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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

Demian-(無碍) 2012. 5. 10. 22:15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 



곡차를 좋아했던, 진묵대사 (震默大師)   


진묵(震默1562∼1633) 대사가 하루는 길을 가다가 
강변에서 천렵놀이를 즐기고 있는 젊은이
들을 만났다. 
그때 그들은 방금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이고 있었다. 
대사가 펄펄 끓는 
솥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생기발랄하게 헤엄쳐 다니던 물고기들이 
아무 죄 없이 가마솥에서 삶겨져 죽는 괴로움을 당
하는구나."
그 말을 듣고 한 젊은이가 대사에게 시비조로 농담을 걸었다.
"시님(스님), 시님도 이 괴기국 맛 좀 보실랑가라우?"
대사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나야 고기국도 주면 잘 먹지."
"그럼 한 번 자셔보시더라구요. 몽땅 드릴랑게요"
그러자 대사는 그릇에 떠서 담고 어쩌고 할 것도 없이 
뜨거운 솥을 번쩍 들더니 그대로 입
에다 대고 
한꺼번에 죄다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젊은이들이 기겁하도록 놀랐다.

 

잠시 뒤에 한 청년이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물었다.
"오메, 징한 것! 부처님께서 살생을 금하셨는디 
시님은 괴기국을 잘도 잡수시는구만이라! 
그라고도 시님이라 할 수 있을까라우?"


대사가 그런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 고기들을 잡고 죽인 것은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지만 

나에게는 이 고기들을 살릴 재주가 있느니라."
그리고는 저만큼 하류 쪽으로 내려가더니 

바지를 훌렁 벗은 뒤 강물에 엉덩이를 대놓고 

태연히대변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신기한 일이 다 있는가. 

스님의 항문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대변이 아니라 

방금 먹은 매운탕인데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물고기들이 

냇물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꼬리를 휘젓거니 

비늘을 번쩍이거니 하며 언제 죽었었느냐는 듯이 

생기 차게 헤엄쳐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대사가 고기들이 마치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고 하는 듯이 이렇게 일렀다.
"물고기들아, 이제부터는 멀리 큰물로 가서 노닐되 

앞으로는 미끼를 탐내다가 다시는 가마솥에삶기는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려므나."
그때서야 이 스님이 여간 법력이 높은 도승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젊은이들이 

앞 다투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옛날의 득도한 고승들이 사소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민중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듯이 진묵 대사도 도통한 데다가 

풍류를 즐길 줄 알았으며, 특히 술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술이라고하면 먹지 않았고 

꼭 '곡차(穀茶)'라고 해야만 마셨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진묵 대사가 어느 날 산길을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향기로운 곡차 냄새가 풍겨왔다. 
대사의 발길
이 자신도 모르게 술 아닌 곡차 냄새를 따라갔다. 
그곳은 어느 조그만 암자였고, 
그 암자의 중
이 무슨 일에 쓰기 위해서였는지 술을 거르고 있었다. 
대사가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하는고?"  그 중이 힐끔 돌아보더니 대꾸했다.
"보면 몰라라우? 술을 거르고 있당게요."

곡차라고 해야 한 잔 얻어 마시겠는데 

술이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어서 대사는 입맛만 쩍쩍 다시며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잘 익은 곡차 냄새가 계속 따라오며 

발길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다시 암자를 찾아가 또 물었다.


"그대는 지금 무엇을 거르고 있는고?" 
그러자 그 젊은 중이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
아, 술을 거른당께로! 늙은 중이 귀가 먹어부렀능가? 
귀찮게 똑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물어본
당게요 잉?"

이 녀석은 구제불능이구나! 
대사는 별 수 없이 곡차 한 잔의 희망도 미련도 버린 채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금강역사가 나타나더니, 철추로 그 중의 
뒷머리를 내리쳤다고 전한다.

 

전주·완주·김제·부안 곳곳에는 

지금도 진묵 대사에 얽힌 이 같은 수많은 전설이 살아 전한다. 

서민 속의 고승-진묵 대사는 명종 17년(1562)에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 오늘의 전북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서 태어났다. 

생전에는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니 '소석가'라고 불리며 

많은 전설을 남긴 진묵 대사였지만 

어머니가 조의부인(調意夫人)이라는 사실 외에는 

속성과 속명이 무엇인지,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대사의 법명은 일옥(一玉)이요, 진묵은 당호라고 하는데, 

어쩌면 일옥이 속명이고 진묵이 법명인데 

잘못 알려진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머니 조의부인만 해도 '조의'가 성인지 이름인지, 
또는 다른 무엇을 뜻하는지 알 도리가 없
다. 
진묵 대사의 행적을 전해주는 기록으로는 
초의(草衣) 선사의『진묵조사유적고』등이 있다. 

