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우리 역사의 인물들 15
<역사 인물>
이름난 애국명장, 연개소문
우리나라 중세역사에는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군주나 장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는 고구려 말기에 강대한 적을 맞아 싸워서 이름을 떨친 연개소문도 있습니다.
연개소문은 평화유지를 구실로 사대굴종적인 입장을 취하던 투항분자들을 제거하고
거듭되는 외적의 외교적 압박과 군사적 위협, 그리고 무력침공을 단호히 물리치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수호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연개소문(?-666년)은 고구려의 서부 즉 연나부 귀족가문의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연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할아버지는 광이라고 하며,
그들은 대대로 고구려의 최고벼슬인 막리지를 지냈다고 합니다.
굽실굽실하고 윤기 도는 멋진 수염을 드리운 뛰어난 용모의 사나이,
늠름하고 의젓한 풍채와 억센 기상의 소유자, 연개소문은 담력과 배짱이 있고 용맹했으며
지략이 풍부하고 무예도 능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비상한 총명과 용감한 무비를 갖추고 있어서
15살에 벌써 32대 영류왕(618-642년)의 측근신하가 되었다고 합니다.
애국명장 연개소문은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고 민족의 존엄을 고수하기 위해
지혜와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했고 맹렬한 군사 활동을 벌리었습니다.
1. 맹수는 물어 메치기 전에 허리를 낮추는 법
연개소문은 좀처럼 남에게 굽어들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그는 영류왕과 그에 아부하는 대신들의 소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영류왕은 서쪽의 당나라(618-907년)가, 수나라 말기 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강자로 군림하고
여러 세력들을 격파하여 마침내 중국 땅을 통일하면서 점차 강대해지자 겁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평화유지를 구실로 어떻게 해서라도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당나라의 지배자들이 평화의 그늘 뒤에서
고구려를 속국으로 만들어보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626년에 자기 형인 태자 "건성"을 죽이고, 애비를 밀어낸 당태종 리세민이 왕좌에 오르자
영류왕은 더욱 굴종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리세민이 당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통일하기 위한
여러 전장에서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태종은 국내외정세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동방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노골적인 간섭을 해왔습니다.
그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의 모순과 대립, 충돌을 이용하여 외교적 방법으로 내정간섭을 함으로써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영류왕은 고구려가 남방을 공격하지 않게 해달라는
신라와 백제의 요청을 기회로 하여 외교적 압력을 가해오는 당나라에 굴복했습니다.
그리고 국가기밀에 속하는 지형을 그린 ?봉역도?를 당나라에 보내주었으며,
631년에는 전승기념물인 경관을 허물어버리라는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고구려 인민들의 애국적 기개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류왕에게
당나라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취할 것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는 나라와 겨레의 존엄을 더럽힌 영류왕의 나약한 행위를 도무지 묵과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해서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그 측근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가 죽자, 응당 연개소문이 서부대인의 뒤를 이어야 하는 데도
이를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가고 있는 국왕과 그 일파를
무장정변으로 제거하려던 연개소문에게는 이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연개소문을 의심하고 있으며, 그에게서 서부의 통솔권을 빼앗아 제거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의 지지자들은 모두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의 결심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남에게 머리 숙일 줄 모르는 연개소문으로 볼 때
그의 출로는 당장 정변을 일으키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결심은 이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모두
‘맹금이 덮치려 할 때는 깃을 접고 몸을 낮추며, 맹수가 물어 메치려 할 때는 허리를 낮추고 기어간다.’
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되새겨보며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필요하다면 머리 숙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연개소문의 생각이었습니다.
자기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을 희생할 줄도 아는 것이 군사가의 떳떳한 도리입니다.
연개소문은 국왕과 그 일파에게 자기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빌었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뇌물바리들을 싣고 대신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빌었다고도 합니다.
그의 묘한 술책이 빛을 내어서인지 국왕은 그를 서부대인으로 임명하고 천리장성축조공사를
총 감독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연개소문이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이 터졌다.
