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백(李在白)·단편소설 방

[단편소설]甲子풀이- 이재백(李在白)◈소개작품◈

Demian-(無碍) 2011. 2. 5. 23:13

 

* 원작출처 : [희구당집1618] -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ljbb1618

 

[단편소설]

 

 

                            甲  子 풀 이

 

 

                                                  / 이  재  백

 

 


  “야, 이 새끼, 보리타작을 당해봐야 세상맛을 알겠남? 아직도 내가 누굴 줄 모른 걸 보면 눈구멍이 멀어도 솔찬히 멀어버린

놈 아녀. 올빼미 눈구멍이거나 안 그러면 멍청이든지. 둘 중에 하나가 분명하단 말이시. 어디, 요 새끼 뼈다구 한 번 추려볼까?”

  왕방울 눈깔은 생긴 것처럼 주둥이도 거칠었다. 사람의 입이 아니라 악마의 입을 닮은 것  같았다. 중 사발만큼 큼지막한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육 쪽 마늘을 닮은 흰자위가 번득거리는 게 아귀의 사촌쯤 되어보였다. 불문곡절, 첫마디부터 사람의

기를 꺾기에 알맞은 육두문자를 내 갈기는 것도 그랬지만 생김새는 더더욱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었다. 저승사자의 분신이

따로 없었다. 오금이 저절로 오그라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악귀와 악마의 화신이랄까. 녀석이 피식 웃었다. 웃는 게 아니라

반쯤 죽여 논 생쥐를 갖고 노는 노회한 고양이 비슷했다.

 

  “이 새끼 좋게 말 할 때 제대로 고백하란 말이야. 무신 말인지 알겠어? 짜식이 아직도 영문을 모른 듯 시침일 떼긴,,,.

임마, 아무것도 모른 척 먼 산 바라기 노릇을 하지만 네 놈 수법에 넘어갈 놈이 이 시상 천지에 어디가 있것냔 말이여.

처, 천만에 말씀이다 이 말이여. 이리 뵈도 빨갱이 잡는 덴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사람이란 걸 똑똑히

알아라고. 잉. 다시금 경고해 두겠지만,,, 내가 무엇을 요구하는 지 눈치깨나 있는 놈 같으면 당장 귓구멍이 뚫어질 텐데,,,.

사쿠라에 겹사쿠라, 왕사쿠라가 뭔 줄 알지? 바로 그 노릇만 잘한다면 내 권한으로 네놈 목숨 하나는 똑 소리 나게

살려줄 수 있다 그 말씀이여. 이만함 무신 말씀인지 알것지야, 잉.”

 

  갈수록 태산이다. 뭐가 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사쿠라란 의미는 어렴풋이 알 것 같지만 겹사쿠라에 왕사쿠라라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너무나 또렷한 의식상태였다. 꽤나 시달렸지만 의식불명상태에

이른 건 아니었다. 감이 잡히긴 했지만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처럼.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뭔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데

죄를 지었으니 무조건 자백해라니. 주먹다짐만이 통하는 막가 파 세상이라지만 그럴듯한 근거라도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사람 키로 수무 질 넘어 보성강에서 제일 깊다는 연하리 나루터 밑바닥에서 자갈을 주워 올리란 꼴이나, 허공을 나르는

갈 가마기중 머리통이 제일 큰 놈을 잡아내라고, 보챈 꼴이나 별다름 없었다.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이

없다고 족치는 꼴이라니.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될까? 수수께끼 놀음이었다. 황당한 게 아니라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을 이런 엉뚱한 질문으로 결정하다니. 이런 씨팔 놈의 세상 확, 엎어져버려라. 내 입속에서도 육두문자가

날름거렸지만 곧장 목울대 안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내 감정이 표출된다면 녀석이 취할 행동은 보나마나 뻔한 거였다.

 미친개로 변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몽둥이 타작이 시작 될 터였다. 그렇다고 묵비권을 행사하여 녀석의 부화통에

불을 지핀다고 몽둥이 타작을 면할 길은 없었지만.

  “저 저,,,.”