진묵 대사는 7세에 출가하여 봉서사에서 사미승이 되었다. 

봉서사는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산 2번지 서방산 남쪽 기슭에 있다. 

봉서사는 신라 성덕왕 25년(726)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나옹(懶翁) 화상이 중건했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건물들이 완전히 소실, 

폐허가 되어버린 것을 서남수 스님이 1963년 10월부터 재건을 시작하여 

이듬해 10월에 요사채를 세우고, 1975년 10월에는 삼성각을, 

1979년 3월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진묵전을 완공해 오늘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재 봉서사(성모암)에는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된 

진묵 조사 부도와, 1982년 10월에 건립한 진묵 대사 유적비가 있고, 

진묵당에는 진묵 대사와 그의 어머니 조의부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경내를 소개해주며 서남수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신기했다. 
해마다 음력 10월 28일은 대사의 입적일인데 
이 날 대사의 부도 앞에 곡차(술)를 올리면 
어느새 잔 속의 술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6·25전란 통에 깨어지고 흩어진 것을 조각조각 찾아 
본 모습대로 복원한 부도가 해
마다 몇 ㎝씩 '살이 찐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들었다.

일곱 살 때 봉서사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된 진묵은 

나이는 어리지만 워낙 천성이 영민한지라 

승이 없이도 여러 가지 불경을 읽고 스스로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한 번은 절에서 불사가 있었는데 

주지 스님이 진묵 대사가 나이는 어리지만 

행실이 바르고 깨끗하다고 하여 옹호단(擁護壇)에 향 피우는 소임을 맡겼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에 주지의 꿈에 한 신장(神將)이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짖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가 부처님을 지키는 천신이거늘 
오히려 부처님의 예를 받다니, 이처럼 송구한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주지는 급히 향 피우는 소임을 바꾸어 우리로 하여금 
감히 부처님의 예를
받지 않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편히 지내게 할지어다!"
깜짝 놀라 깨어난 주지가 이내 진묵을 불러 향 피우는 소임을 
다른 사미에게 맡기도록 하였는데
생각할수록 신기하였다. 
그렇다면 저 보잘것없는 소사미 녀석이 바로 석가모니불의 화신이란 말
인가. 
생각할수록 주지는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이 일화는 바로 초의 선사의 『진묵조사유적고』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요, 두 번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대사가 아직도 봉서사의 사미승으로 있을 때에 
한 번은 창원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이때 어느
마을의 어린 처녀가 
스님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으나 사랑을 이룰 수가 없었으므로 끝내 죽고
말았다. 
그 처녀는 뒤에 사내아이로 환생하여, 이름을 기춘(奇春)이라 하였으며, 
대원사(大元寺)
의 시동이 되어 마침내 진묵 대사를 모시게 되었다. 
대사는 그를 매우 귀여워하고 아꼈다. 

다른 중들이 이를 시기하기에 
하루는 대사가 국수를 삶게 한 뒤에 중들에게 
모두 바리때를 내놓
게 했다. 그리고 시자를 시켜 
바리때마다 가운데에 바늘 하나씩을 꽂게 하였다. 
"자 다들 먹자
꾸나." 하고 대사는 바리때를 들었는데 
그 속에는 국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대사는 맛있게 국
수를 먹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른 중들의 바리때에는 
바늘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고 한
다.

 

웬만한 계율은 뛰어넘어 서민 속에서 애환을 함께 하며 

그들을 깨우침의 길로 인도한 것이 진묵대사의 독특한 포교방식이었으니 

이는 원효성사의 민중불교와 다를 바가 거의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승려들 가운데는 그의 파격적인 면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배척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진묵 대사는 대원사를 비롯하여 

부설 거사가 신라 때에 창건한 월명암도 재건하고 

오래 주석했으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월명암에 있을 적에 하루는 중들이 모두 탁발을 나가서 

대사가 시자만 데리고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자마저 제사를 지내러 마을에 있는 집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시자가 공양 준비를 모두 해놓고 "때가 되면 찾아 드십시오" 하고 암자를 떠났다. 