야사에는 고구려의 한 해라장(해상순찰장교)이 당나라 간첩의 사명을 띠고 기어들었던
삼불제 사신의 이마에 연개소문의 이름으로 당태종을 모욕하는 글을 써 보낸 것이 발단으로 되었다고 한다.
당나라 측의 항의에 전전긍긍하던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는데
연개소문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선손을 썼다는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서부의 군사를 전부 모아
마치 검열하려는 척 하면서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모든 대인을 불러 함께 구경하자고 하고
그들이 오자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때 영류왕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영류왕의 조카 보장을 왕으로 앉히고 자신은 막리지가 되여 국정을 장악했습니다.
결국 연개소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 사람들에게 사죄하여 대인의 위를 잇고
서부의 군사를 확고히 장악한 것이 빛을 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연개소문의 ?선발제인?, 즉 먼저 선손을 써서 적을 제압하는 책략 등
여러 가지 군사적 재능도 보여주었습니다. 무릇 군사가는 기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며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수단과 방법은 결코 문제로 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2. 대결전의 준비
연개소문의 무장정변은 고구려 인민들의 지향에 맞게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중요한 정책전환의 계기로 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긍정적이며 진보적인 정변인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무장정변 후 고구려에서는 그 어떤 정치적 혼란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인민과 군대의 절대다수는 자기 나라를 크게 내세우고,
천년강대국으로서 위용을 떨치게 하려는 연개소문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고구려를 침공할 생각을 하루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
당태종(599-649년)만은 이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저들의 속국으로 만들고, 고구려 인민을 노예화하며 금은재보를 약탈하려는 꿈을
가슴속깊이 묻어두고 있었으며, 수나라 수백만 대군의 거듭되는 침입을 물리치고 사기 등등하여
당나라도 발아래로 굽어보는 고구려를 기어이 복수하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때 그에게는 애국명장으로 내외에 널리 알려진 연개소문과 결판을 내어
명장으로서의 재능을 떨쳐보려는 검은 속심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정사를 독판치고 있다는 당치도 않은 구실을 걸고
고구려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한편 외교적인 방법으로 고구려에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연개소문은 곧 당나라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한 정치, 군사적인 실무조치들을 강구했습니다.
연개소문은 무엇보다도 서부국경지대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명장이라고 일컫던 당태종의 전법에 대한 깊은 연구로부터 세워진 것입니다.
당태종은 수양제가 패전한 원인이 군량수송을 제대로 따라 세우지 못하고 전방의 성들을 버리고
깊이 들어간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군량확보에 큰 관심을 돌리고 군량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소와 말, 양을 많이 모아들이게 했으며, 공성기재들을 직접 선택하면서 고구려 전방의 성들을
모두 격파하고 마음 놓고 전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서부국경지대의 강화는 연개소문의 궁극적인 전략적 목적달성과 중요하게 관련되어있었습니다.
적들을 서북방 방어전선에 붙잡아두고 시간을 끌다가 일정한 시기 즉 군량이 떨어지고
적들의 사기가 떨어지며 날이 추워지기 시작할 때를 기다려 적의 배후로 진격하여 보급로와 퇴각로를 차단하고,
앞뒤에서 양면공격으로 적을 섬멸하는 것, 바로 이것이 연개소문의 전체적인 전략적 목표였습니다.
연개소문은 서북 방어전선을 강화하기 위하여 성, 진들의 성벽을 수축하고 해자를 깊이 파며
군수물자를 확보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습니다.
명장인 "양만춘"을 안시성주로 그대로 임명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줍니다.
연개소문은 서북방 방어성들을 강화하면서 수도로 오는 길에 배치된 전략적 방어거점들도 강화하며
수도성을 신축하는 사업도 전개했습니다.
