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平安道 남쪽으로 黃河의 中流가 흐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浿水이다.
현재 한반도에 흐르고 있는 압록강(鴨綠江)이나,
大同江은 모두 西海 바다로 흐르고 있다.
여기서 浿水를 살펴보기로 한다.
수경주소(水經注疏) 1298쪽 浿水편을 보기로 한다.
本文이 4쪽이나 되기 때문에 필자가 요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昔燕人衛滿, 自浿水西至朝鮮, 朝鮮, 故箕子國也, 滿乃王之, 都王險城,
地方數千里,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基地今高句麗之國治, 朝鮮王滿都也, 王險城浿水之東, 平壤城卽王險城,
古朝鮮也, 玄?郡高句麗縣, 西蓋馬縣, 馬?水, 馬?水, 近代謂之鴨綠江.
옛날 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스스로 패수(浿水)의 서쪽으로 朝鮮에 이르렀다.
朝鮮은 옛 기자(箕子)의 나라이다. 왕만은 이내 王이 되었다.
都邑은 왕험성(王儉城)이다. 地方은 수천 리이다.
그 손자(孫子)는 우거(右渠)이며,
漢나라 무제(武帝 BC.140 ~135年)이다.
원봉(元.BC.110~105年) 2년부터 浿水라는 것은
東으로 흐르고 있기에
浿水를 건널 수 없는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그 땅은 지금 高句麗國이 다스렸다.
그곳은 朝鮮王滿이 都邑했던 것이다.
현도군(玄?郡)은 高句麗의 현(縣:고을) 이다.
서쪽에 있는 개마현(蓋馬縣)에서 마자수(馬?水)이며,
마자수는 근대에 와서 설명하기를 압록강(鴨綠江)이라 했다.
本文에서 보다시피 연(燕)나라 위만은
패수(浿水) 서쪽을 지나 朝鮮에 이르렀다.
옛날 箕子 나라에서 만(滿)은 王이며,
도읍(都邑)은 왕험성(王儉城)이다.
그 지역은 수천 리이고 만(滿)의 손자는 우거(右渠)라고 적고 있다.
浿水는 東으로 흐르고 그 땅은 지금까지 高句麗가 다스려왔다.
왕검성(王儉城)에서 동으로 흐르는 것이 패수(浿水)이다.
平壤城은 즉 왕검성(王儉城)이며 古朝鮮이다.
서쪽 개마현(蓋馬縣)에서 마자수(馬?水)가 흐르고,
마자수는 현재까지 설명한다면 압록강(鴨綠江)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中國古今地名大辭典727쪽 浿水편을 本文을 싣지 않고 소개하기로 한다.
漢나라 魏나라 때에는 浿水이다.
지금까지 압록강(鴨綠江)이다.
史記 朝鮮傳에서 처음부터 연(燕)나라 전성시대 때
진번(眞番)에 속해 있었다.
朝鮮. 그리고 漢나라가 흥할 때
그곳은 멀어 지키기가 어려웠다.
옛날부터 막혀있던 요동(遼東)을 다시 수리하여
浿水의 경계에 이르게 했다.
隋나라 唐나라 時代 때의 浿水이다.
작금에 이르기까지 朝鮮 平安道의 大同江이다.
隋書 高句麗傳에는, 都邑은 平壤城이며
남쪽에 임해 있는 것이 浿水이다.
옛날 百濟國의 북쪽에 浿水이며,
혹은 예성강(禮成江)이며
혹은 임진강(臨津江)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浿水에 대하여 정리해 보기로 한다.
水經注疏와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나타난 浿水는
古朝鮮 때 왕검성(王儉城)인 平壤城 서쪽
마자수(馬?水)에서 시작된 것으로 되어있다.
즉 마자수가 압록강(鴨綠江)이며
高句麗가 都邑한 玄?郡에서 浿水가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高句麗가 있던 玄?郡에 平壤城이 있고
平壤城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浿水라고 적고 있다.
고로 浿水는 지금의 西安에서
河南省 洛陽으로 黃河 中流가 浿水이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서
지금의 朝鮮의 平安道 大同江이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 필자가 조사해 그린 大陸의 古朝鮮 八道의 지도
필자가 조사해 그린 大陸의 古朝鮮 八道의 지도를 보면
平安道 남쪽으로 黃河의 中流가 흐르고 있는데 바로 浿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한반도에 흐르고 있는 압록강(鴨綠江)이나 大同江은
모두 西海 바다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正史에서 보듯이
마자수(馬?水)의 鴨綠江이나 浿水는
모두 東으로 흐르는 것을 지도에서 볼 수 있다.
특히 浿水를 일명 禮成江 또는 臨津江,
그리고 大同江이라했다고 되어있다.
그 이유는 古代 史學者들이
浿水를, 禮를 이루었다는 뜻으로 禮成江이라 했고,
江에는 수백 수천의 나루가 있어
물물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臨津江이라 했으며,
기선 수백 척이 왕래할 수 있었기에 大同江,
즉 큰 강이라는 뜻으로 불려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진다.
