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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신화>무산신녀(巫山神女)의 전설 속의 사랑

Demian-(無碍) 2011. 12. 23. 15:01

 

                                                                       무산신녀도(巫山神女圖)

 

<소개글>고전 신화

무산신녀(巫山神女)의 전설 속의 사랑
 


고대중국 신화에서는 염제가 있었다. 
염제는 황제와 끈질기게 주도권 다툼을 벌인다. 
결국엔 황제에게 패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때가 신석기시대 였다. 
이로서 중국에선 황제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어 오늘까지 이어져내려온다. 
중국에선 왕조를 세우면 모두가 황제자리에 올랐던것이다.

비록 황제에게 패했지만 강력한 라이벌 이었던 
염제의 자식들 중에는 유명한 신(神)들이 많았다.
불의 신 "축융",물의 신 "공공", 땅의 신 "후토", 시간의 신 "열명" 등이 
염제의 후손이다.

염제는 아들 외에 딸 4명을 두었는데 
이름은 소녀, 적제녀, 요희, 여화 였다.

소녀는 적송자라는 신선을 따라 도를 닦았다. 
후에 그녀는 황제와 예기를 엮은 책이 한의학의 기본서인 [황제내경] 이다

적제녀는 뽕나무 신이 되어 살다가 하늘로 승천했다.

요희는 무산의 신녀가 되어 초회왕과 사랑에 빠진다.

여화는 생전에 창세신화 속의 인물이었지만, 
다시 염제의 딸로 태어났다가 동해를 건너다 빠져죽은 후 새(神鳥)로 변신한다.

이들 중, 세째 딸 요희는 후대에 내려오면서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은 신비스런 여인이 된다.
그녀가 무산의 신녀가 된 이야기는 너무 로맨틱한데 
그녀는 시집도 가기 전에 요절했다. 

그녀가 죽어 묻힌곳은 양자강 중류에 있는 명산 "무산" 이라고 하는데, 
후에 그녀는 "요초"라는 꽃으로 재환생 하는데 
잎이 겹으로 나고 노란꽃을 피운다 
열매는 한방에서 강정제로 쓰이기도 했다한다. 
이 열매를 먹으면, 누구나 사랑을 하게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시대에 요희는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 내는데 
전국시대말기 초회왕은 무산에 놀러왔다가 고당관이라는 누대에서 
잠시 잠이들어 꿈을 꾸게되는데 
꿈속에서 무산의 신녀 "요희"를 만나 사랑을 하게된다. 

얼마 후, 헤어질 시간이 되자 초회왕이 무척 아쉬워하자
무산신녀는 "저는 아침에는 산봉우리에 구름이 되어 걸려있다가 
저녁이면 산기슭에 비가 되어 내리는데, 그게 바로 저입니다" 
그렇게 말하곤 홀연히 회왕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린다.

눈을 뜨자 꿈속의 일이 었던것이다. 
초회왕은 그녀의 안타까운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그녀의 추억을 기념하여 무산의 남쪽에 조운관(朝雲觀)을 지었다 
여기서 조운(朝雲)은 무산신녀 요희가 꿈속에서 한말을 기억해서 
그녀를 지칭한 것이다.

초회왕이 죽은 뒤, 아들 초양왕이 무산으로 놀러와 조운관을 둘러보던 중 
궁정시인 "송옥"이 아버지 초회왕 과 무산신녀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자 
아버지 초회왕의 기이한 사랑이야기에 감탄해 송옥으로 하여금 시를 짓게 했는데 
그게 송옥의 [고당부][선녀부] 이다.

[선녀부]에선 무산신녀 요희가 천하제일 미녀로 그려져 있으며 
후세에 남녀의 정을 통하는게 "운우지정"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바로 초회왕과 무산신녀의 사랑에서 나온 말이다.

후대에 송대의 유명한 시인 "소동파"는 
자신의 어린애첩 이름을 조운 이라고 지을 정도로 
시인들에게 무산신녀 요희는 사랑을 받았다.

요희의 아버지 염제는 황제에게 패해서 남쪽으로 쫓겨갔지만 
동쪽과 남쪽의 이민족들에겐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월남의 개국신화에서는 개국신화로 나오고 
고구려 고분에서도 염제가 등장한걸보니 
농경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해야할까.

고고학적으로 볼때는 황제와 염제의 두부족간의 패권다툼은 
신석기시대초기부터 남방족과 동이족이 중국문명의 원형을 이루는데 
한 축을 담당한것은 분명하다. 비록 상서를 비롯한 중국의 고문헌은 
모두 황제로 부터 중국문명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해 놓았지만
황제라는 말은 삼황오제의 두번째와 마지막글을 따와서 붙인것으로 
[서경]에선 삼황은 천황.지황.인황. 이며, 오제는 황제.전욱.제곡.요.순을 든다 

삼황오제 모두 앙소문화시대에 부족사회 족장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황제는 도구를 잘만들고 싸움을 잘했다고 전해오는데 
주변의 여러부족을 제압하고 부족장중에서도 가장 으뜸이었기에 
아마도 사마천은 오제중에서 황제를 한족의 조상으로 떠받들어 싶어서 
그를 중국의 시조로 삼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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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컴 합성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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