  나는 아랫입술을 옥다물었다. 운명에 맡기는 것이 현명할 일이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한 일 아닌가? 지지고 볶는다는

속담이 너무나 그럴듯한 말이었다. 빨치산으로 둔갑된 것만도 억울한 일인데 한 수를 더 떠 거물급으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로 비상되어버렸다. 어느 결에 이름조차 바꿔진 것이다.

  “김 정이”란 내 이름이 “김 정일”로.

  김 정일은 나의 형님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느닷없이 형님으로 변신된 거였다. 아우에서 형님으로 격상된 건

어쩔 수 없이 타고난 팔자라지만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출구가 안 보이는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미로의 끝은 어딜까. 도무지 짐작조차 안 가는 것이었다.

  “빨갱이 전남 도당 선전부 차장 김정일, 이래도 뻗을 참이여?”

  심문이 아니라 비아냥거림이었다. 상대방의 인격이나 자존심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투였다. 벌써 몇 번째의 다그침인가

모르지만 나는 “네”라고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죽든 살든 무조건 아니라고 두 이를 앙다물고 오리발을 내 미는 게

상책일 뿐이었다.  

  서울로 올라간 형과 연관된 일이겠지만 억측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난리가 난 후 소식조차 확실히 모른 형이 공산주의운동을 했다는 것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행운이라도 붙잡아

그쪽의 거물이라도 되었다면 자그만 이 촌구석은 물론 식구들마저 모를 리 없는 것이다. 한쪽 다리마져 제대로 못쓰는

불구자에다 학교 문턱도 못 가본 일자무식 농투성이가 빨치산 지하조직의 거물로 변했다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해방이 되자마자 식구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된다고 외숙의 주선으로 순천 시장 통 가겟집의 점원으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여순반란 사건 직후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곧장 서울로 간 형이 아닌가. 녀석이 아무리 못살게 굴더라도

대답할 건더기마저 없는 것이었다. 허공에 뜬 구름 잡기나 매한가지였다. 형이 여순 반란 사건 때 부역한 사실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형의 이야기는 꺼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꺼내봤자 사태만 더 복잡하게 만들 것 같았다. 형의 행적이 실체를

드러날 때에 이직실고 하더라도 무방할 것 같았다.

  “요런 악질은, 그저 안 뒈질만치 조져야 된다니까.”

  몽둥이찜질에 어기찬 비명을 지른 끝에 마루바닥에 내뒹굴어져 실신상태에 이르러서야 녀석의 몽둥이찜질이 중지되었다.   

  “요런 악질 놈의 새끼, 아조 물고짱을 내야지,,,”‘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을 난도질하고도 분이 안 풀린 듯 마귀를 닮은 녀석은 숨결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참 지독한 놈의 새끼네. 그래서 빨갱이 종자는 씨를 말려야 된단 말이 철학보담 났단  말이시. 내 말이 하나도 안 틀린께 

명심 하드라고 잉.”

  녀석은 참언이나 된 것처럼 주위사람들을 향해 연설조로 말했다.

  “조런 녀석은 당장 총살해야 된단 말이여. 옆에 놈들 정신 좀 채리게 뽄떼기라도 시켜야 될 게 아니여?”

  아무리 난리통속이라지만 뭐가 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압박과 설음에서 해방된 민족, 이제야 광복인가 해방인가,

살판이라도 난 듯 기고만장한 나머지 아귀가 터지고 목이 쉬도록 지랄발광하며 어깨춤을 더덩실 춘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난장판이 벌어진단 말인가. 그놈의 대동아전쟁만 안 일어났다면 압박과 설음 어쩌고저쩌고 일제 삼십육 년을 욕하고

저주하지만, 그때가 오히려 살기 좋고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등 따시고 배부른 게 인생의 바람에서

최고치가 아니던가. 사상이나 이념이란 말로는 그럴싸하지만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건가? 그 놈이 밥 먹여주고

등 따습게 만들어 주는 조물주는 아니니 말이다. 대한독립 만세니, 자주독립이란 언어가 그럴싸하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웃긴 애기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저주스런 일제 삼십 육년이라 했지만 독립운동 안하고 범법자 노릇만 안 했다면

