000년경으로 못박아 단군조선 중기나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다거나,
특히 단군조선을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분리,
이를 바탕으로 아예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까지 있었다.
현행 국사교과서를 보게 되면
·단군조선 건국:서기전(BC) 2333년·청동기 시대: 서기전 1000년 ) 1300년(?)
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철기문화의 보급연대를 단군조선 후기인
서기전 300년경으로 잡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최근 발굴된 자료들에 의하면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800년경부터였고,
서기전 300년경부터는 강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단군조선인들이 청동과 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역사상에서도 매우 이를 뿐만 아니라,
그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
단군조선은 전기와 중기의 청동기시대로부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된, 그리고 앞으로 발견될
이 기간의 청동기와 초기 철기의 유적과 유물은
모두 단군조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최고의 희귀 장신구인 '유리'가 단군조선시대인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우리나라에서 제작·사용됐음이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동아일보 1997년 4월 12일자 29면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최 주(崔 炷: 65·책임연구원) 박사팀은
1995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유리구슬에 대해 성분분석을 한 결과,
이 구슬이 서기전 5세기쯤 한반도에서 나는 납을 혼합해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리문화가 초기 철기문화와 함께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밝혔었다.
이 유리구슬은 바륨(Ba)이 섞여 있는 중국계통의 유리와는 달리
바륨이 들어있지 않는 등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이 땅에 일찍이 유리문화가 뿌리 내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성분분석 결과, 유리구슬에
산화납(pbo)이 1.7% 함유되어 있음이 증명됐는데
산화납은 낮은 온도에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유리의 내구성을 높여주는 첨가물질로,
따라서 산화납의 존재는 유리제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기전 5세기경의 유리구슬에서도
산화납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 주 박사가 "금강유역에 발달한 청동기문화는
중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실험결과로 유리 제조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되었다는「새로운 역사」를 밝혀낸 것이다.
우리나라 '국보급'원로과학자인, 최 주 박사는
특히 비파형동검이 남한의 원료를 써서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설을 뒤엎었다. 그의 지적으로
우리 교과서의 단군조선 유물인 청동기 등
고대금속유물의 기원과 성분 특성 등에 대한 수정이 이뤄지고 있다.
중앙일보 1998년 4월 1일자 1면과 3면에 보면,
국내에 한점도 없던 단군조선의 미송리형 토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 최태영 박사 - 개신교도. YMCA원로회 회장
"오늘날 개신교에서 단군을 반대하는 것은 다 무식해서 그렇다.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단군은 역사인물… 신화 아니다
최태영 박사 회고록 '인간 단군을 찾아서' 펴내...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 권두의 기이(奇異)
제1 단군을 얘기하는 항목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 (昔有桓國 석유환인)'는
'옛날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因 석유환국)'를
일본인들이 변조한 내용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법학자로서 반세기 또 상고사 연구자로서
사반세기를 꼿꼿하게 살아온 최태영(100, 학술원 회원) 박사는
최근 회고록 '인간 단군을 찾아서'(학고재)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桓因과 桓國을 둘러싸고
민족주의 사학자와 강단 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을 펴왔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증거를 내놓지 못해 논란이 계속돼 왔다.
그러나 최박사는 이번 회고록을 통해
서울대 소장본 '삼국유사'와 1902년 도쿄대가 발행한
'교정 삼국유사'를 증거물로 제시 '桓因'은 '桓國'의 잘못임을 밝혀냈다.
따라서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수록된
'삼국유사'의 '桓因(하느님)의 아들..' 부분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학계의 지루한 논쟁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최태영 박사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인용한 고기(古記)에는
'옛날에는 환국이 있었다.