연개소문은 다음으로 당나라와의 대결 전 때 후방의 근심을 덜기 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고구려 후방의 근심이라고 하면 남방에서 백제와 신라에 의한 위협이었고 북방에서 흑수말갈의 준동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주로 관심을 돌린 것은 남방정세였습니다. 두개 전선을 편다는 것은 고구려에 는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남방정세를 안정시켜 후방의 근심을 덜자면 백제와 신라를 다 끌어당겨 세 나라의 화목을 도모하는 것이었으나
당시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백제가 신라서변의 중진인 대야주를 점령한 일 때문에
두 나라는 앙숙관계에 있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연개소문은 백제를 끌어당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신라는 동해에 면해있고 백제는 서해에 면해있는 지형학적 조건과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백제가 당나라와 연합하면 당나라군이 병선으로 군사를 날라 백제로 들어와 백제의 쌀을 먹으며
남으로부터 고구려를 칠 것이므로 이것은 고구려에 큰 위험으로 될 수 있었습니다.
백제와 연합하는 것은 당나라가 바다를 건너와 남방으로부터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는데 유리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백제는 군사력이 강하고 군사인재들이 많은 조건에서 그와 손을 잡는 것이 유리했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백제와 연합하고 그로 하여금 신라를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남방의 근심을 덜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남방으로 진출하여 신라의 국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연개소문은 북방의 여러 종족들을 제압하여 그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지배 밑에서 벗어나 당나라와 관계를 가졌던 북흑수말갈을 다시 세력권 안에 넣었습니다.
후에 북 흑수말갈은 고구려에 지원병까지 보내왔습니다.
연개소문은 또한 먼 곳과 사귀고 가까운 곳을 치는 ?원교근공?의 책략으로
당나라의 배후를 위협하기 위한 조치도 취했습니다.
그 실현을 위하여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북방에 있던 설연타(돌궐의 갈래)에
두 차례나(한 번은 고구려사신 또 한 번은 말갈인들을 보냈습니다.)
사신을 보내어 유사시에 함께 당나라를 공격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연개소문이 보낸 후한 뇌물에 마음이 동하여 진주극한은 앞에서는 약속을 해놓고도
당나라의 눈치를 보며 선뜻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당나라로서도 설연타의 공격에 주의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로서는 꼭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이것만으로도 만족인 갓입니다.
설연타의 당나라공격은 고구려의 승리가 거의 확정적인 것으로 되어갈 때
진주극한의 뒤를 이은 다미극한에 의하여 실현되었습니다.
허나 그들은 당나라 토벌군에 의해 곧 진압되고 성과 없이 물러갔습니다.
연개소문은 이밖에도 대결전을 준비하는 데서 국내의 단합을 이룩하고 도교를 부흥시켜
불교, 유교에 의거하여 자기 세력을 부식하던 낡은 세력들을 약화시키는 등의 조치들을 취했습니다.
명장이라고 자처하던 당태종의 침략기도에 대처하여 세워진 이러한 정치, 군사적 조치들은
매우 타당한 것들이었습니다. 후에 당나라와의 전쟁과정은 연개소문의 조치들이
매우 옳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연개소문은 확실히 전략적 안목이 있는 군사가였습니다.
3. 강경대응
배짱이란 자기 힘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납니다.
힘이 따라서지 못할 때 배짱은 그저 떼 질에 불과합니다.
연개소문은 자신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배짱은 언제나 강경대응으로 발현되었고
강경대응은 언제나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준비가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643년 9월 신라의 사신은 당나라에 가서 고구려, 백제가 연합하여 자기들을 공격하니
구원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이것은 신라 지배자들이 민족 내부문제 해결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배족 행위를 계속 감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당나라 지배자들은 신라의 요청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먼저 외교적 방법으로 간섭하고
그래도 안 되면 군사적 침략을 개시하는 구실을 마련하려고 책동했습니다.