귀찮게 할 녀석이라곤 씨알머리가 없었던 것이다. 밥 먹고 음전하게 살면 괜히 까탈 부릴 녀석, 좌로 우로 줄서기를 강요할

일이라곤 애당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밥 먹고 내 대로 살면 만사가 형통이었다. 못살게 해코지 하는 놈들만 없는

세상이란 얼마나 좋았던가. 핍박받은 일제 36년, 나팔을 제대로 불어야지, 그때가 오히려 더 좋은 세상이었단 말이여,

자주독립 뭣이 어쩌고저쩌고? 일제시대 만행이 어쨌다고 나불거리지만 이렇게 참혹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알 듯 말 듯한 얼굴들, 그저 순진한 농투성이인 이웃의 얼굴들, 내 또래의 젊은이들 몇이 물고문이나

매타작을 당한 뒤에 어디론지 소문 없이 끌려갔다. 보나마나 뻔한 노릇이었다. 대갈통이나 가슴팍을 그놈의 총탄이 멋지게

휘졌고 지나갔을 게 틀림없었다. 해방의 선물, 빨갱이들에게 가해지는 철퇴. 참으로 가관이었다. 민족 해방이네

인민 평등이네, 뭣이 어쩌네, 주둥이만 나풀거리는 저쪽 녀석들의 꼴값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밥에 그 나물이었다. 

모두가 미쳐가는 세상이었다. 좌나 우나 그들만이 옳은 일이라고 기승들을 부렸지만 미쳐도 보통 안 미친 살인마 집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 최후의 통첩인께, 알아서 허드라고 잉.” 

  “뭣이라우? 참으로 환장어것소. 어디 박 순경 좀 봅시다 잉. 그 사람이 나를 증명할팅께”

  마지막 동아줄이 따로 없었다. 믿는 건 불알친구 박 순경뿐이었다. 아무리 막된 세상이라 하지만 자신의 무관함을

너무나 잘 아는 박 순경이 아닌가.

  내가 우둔하게 입술을 달싹이자 녀석의 무지한 주먹이 내 면상을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요런 순 악질 빨갱이 새끼가, 둬져봐야 맛을 알것남?”

  “내가 왜 빨갱이여라우?”

  내가 작심한 듯 반항했지만 그들의 각본을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허, 허, 참.”

  정신병자들은 그들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이었다. 철저한 거짓말쟁이에다 한 술 더 떠 나라를 말아먹은 놈,

거대한 매국노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완용이나 송 병준 보다 더 악질이라고 밀어대는 데는 대꾸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직실고 하란 말이여? 늬놈 죄상은 죄다 알고 있응께,,,”


  “꼼짝없이 속아뿌렀어라우. 생각만 해도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구만요. 미련헌 곰 차두가 따로 있는 법 아닌 모양인갑소 잉.

내 친구, 정이가, 아니 정일이가 빨갱이 골수분자란 걸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었냔 말이요? 지금도 난 하나도 고지들을 수가

없단 말이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라우. 지가 감히 지서장님 말씀을 어찌께 거역허것소만,,, 손가락에 간솔 불을

지져 하늘로 올라간대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당께라우. 꽤복쟁이 친구가 엉뚱한 누명을 둘러쓰고 죽을 곳으로 가니

어찌 맘이 편하것소? 상부에서 잘 알아서 그런다니 할 말은 없지만, 내 생각을 쬐끔이라도 참작해주셨으면 좋겠구만이라우.”

  “또 쓸데없는 소리여? 암말 말고 상부에서 시킨 대로만 하란 말이여. 얼마나 험한 세상인지 알만 험스로 이렇게 뻘 소리를

함부로 내뱉어도 되냔 말이여? 저 새끼 때문에 우리 동료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간 줄 알아. 아구통을 사정없이 조져 취조하면

십년 묵은 지(김치) 가닥까지 다 다 나오게 된단 말이여. 순 악질 빨갱이는 본래부터 번듯하게 나타나질 않는 법이여.

숨은 빨갱이가 총칼을 든 빨갱이 보다 몇 십 배 더 무섭다는 건 알만 할 텐데,,,.이번 일은 박 순경과 나 사이에만 있었던

것으로 간조 하고 모른 척 허자구. 상부에서 이런 소릴 들으면 박 순경은 물론 나마져 입장이 곤란해질 테니까. 박 순경의

입장을 모른 게 아니지만 이럴 땔수록 사리판단은 정확히 해야 된 단 말이여. 공과 사의 구별은 야물딱지게 해야 돼. 안 긍가?