그 나라에 높은 서자, 벼슬을 하는 환웅이 있었고
마지막 환웅대에 단군이 나타나 조선을 세웠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이후, 지배이념이 된 강성해진 불교의 영향으로
어떤 책들은 桓國을 불교에서 말하는 제석(帝釋) 또는
桓因으로 변조함으로써 현재 전해지는 삼국유사'의 판본에는
'昔有桓國'이 '昔有桓因'으로 변조되어 있고,
급기야 1920년대 한국사 왜곡에 나선 일본인들이
이 점을 결정적 빌미로 삼아, 이를 변조한 후
정본으로 내세워 단군을 말살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최 박사에 따르면 '桓國'이 '桓因'으로 바뀐 것은
원래 환국시대가 사실적이고 역사적인 것임에 반해
불교적이고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은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다. 왜냐하면, 불교의 부처는
단군의 고조선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후대의 존재이므로,
환국은 불교가 생기기도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연은 '삼국유사'에 고기를 인용하여
분명히 桓國이라고 역사와 종교를 구별해서 기록했다"면서
"'昔有桓國'으로 기록된 '삼국유사'에도 그 아래 주를 달아
'환국이 말하자면 제석'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았지만
주(註)는 일연 이후 후세인들이 달아 놓은 것으로
별 신빙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최박사는 최근 입수한 '조선사편수회 회의록'을 인용,
최남선도 昔有桓國이 昔有桓因으로 변조한 데 대해
일제에 항의했음을 밝히고 있다.
'... 회의록'은 "한자의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문(全文)의 해석상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크다.
'삼국유사'의 단군 고기 중에 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昔有桓因이라고, 고친 "이마니시 류"의 망필을 인용한 것이
바로 그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는 5월 2일(음 3월 28일)로 만 100세를 맞는 최태영 박사는
이번 회고록을 통해 일본 후지산 아래에 있는 지하서고에
1200년 동안 보관되어온 '미야시타(宮下) 문서: 신황기(新皇紀)'를
직접 탐방...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들을 깨우치고 천황이 됐다"는 역사적 사실도 확인했다.
이와 함께 강단파의 거주 고(故)이병도 박사가
최박사의 설득으로 식민사학을 반성하고,
'단군은 실재 인물'이라는 논지를 발표하게 된 배경도
증언하고 있어 주목된다. 최태영 박사는
"우리나라는 신시(新市) 시대는 몰라도
단군의 고조선 개국부터는 분명한 역사이지 신화가 아니다.
단군은 곰의 아들도 아니요, 하느님도 아니요,
단지 우리 조상인 자연인"이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일제가 나서서 학계를 동원하고, 군-관이 합작해
신라가 한국사의 시작이라며,
일본에 없는 수천년의 한국고대사와 단군조선을
미신으로 돌려 잘라 버리고,
일본 고대사는 엿가락처럼 늘렸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4월 24일자 - 노정용 기자)
고조선이 실존했다는 것은 국사광복회 최재인 회장 등
재야사학자는 물론이고 신용하(서울대)·윤내현(단국대)교수 등
강단의 비주류학자나 노태돈(서울대)·이만열(숙명여대)교수 등
강단의 주류사학자들까지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다만 고조선의 국가성립시기가
BC 2333년이냐 BC 10세기냐.?
고조선 중심지는 ‘요하’냐 ‘평양’이냐?
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나, 안에 있었나? 등의
쟁점에 대해 통일된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삼국유사의 신화적 서술만을 문제삼아
단군을 실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단국대 윤내현 교수는
"이런 시각은 신화가 역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피상적 분석"이라고 지적한다.
윤 교수는 "단군신화는 고조선이 건국되기까지
우리 민족이 성장한 과정을 신화란 형식을 빌려 말해주는
역사적 자료이며, 따라서 단군사화(史話)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늘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부족(환웅)이
곰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부족(웅녀)과 연맹을 맺고
그 연맹이 강성해져 고조선을 세웠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며 "환웅과 웅녀의 결혼은
후기 신석기 시대 여러 마을이 연맹을 맺었던
고을나라 시대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주간조선 1999.10.28 /1575호)
강단의 주류학자에 속하는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조차도
"단군을 볼 때, '역사적 실체'와 '역사인식'을 혼돈하는 데서
단군 논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학계에서는 단군을 고유명사가 아닌 고조선 군장의 칭호
즉, 왕이란 뜻의 일반명사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라며
"고조선이 역사의 실체인 이상, 그 나라의 군장으로서
단군이 존재했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단군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일부의 시각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벌어진 단군상 훼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종교적 상징이 아닌 민족적 상징으로서 세운
단군상을 훼손한 것은 유감스런 사태다.