644년 초에 고구려에 온 당나라 사신 사농승 상리현장은 신라를 치지 말라고 은연중 압력을 가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즉시 남방전선에서 돌아와 지난날 수나라의 침입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몰래 빼앗은 고구려의 땅 500리를 돌려주기 전에는 공격을 중지할 수 없다고 면박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침략 기도를 분쇄하며 그 준비상태와 대응 정형 등을 타진해보기 위해
일부 병력으로 644년 여름에 당나라의 유주와 영주지역을 주동적으로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침략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던 당태종은 그 소식을 듣고 영주도독 장검으로 하여금
영주, 유주의 병력과 거란, 해, 말갈족 경기병들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도록 했습니다.
사실 당태종 역시 침략에 앞서 고구려의 준비상태를 타진해보려는 의도에서 그 작전을 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장검이 장마를 구실로 요수 서쪽 경계선에서 앉아 뭉개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침략전쟁준비가 거의 끝나자 고구려의 대응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당태종은 우둔위 병조참군 장엄이란 자를 또다시 사신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때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기에 앞서 그 형세를 알아보려고 사신으로 갈만 한 관리를 탐문했는데
배짱이 있는 연개소문이 무서워 모두 가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겨우 한사람이 나섰는데
그가 바로 혹시 높은 벼슬이 차례지지 않겠는가 하고 마음을 다잡고 나선 것이 "장엄"이었던 것입니다.
장엄은 건방지게도 연개소문에게 당나라가 곧 공격하려고 하니, 사죄하라고 협박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주제넘게 훈시하려 드는 장엄을 호되게 꾸짖고, 고구려의 강경한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그를 토굴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장엄은 6년만에야 제 나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은 이렇게 배심 있게 적들의 위협공갈에 맞서 나라의 존엄을 지켜냈습니다.
하기에 당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겠다고 하였을 때
저수량, 장량(후에는 적극적인 지지자로 둔갑하여 수군대총관까지 된다.), 리정 등
많은 대신들과 무관들이 고구려침략은 반대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수나라 때 수양제를 따라 고구려침략에 동원되었던 관료들도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지키기 때문에 항복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임금의 명령으로 수도를 지키기 위해 남았던 "리대량"이라는 대신은 병으로 죽으면서까지
고구려와의 전쟁을 중지할 것을 간청했습니다. 맹장이라고 하는 을지경덕은
임금만이라도 가지 말아달라고 거듭 제의했습니다. 리정은 병을 구실로 종군하기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가 한때 자기보다 30살 정도 아래인 연개소문을 스승으로 모시고 병법을 배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적의 명장들도 전율하도록 만든 연개소문은 역시 배짱이 있는 장군, 자기 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장군이었습니다.
4. 최후의 승리
싸움에서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군사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로
이를 ‘병가지상사’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의 종국적인 전략적 승리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전체적인 전략은 적들을 고구려 서북 변 방어경계선에 붙잡아두고 완강한 항전으로
적의 전투력을 소모 약화시키면서 추위가 닥쳐올 때를 기다려 바다건너 적의 배후를 기습하여
보급로를 끊어놓고 퇴로를 차단하여 적들을 독안에 든 쥐 신세로 만들어놓는 것이었습니다.
645년 초 당나라의 100만 대군이 드디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습니다.
적들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태종은 물론 육군무력을 총지휘하는 리적(원래 이름은 서세적)은
수나라 말기 농민군 두령으로 이름을 떨친 자이고 장손무기는 모략에 능한 자였다고 합니다.
육군무력의 부대장격인 강하왕 리도종(당태종과 6촌간)은 맹장으로
리적, 설만철과 함께 당태종 때의 ?3대명장?으로 일컫는 자들입니다.
명장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을 다 끌고 온 당태종의 정예 100만 대군과의 싸움은 시작부터 치열했습니다.