자네 말을 곧이듣고 변명이라도 했다간, 생각해보소? 지하조직책이 분명하다고 판명될 때는 누가 책임 지냔 말이여?

그렁께 우리 같은 쫄짜는 위에서 시킨 대로만 하면 별 탈 없이 이 난장판을 무사하게 넘길 수 있단 말이여. 허고 불 안 땐

부삭에서 연기난다는 소릴 들은 적 있는가?”

  “허지만,,,,,,,”

  박 순경이 지서장 앞에서 얼굴을 조아린다. 참으로 옳은 말일는지 모른다. 인간 처세술의 교범이 틀림없다.

머리를 외로 꼬는 모양새가 상대방의 이론에 수궁할 수 없다는 모습이었지만 내부의 흐름을 간파한 순간에

자신의 의사를 철저하게 은폐시키는 위장술은 너무나 그럴 듯 하였다.

  “하먼이라우,,,”

  박 순경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이 웃어보였다.

  “바른대로 말하자면 나도 박 순경의 생각과 별 다름 없지. 허지만 누가 알아. 하도 어수선한 세상이 되어서 믿을 것이라곤

없으니. 형제간 부자간도 못 믿는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헐 소리랑 당초부터 없는 것 아닌가? 내 자신 외에는 믿을 것이 없는

고약한 세상이 되어 뿌렀으니,,,.”

  난장판이 된 세상에 이만치 무던한 지서장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난리 직후의 어수선한 판국에서 면 단위 지서장이라고

못된 권력을 부리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던가. 인간쓰레기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었으니.

  “박 순경 친구라고, 봐주려고 해도 내 힘으론 안 된단 말이시.”

  “누가 지서장님 맘씨를 모른다요.”

  “저 성질 잘 알잖아?”

  지서장이 넌지시 물었다. 입들은 다물고 있었지만 악종 중에 악종이란 별명을 모른 사람은 없었다. 녀석의 손때기에 걸렸다

하면 무조건 지옥으로 간다는 것도. 빨갱이 말만 내놔도 못 씹어 먹어 환장하고 치를 떤다는 녀석이었다. 양친 부모에

마누라까지 산사람들에게 살해를 당했다니 알만한 터였지만 해도 너무나 한다는 것이었다. 녀석이 나타났다 하면 피비린내가

 골짜기를 진동시킨다나. 게다가 경찰서 사찰과장이라는 막강한 직위가 녀석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니, 불붙어 날뛰는

미친개가 따로 없었다.

  “박 순경도 무조건 입 다물어.“

  “그놈아가, 의경 지원해라고 몇 번 말했지만,,,”

  박 순경은 이렇게 꼬인 게 자신의 탓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상한 놈 아녀? 어떤 세상이라고 집구석에 앉아 뭉그적거리냔 말이여.”

  1951년 9월 30일.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아니, 예측 불허였다.

  이리저리 흩어진 빨치산의 대열들은 보급투쟁이 주 업무였다. 쇄진해가는 세력들이 잔존할 수 있는 방법조차 막연했다.

인원이나 장비는 말 할 것 없지만 사기조차 떨어져 하산 자수하는 대원들이 계속 늘어 대열의 흔적이 없어진다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었다. 백아산에 밀집되었던 빨치산 부대도 산산이 흩어져 순천 조계산이나 곡성 통명산 계곡으로 소부대

편성 잠입하였다. 완강하던 초창기의 모습은 찾을 길 없었다. 퇴보와 파멸의 연속. 군경토벌대들도 빨치산의 주력부대가

괴멸한 터라 약간 느슨해진 틈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해야 열댓 명이 근무하는 면단위의

시골 지서를 정면 공격한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터에 군 단위 경찰서를 정면 공격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현상이 지휘하는 남부군 주력부대가 지리산에서도 한참 동떨어진 곡성경찰서를 공격한다는 건 사회적인 경각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일이었지만 또한 엉뚱한 결과를 일으켰다. 뉘 말따나 애문 주민들한테 불통이 튕긴 셈이었다.