그때 대사는 방장 안에서 문을 열고 『능엄경』을 읽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시자가 돌아와 보니 음식은 손도 안 댄 채 그대로 있었고 

대사도 어제 떠날 때 그 모습대로 앉아서 경문을 읽고 있는데 바람에 

문짝이 닫혀 손가락이 상해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능엄삼매경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시자가 문안을 여쭙자 대사가 말하기를

 "너는 제사도 지내지 않고 그냥 돌아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진묵 대사는 대원사·월명암·원등암 등에서 수행하다가 
만년에는 봉서사로 돌아와 입적할 때까
지 지냈다. 
하루는 대사가 물을 찾아서 시자가 미지근한 쌀뜨물을 가져다 드리니 
그것을 받아 두어 모금 입
에 머금더니 동쪽을 향해 내뿜는 것이었다. 
뒤에 들으니 합천 해인사에 불이 나서 귀중한 팔만
대장경을 포함하여 
절이 온통 타버릴 지경에 처했는데, 갑자기 서쪽으로부터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져 그 불을 껐다고 하는 바, 
그 소나기가 내릴 때가 바로 대사가 물을 뿜을 때였다고 한다.

 

또 그는 어머니 조의부인이 늙어 거동을 못하자 

자신이 머무는 암자 부근 마을에 모셔두고 

극진히 봉양하다가 돌아가시자 제문을 지어 지극한 추모의 정을 다했으니, 

한 번 출가를 하면 집도부모도 돌보지 않았던 다른 스님들과는 

확실히 달랐던 인간적인 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세월은 흘러 진묵 대사도 이승살이의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하루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주장자를 짚고 절 밖으로 나가 
개울가를 거닐다가 주장자를 세
운 채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했다.

 "잘 보거라. 저것이 바로 석가모니불의 그림자이니라." 

그러자 말뜻을 못 알아들은 시자가 

"아니지라우, 저건 시님의 그림자가 아니랑가요?" 했다. 

대사가 일렀다.

"무식한 녀석! 너는 다만 화상의 가짜 그림자만 알았지 

석가모니불의 참모습은 알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절로 돌아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결가부좌한 채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나는 이제 가겠으니, 

너희들은 물을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물어보아라."

제자들이 묻기를 "대사님께서 입적하시면 백년 뒤에는 

종승(宗乘 : 법맥)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했다.

대사가 한동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종승은 무슨 종승이 있겠느냐." 
그래도 제자들이 거듭 묻자, 마지못해 대답하기를
"명리승(名利僧)이지만, 그래도 정 노장(靜老長)에게 붙여 두어라." 했으니 
정 노장은 곧 서산휴정(西
山休靜) 대사를 가리킴이다.

어떤 기록에는 진묵 대사가 서산 대사의 법제자로 되어 있는데 
이는 진묵 대사가 법통이니 법
맥이니 하는 것을 따지는 중들은 
대체로 명리를 추구하는 승려라고 비판한 것을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고 나서 대사는 조용히 입적하니 

인조 11년(1633) 음력 10월 28일이었다. 

서민과 더불어 애환을 함께 했고 서민의 존경을 받으며 

서민불교의 새날을 밝혀온 성자

-진묵 대사의 그때 법랍은 52년, 세수는 72세였다.

 

    주(酒)---쌀과 누룩으로 만들었으니 곡차가 아닌가...? 
    세속인은 취하기 위해 마시니 술이겠지만 
    나는 그 것을 마시면 피로도 기분도

    상쾌해지니 그저 곡차 인것이다.....

    진묵대사님은 계율에 매이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고 

    술을 유달리 좋아했다,

    곡차(穀茶)라는 말도 진묵스님 한테서 유래했습니다.

     

    어느 날, 진묵 대사는 

    곡차를 동이째 마시고 다음과같은 웅대하고 멋있는 게송을 남겼습니다.

     

    천금지석산위침(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을 이불,땅을 자리,산을 베개 삼고. 

    월촉운병해작준(月燭雲屛海作樽) 달은 등불이요,구름은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 삼아. 

    대취거연잉기무(大醉居然仍起無)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서 춤울추니. 

    각혐장수괘곤륜(却嫌長袖掛崑崙)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하노라.

     

    곡차가 그러하듯이 

    굴을 달리 부르는 석화(石花)라는 말도 

    진묵 대사로부터 유래됐다고합니다.  

    대사가 바닷가에서 굴을캐 먹는데 지나가던 사람

    "왜, 스님이 육식을 하느냐" 며 시비를 걸자 

    " 이것이은 고기가 아니라 석화" 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진묵대사는 속가 사람처럼 술울 좋아하고 

    비린내 나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행동을 보였지만 

    가부좌를 틀고 앉으면, 시공을 초월하는 삼매에 빠졌다고 합니다. 

     

    (無所亭) http://blog.daum.net/hanvak/?t__nil_login=my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