고구려군민들은 영용하게 싸웠으나 역량 상 엄청난 차이 때문에 일부 성들이 적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연개소문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배심 든든하여 전쟁전반을 지휘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적들을 요동 계선에 붙들어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들 사이에
긴밀한 협동작전을 벌려 잘 째인 고구려 성 방위체계의 위력을 발휘해야 하며
제때에 지원을 잘 조직하여 역량 상 균형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이기는 것은 물론 최대의 목적이지만 지는 경우에는 완강한 저항으로 적의 역량을 소모 약화시키고
시간을 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이러한 전술적 대책을 작성하고 긴밀한 협력, 힘 있는 지원을 조직해주었습니다.
개오성이 당나라 전군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가시성의 군사들이, 요동성이 공격목표로 정해졌을 때에는
국내성과 신성의 군사들이, 백암성이 공격당할 때에는 오골성의 군사들이 도와주게 했습니다.
특히 적들이 안시성을 공격할 때에는 15만 명의 지원군을 보내주었습니다.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에 벌써 이 15만 지원군과의 싸움에서 졸경을 치렀습니다.
건안성과 안시성에서 거듭되는 패배로 곤경에 처한 당나라군 내부에서는 의견충돌까지 생겼습니다.
안시성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하던 리적을 포함하여 많은 장수들은 안시성을 포기하고
"오골성"을 먼저 쳐야 한다고 했고 장손무기만은 안시성을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리도종 같은 자는 싸움을 피하여 곧바로 평양을 치자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종의 의견은 즉석에서 기각되었습니다.
당나라군은 더욱 강화된 고구려의 위력한 성 방위체계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꼴이 하도 민망스러웠던지 옛 중국의 사가들조차도
“당태종이 천하를 평정함에 기이한 승리의 책략들을 많이 내놓았으나
오직 요동성싸움에서만은 만전의 계책으로 적을 제어하고자 한 까닭에 공이 없었다.”고 비평했습니다.
당나라군은 장수도 군졸들도 모두 지쳐버렸습니다.
바로 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연개소문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적 수군무력을 격파한 후 바다건너 당나라 지경에 진입했습니다.
고구려군은 당나라 침략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하고 당나라의 북부지역을 종횡 무진했습니다.
당황망조한 당나라의 태자가 애비인 태종에게 연락을 보냈으나
그는 그때 애꾸가 되여 인사불성이었습니다. 직접 성 아래까지 나가 군사들을 고무하다가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았던 것입니다. 당태종은 총퇴각을 명령했습니다.
때는 벌써 음력 9월 18일이라 요동반도에서는 풀들이 다 말라버리고 물이 얼어붙었습니다.
양식이 떨어진데다가 보급로마저 차단되었습니다.
양만춘장군은 성문을 열고 퇴각하는 적들에 대한 추격전을 벌렸습니다.
이렇게 고구려군은 초기에 일부 성들을 적들에게 잃었으나 완강한 저항으로
궁극적인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고 반공격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신념으로 합니다. 전쟁의 운명을 걸머진 장수는 일시적인 패배 앞에서 의기소침해지거나
동요하지 말아야 하며 전쟁의 최후승리를 위해 한번 먹은 마음을 변치 말고 완강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옳음을 확신할 때입니다.
연개소문이 적들과의 싸움에서 전략적 승리를 이룩하는 데서는 안시성군인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특히 성주 양만춘은 근 90일간의 항전을 승리로 결속 짓게 함으로써 명장으로서의 영예를 고수하고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를 안시성주로 그대로 임명한 연개소문은 역시 군사가로서의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영원한 승리의 자취
645년 고구려-당 전쟁은 사실상 당시 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던 두 명장의 대결이기도 했습니다.
당태종은 당나라를 세우고 강화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명군으로 수나라말기의 동란 속에서 봉기하여
여러 지역에 할거하던 두령들을 모두 쳐 이긴 명장으로 후세에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군사이론 발전에 기여한 군사가로 많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연개소문의 적수가 못되었습니다. 당태종은 상대를 잘못 보았습니다.