지역에 내통분자가 한 둘이 아니라는 거였다. 전투경찰대에 자원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빨갱이와 내통했다는 혐의가

씌워지기 마련이어서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젊은이들은 무조건 전투경찰대에 지원해야 했던 것이다. 흑과 백의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개새끼 취급을 당하는 전향자에 내려진 철퇴는 더더욱 말이 아니었다.

 

  흰 눈이 풀풀 나릴 것 같다. 따스한 남녘땅에 나리는 눈은 포근한 이불을 닮았다. 그렇지만 난리가 난 겨울부턴 소담스런

눈송이는 그 자태부터 달리했다. 포근함 속에 담겨진 은밀함은 앙칼진 음성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었다. 윙,윙, 게다가

칼바람까지. 동백꽃이 만발할 땅에 북풍이 기를 쓴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초겨울 입구에 선 강바람이 귓전을

싸하게 만들었다. 아래쪽으로 굽어보면 연화리와 뱃석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보성강 줄기가 세월의 어깃장에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었다. 평화로움, 잔잔함, 유유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담 주위에 세워진 대竹발로 엮은 울타리 사이로

시린 바람이 들락거릴 걸 봐선 초겨울이 엉큼엉큼 다가선 게 틀림없었다. 으스스, 한기가 들었다. 뼛골이 응등그렸다.

호흡마저 중단하는 게 더 현명할 노릇이었다. 신열에, 그리고 오한 때문에 한잠도 이룰 수가 없었다. 참으로 묘하게 돌아가는

판국이었다. 보초를 선 야경꾼에게 박 순경이 어데 있는지 물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마지못해 원퉁이 골짜기로 정찰

나갔다고 조심스럽게 귀띔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이방인에다 적색분자, 공비 내통분자. 안면이 트인 사람마저 철저하게

외면하다니. 결국에는 믿고 믿었던 불알친구 박 순경도.

  밤이 깊어갈수록 야경꾼들의 외침마저 야차들의 아우성처럼 청각을 어지럽힌다.

  이상 없다. 이상 없다,,,.

  사방의 보초들이 아우성을 쳐댄다. 대창으로 무장한 부락민들이다. 풀벌레 울음소리마저 사라진 정적이 전신을 감싼다.

나는 엽연초를 한 대 몰아 피웠다. 전신이 침적沈積하는 느낌이었다. 엷은 한숨만 짙게 내뱉었다.

 

  묻지 말아 갑자생甲子生이란 유행어가 퍼진지 얼마만인가.

  1924년생. 불행한 시기에 태어난 생명들이었다. 한참의 나이 땐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당해 이름조차 우리 것으로

사용할 수 없었으며 우리 글 대신 일본어를 국어로 배워야 되었다. 그 뿐인가. 매일 신사神社에 참배해야하는 고역을

치루면서도 부끄러움도 몰랐다. 전쟁을 강요당하는 시절. 쇠붙이는 물론 곡물까지 일제관헌들은 무자비하게 수탈해갔다.

송키 껍질이나 감자로 끼니를 때우기 다반사였다. 게다가 세계2차대전이 불꽃을 피운 시절엔 징집연령으로 가장 알맞은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묻지 마라, 갑자생. 갑자생은 무조건 전쟁터로 징발되었다. 갑자생이라곤 씨알머리조차 구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많은 생명들이 태평양 푸른 물 속에서, 허허벌판 중국대륙에서, 동남아의 정글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도 일본군이란 이름으로. 천황만세를 부르며.

  엄청난 전환기였다.

  1939년엔 국민징용령 실시.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조선의 젊은이들 45만 명이

동원되었다. 거센 파도는 쉴 사이 없이 몰아쳤다.

  1940년 창씨개명. 1941년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 일제의 대미 대영의 선전포고로 세계2차대전. 1945년 8월15일

일본패망. 미소양군의 조선분활점령책 발표로 38선 이북엔 조선 인민공화국이 남쪽엔 대한민국이. 1948년 제주도 폭동.

여순반란사건.

