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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지와 보지의 어원..../ 백사-이항복과 퇴계-이황의 일화

Demian-(無碍) 2012. 8. 2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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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이황 초상화



자지와 보지의 어원.


<백사-이항복과 퇴계-이황의 일화> 

선조 임금은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 은거해 있던 퇴계 이황을 다시 불렀다. 

이 유명한 지식인이 입궐할 무렵, 

궁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많은 관리들이 

성리학에 대해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남문 밖의 한적한 곳으로 모셨다. 

퇴계에게 수많은 현학적인 질문이 쏟아질 때였다. 

얼굴이 희고 뺨이 붉은 소년 하나가 다가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는 말했다.

“듣자 하니 선생께서는 독서를 많이 하셔서 

모르시는 바가 없다고 하시기에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여쭤보고자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아무쪼록 배우고 싶은 마음을 물리치지 말아주소서.” 

퇴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대가 알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 우리 말에 여자의 아래에 있는 소문(小門)을 "보지"라 하고 

남자의 양경(陽莖)을 "자지"라 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까...???”

곁에 있던 백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퇴계는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고는 

자세를 바로한 뒤에 천천히 대답을 했다.

“여자의 소문(小門)은 

걸어다닐 때, 감추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보장지(步藏之)’라고 하는데, 발음하기 쉽도록 

감출 장(藏)이 빠지고 "보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양경(陽莖)은 

앉아 있을 때, 감추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좌장지(坐藏之)’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좌지"가 되고 다시 자지로 된 것입니다.”

“예.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하나 더 묻겠습니다.

여자의 보지를 "씹"이라 하고 

남자의 자지를 "좆"이라고 하는 건 

또 무슨 까닭입니까?”

몇몇 관리들은 낯뜨거운 질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 자리를 뜨고 

몇몇은 소년에게로 다가가 그를 끌어내려 했다. 

그러자 퇴계는 손을 저어 제지하더니,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을 이었다.

“여자는 음기를 지녀서 

축축할 습(濕) 자의 발음을 따라, ‘습’이라 한 것인데, 

우리 말은 된소리를 내는 것이 많아서 "씁"이 되고 

다시 편하게 말하느라 "씹"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양기를 지녀 

마를 조(燥)의 발음을 따 ‘조’라고 한 것인데 

이것, 역시 발음의 뒤를 세워 강조하느라 "좆"이 된 것입니다.”

소년은 그제서야 고개를 다시 숙인 뒤 물러나며 말했다. 

“예. 말씀을 들으니 이치를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때 소년의 거동을 살피던 벼슬아치들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뉘 집 자식인지는 모르나, 어린 아이가 어른들 앞에서 

저런 무엄하고 천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보니 

필경 버린 자식-호로자식임에 틀림없을 거외다.”

그러자 퇴계는 결연하고 묵직한 음성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단정을 하십니까? 

세상의 학문이란 

가장 근본적이고 가까이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 

"자지"와 "보지"를 몸의 일부분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고 

당연히 그것의 명칭에 대해 궁금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을 어찌 상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음"과 "양"이 서로 비속한 마음과 어지러운 관계로 

서로 합하여 세상의 윤리와 기강을 흔들어놓는 거기에서 

천박하고 상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까닭은 

자칫 우리가 범하기 쉬운 천박한 행동과 욕망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지, 

저 소년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진상을 알고자 하는 것을 억압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음양의 근본과 이치를 탐구하는 저 소년의 마음이야 말로 

우리가 궁구하는 "성리학"의 근본을 성찰하려는 진지한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저 소년은 장차 세상 음양의 조화를 잘 살펴 

변화에 맞게 세상을 이끌어갈 큰 인물-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그 소년이 바로, 백사-이항복이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또는 백사(白沙).

고려의 대학자 제현(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몽량(夢亮)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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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이황 (李滉 ; 1501~1570)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 화가, 시인이다.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사상가, 교육자이자 화가, 

대성리학자였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작을 사퇴한다.

1528년(중종 23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1534년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의 관직을 거쳐 풍기군수 등을 

역임했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45년 형 온계 이해가 을사사화로 희생된 뒤, 

여러 번 관작이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사상은 그의 직제자 김효원(金孝元)이 동인의 당수가 된 이후 

동인으로 전달되었으며, 남인으로 이어졌고, 북인 일부에게도 계승된다. 

소고-박승임, 서애-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퇴도(退陶)·퇴도만은·도수(陶叟),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진사(進士) 증 의정부좌찬성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그는 이우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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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 선생의 시대를 뛰어넘은 크나큰 마음 두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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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 선생의 시대를 뛰어넘은 크나큰 마음.퇴계선생의 맏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한창 젊은 나이의 맏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과부가 되었다.퇴계 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걱정이었습니다.'남편도 자식도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