?강한 용도 자기 땅에서 나서 자란 뱀을 이겨내기 어렵다.?고 하거늘
그는 자기 조국을 지켜 나선 고구려 인민의 열렬한 애국심과 고구려 군민을 승리로 이끈
연개소문의 정치, 군사적 재능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상대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 제노라고 하는 노장, 맹장들을 다 거느리고 나선 당태종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게 했습니다. 퇴각하던 당태종은 진퇴양난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앞에서는 연개소문이 퇴로를 차단하고 위협하고
뒤에서는 고구려의 추격 병이 뒤를 바싹 물고 숨통을 조였습니다.
군량보급로가 차단되어 장졸들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자기들을 이 전쟁판에 내몬 임금을 원망하고
자기들을 낳아준 부모를 원망했습니다. 요하유역의 진펄에 딩굴고 있는 수나라 장졸들의 해골을 보며
자기를 보는 것만 같아 눈물지었습니다.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엄습해오는 추위였습니다.
이때 당태종이 당한 봉변에 대하여 당나라의 사가들은 극력 언급을 피했습니다.
단편적인 사실기록들이 이것을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당태종이 탄 말이 진펄에 빠져 꼼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추격 병이 그를 거의 사로잡게 되였을 때 설인귀가 말을 몰고 와서 구원하여 달아났으며
전군(도망갈 때 후방의 적 공격을 맡는 부대)선봉 류홍기가 뒤를 막음으로써 겨우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당태종함마처?(당태종이 탄 말이 빠졌던 곳)라는 유적지도 생겨났습니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은 당태종의 말이 진펄에 빠지고 화살에 눈을 잃고
(당태종의 눈이 이때 애꾸가 되었다고도 한다.) 목숨만 살려주면
연개소문에게 나라를 절반 갈라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당나라군이 발착수에 이르렀을 때에는 눈바람이 세차서 사졸들의 젖었던 몸이
얼어 죽은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태종은 눈바람이 세차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된 기회를 타서
군사들에게 불을 피워 날 풀리기를 기다리라고 해놓고 자기는 슬쩍 빠져 달아났습니다.
연개소문이 거느린 고구려군은 리세민을 추격하여 오늘의 베이징근방까지 공격해갔습니다.
그때 연개소문이 당나라 경내를 종횡무진 한 자취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나라 사람 번한은 ‘고려성 회고시’라는 데서 연개소문이 한때 당나라의 북부지역을 차지하고
인민들을 이주시켜 새로 점령한 지역에 풍만한 생활을 펼쳐놓은데 대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잘못 보고 접어들었던 대가는 바로 이러했습니다.
당태종이 리정, 리대량 등 조정대신들의 충고를 들어 침략전쟁을 도발하지 않았더라면,
위징(당태종의 측근신하, 643년에 죽음)이 곁에 있었더라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라고 후회의 눈물을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회란 언제나 때 늦은 법입니다.
당태종은 ‘요동전역에서 얻은 근심’ 즉 ‘이질’, ‘등창’ 같은 병으로 지지리 고생하다가
그것이 도지어 4년 후인 649년에 죽었습니다.
죽기 전에 그는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었습니다.
결국 당태종은 자기를 과신하면서 상대를 잘못 본 탓에 자기 자신의 운명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명군주?, ?명장?이라고 하는 당태종을 파멸시킨 연개소문은 그야말로 명장 중의 명장이었습니다.
후세에까지도 ?명군주?, ?명장?이라고 일컬어온 당태종이 패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던지
후에 중국 송나라(960-1279년)임금 신종은 측근신하 왕개보와 이야기하다가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무엇 때문에 이기지 못했는가?”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왕개보"는 “연개소문이 비상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 당나라는 고구려를 감히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고구려는 이 시기에 가장 강대했습니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뛰어난 지략과 무비의 용맹으로 고구려를 천하에 우뚝 내세우려던 뜻을 실현시키고
나라와 겨레의 안전을 지켜내는데 이바지한 애국명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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