현대는 종교 다원주의 사회다. 다른 종교에 대해 포용적이고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더구나 신앙의 대상이 아닌 민족의 상징에 대해
지나친 거부반응을 낼 필요는 없다.
" 필자가 보기에 그는 기독교인들은 의식한,
아주 몸을 사린, 조심스럽고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다.
고조선이 실존했다면
그 고조선을 통치하는 통치자가 존재했을 것이고
그 통치자의 칭호가 "단군" 오늘날로 치자면 "대통령"인 것인데,
그러한 단군을 신화라 하며,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로
간주하는 것은 단군조선사 2,000여 년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 없으니
조선왕조 500년을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매국노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약 기독교인들이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동상은
우상이라서 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려면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세종대왕, 이순신 동상 등도
다 때려 부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국조 단군보다 절을 더 많이 받고 있는 분들이
전국 도처에 널려 있다. 국조 단군이야 단군교니, 대종교 빼고는
누가 그 앞에서 절을 하고 있나?
오히려 현충사에 계시는 이순신 장군동상이
절을 받았으면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니
그 동상을 한 번 부숴 보라!
왜, 그 동상들은 손도 까닥 못하면서
단군의 동상만 부수는가?
한마디로 만만하기 때문이다.
지키려면 철저하게 지키든지 말려면 말든지 ......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는 자들이 ........
단군동상을 훼손한 자들이 구속을 당하고 실형을 선고받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용서를 비는 꼴이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다.
그렇게 나약한 신념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과연,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있는지 살펴보자...!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레위기26:1]
목상은 십자가 상이며, 주상은 예수의 상이다.
석상은 마리아 상이니 성서는 오늘에 일어날 일을
너무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책이다.
이사야서45장20절에는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니라."라고 쓰여 있다.
2천 년 전에 죽은,
다시 말해,,, 자신도 제대로 구원하지 못한 예수에게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의 목에는 나무십자가가 걸려있다.
십계명의 제2계명에도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고 하지 않았는가?
십자가는 로마시대에 살인범이나 강도, 범법자,
국가시해사범 등을 벌주기 위해 나무로 만들었던 사형틀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러한 저주의 사형틀을 목에 걸고 다니며
집안에 걸어 놓기도 하고, 교회 지붕 꼭대기에 세워 놓고
바라보며 기도하고 우상숭배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예수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이라고 쓴
나무 십자가를 들고 다니며, 전철이나 공원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떠들고 다니는 광신자들이 많다.
개신교인들은 천주교인더러
우상숭배 운운하며 욕할 입장이 못된다.
그들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십보 백보일 뿐이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신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구실 삼아 우리 민족 국조의 목을 자르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의 무지와 반민족적 성향은
널리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 족보나 역사를 줄줄 외울 줄은 알아도,
외침에 의해,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고 잘려진
우리 민족사의 신음소리가 안중에나 있을 것인가?
그들은 단국대 사학과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일지사)나
서희건 현 조선일보 80년사사(社史) 편찬실장이〈주간조선〉에
1985년 10월 20일자부터 1986년 10월 26일자까지
총 51회에 걸쳐 '특별기획'으로 연재한「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
[(그 뒤 책으로 나옴-≪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전3권, 고려원)] 등의
서적이 있다는 것은 알지도 못할뿐더러,
설령 있다는 것을 알아도
<성경>을 한 번이라도 더 읽으면 더 읽었지
우리민족의 역사서를 한 번이라도 읽어 봤겠는가?
황사영이 한 짓(백서 사건)을 보면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들에게는 민족보다 전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들이 집안에 걸어놓고 있는 예수의 초상화도
넓게 보면 우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초상화를 누군가가 훼손한다면, 기분 좋겠는가?
참으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자기네 우물 안 세상만 진리고,
우물 밖은 다 거짓 세상이란 말인가?
자기네 상(像)은 우상(偶像)이 아니고,
남의 상(像)은 우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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