高句麗와 百濟가 浿河
즉 浿水의 강 언덕에서 전쟁을 했다는 기록도 있고,
또한 唐나라가 高句麗를 정복하기 위해
무협(巫峽:양자강 상류)에서 수백 척의 전함을 만들어
黃河로 들어가 浿水를 거쳐 西安
즉, 高句麗가 있던 平壤城으로 江을 타고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소개글>
1,700여년 전, 당시... 고대 한국 국가들의 영토확장, 타지정벌 및 진출로
한글 지명
영문 지명
부여가 완전히 고구려로 통합되기 전까지
부여는 오늘날의 러시아 땅 중남부에서
그 세력이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쓸만한 땅은 그 당시,
한창 약탈경제에 의존하던 고구려에 의해
모두 빼앗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로 인해서 만주일대에서 존재하던
왕국 및 부족국가들이 얼마나 많이 사라지거나
고구려로 병합, 식민통치를 받았는지 모르나
고구려의 지배정책은 굉장히 포용적인 것으로
"현지인 등용"체제를 도입하여
피지배민들에게 환영받는 식민통치 제도를 실시하였다.
고구려가 영토확장을 위해 타국을 침공하여
그들에게 항복을 요구할 경우,
이러한 고구려의 정치체제에 순응하는 한,
고구려에 먹힌 국가유민들은
비록 피지배민(노예, 종, 하급 관리) 신분이지만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었고
고구려가 방위를 책임졌기에
고구려를 제외한 외세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국가들의 말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고구려군의 창칼 아래
모두 무참히 쓰러져 죽어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라진 국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렇게 만주일대와 중국 서부, 몽골 일대를 장악한 고구려는
대륙에서 쓸만한 땅은 모두 손에 넣었으니
이제는 고구려 주변의 모든 바다를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구려인들과 같은 민족이 세운 나라인 신라와
가야가 자리잡은 한반도 남부에
때로는 침공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무역하러 오기도 하는
왜인(일본인)들의 열도를 정벌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고구려군은 대규모 수군을 파견하고
함선 한척 한척마다 중장기병과 개마무사단, 보병 이외에
추가로 투석기와 궁수부대를 배치시켰는데,
이것은 왜열도에 상륙하기 전에
그들이 반격해올 것을 염두에 두고
바다에서 먼저 육지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문명이 미개했던 왜인들은
"수탉을 무찌르자"며 반수탉 결사대를 조직해
열심히 고구려군들의 침공에 대항하였지만
끝내 고구려가 노린 북부의 열도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고구려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왜인들은
왜열도 중남부의 자치구로 이주하여 살았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이 침공해오기 전부터
왜열도의 중북부와 중부, 남부는
거의 다 백제의 지배하 아래 있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왜열도에 식민지를 개척한 국가는 백제였다.
백제의 경우,
왜인들에게 선진문화를 전파해주겠다는 구실로
국방을 해지할 것을 요구했다.
손쉽게 "문화 전파"를 명분으로 파견한
백제 수군이 손쉽게 왜열도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게하기 위한 계략이었는데
왜인들은 순진하여 백제에게 꼼짝없이 속아
이미 땅의 반을 빼앗겨 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일본의 대부분을 식민통치하게 된 백제는
상당히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펼쳤다.
백제인만이 고관직에 올라 한 지역의 태수나 영주가 되어
왜인들을 지배하기는 했지만,
대륙백제와 한반도 백제의 수많은 백제인들을
왜로 불러와 왜인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 과정에서 백제인들과 왜인들은
공통점을 늘려가며
지배민과 피지배민이라는 관계에서 벗어나
함께 어우러져 사는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고
그러면서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전해졌다.
일본의 왜인들의 군사력이 강해진 것도
백제군에 징병되어 훈련받고 배우게 되면서부터인데
일본의 사무라이, 칼잡이들은
백제의 싸울아비와
무사(백제말로 "부샤",
후에 일본인들이 자국어로 순화시켜 부시라고 한다)들로 부터
백제인들의 뛰어난 검술과 검제조술을 전수받은 것이다.
하지만 초창기부터 백제가 왜인들에게 온건적이고
자율적인 평화정책을 허락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항하는 왜인들을 상대로, 백제인들은
고구려인들보다 한 수 더 잔혹하고
무서운 군사력으로 베어나가며 살육했던 것이다.
왜열도 지배권을 놓고 싸우면서
초창기에 백제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흉폭하게 탄압하는지를 보고
고구려인들이 질려하며
백제를 오죽하면 "백잔"이라고 불렀겠는가..!
이로 인해, 일본 열도의 지배권을 독점하기 위해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싸움이 매우 잦아졌는데
이 틈을 노린 신라 또한 해상권 장악을 목표삼아
우산국, 독도, 그리고 왜열도의 중남부 반도 몇 곳을 찬탈했다.
이렇게 삼국이 대륙에만 영토확장을 하지않고
섬나라도 하나씩 점령하고 있을 즈음,
한반도 중남부에서, 백제와 신라 양국의 간섭과
침략에 자주 시달리던 가야국은
자신들과 마찬가지 상황에 있는 "형제국"인 왜와 손잡고
그나마 아직 빼앗기지 않은 땅을 함께 지키기로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또다른 "가야연맹"이다.
출처: "삼국기" -고무영- (북한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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