  1950년 6.25일 북한 남침 시작. 6.28일 서울 함락. 9.15일 유엔군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

  9.28일 서울 수복. 그러나 10.25일 중공군 한국전에 개입으로 1951년 1. 4일 서울 다시 함락. 7.10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 시작.

  1953년 7.27일 휴전협정.

  멋모르고 일본을 위해 피를 흘리더니 같은 민족끼리 치고 박고. 거대한 전쟁영화는 언제쯤 끝날지 모를 일이었다.


   “야, 야,,,?”

아버지였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신 수를 써야 되겄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머리통과 꽁무니를 뭉떵 베어버린 형태여서 도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둔한 발음으로 한쪽 귀라도 쫑긋거려야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터라서 여느 쩍처럼 귓전으로 흘려버렸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어쩜 심각한  것도 같고 노여움이 가득 찬 음성이었다. 아버지는 좀처럼 화를 내실 줄 몰랐다.

웬만한 일엔 나 몰라라 딴전을 피우다간, 어머니의 쫑알거림이 시작되면,

  “얘들이니까 그렇지, 뭘 그려. 지들도 철이 들면 우리보다 더 잘 할 텐데 또 쓸데없는 걱정이야. 어서 나가서들 놀아라 잉”

  우리들의 기를 북돋아주셨다. 물론 불구자인 형을 배려한 탓도 있겠지만 아버지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며칠사이에

누리끼리한 얼굴에 잔주름이 몇 개 더 늘어난 건 근심이 그만큼 늘었다는 증거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부지?”

  내가 머뭇거렸다. 얼굴조차 화끈거려야 될 일을 아버지가 알고 계실는지 모른다는 자격지심이 앞섰다.

  “니가 지금 몇 살이냐?”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허지만 너무나 뜬금없는 말이었기 때문에 머뭇거리기도 저어할 뿐이었다. 새삼스럽게 아들의

나이를 묻다니. 자신의 나이는 몰라도 자식의 나이를 더 잘 아는 어른 아닌가. 형은 물론 내 생시, 게다가 사주까지 환하게

꿰뚫고 있었다. 언젠가는 알려지고 말 일이지만, 순영이와의 비밀을 모르고 계시는 게 분명한 터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린 녀석이 모로 터져 싹수조차 노랗게 변했다고 무안을 줄게 뻔한 일이지만 마음대로 안되는 게 그런 일인 모양이다.

언제라고 딱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 자리한 내 각씨는 오직 오직 아래뜸의 순영이었으니.

  묻지 마라 갑자생 수난이 시작되었다. 일제의 만행은 숨겨 논 이빨을 제대로 드러냈다.     연이은 승전보로 일본 열도는

물론 한반도까지 들떴다. 피립핀, 버마, 동남아의 해상을 거의 제패한 것은 물론 중국대륙의 깊숙한 지점까지. 게다가

진주만의 기습공격. 미국함대의 전멸로 미국 본토 상륙이 눈앞에 다가선 듯 기고만장이었다. 병력보충, 전쟁물자 조달,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었다. 일본은 물론 한반도 전체가 전쟁체제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나이 든 아저씨들이

주재소 순사들의 불심 검문에 걸려 징용에, 면 소재지에서는 젊은이라곤 무조건 전쟁터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꼬리를 이었다.

물론 확인할 길이야 없었지만 판국이 이상하게 돌아간 것만은 확실했다. 가락골 분이네 집에서도 곡성이 터졌다. 결국에는

토끼 입 맞춘다는 심심산골에도 무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고샅길에선 사람들의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문조차

낼 수 없어 꼭꼭 숨겨 논 이웃집의 울음조차 외면하는 무서운 풍경이 계속되었다.

 

  목사동 주재소(지서) 순사가 마을 입구 언저리에서 어정버정이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여우골에서

나물을 캐다가 집으로 내려온 분이를 날렵하게 끌어갔지만 너무나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머츰하니 구경만 한 채

누구하나 손 쓸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병아리를 낚아챈 살쾡이의 전광석화 같은 행위에 치만 떨뿐. 악에 바친 분이

엄마만 죄 없는 딸을 왜 잡아가느냐고 앙탈을 부렸지만 말장 허사였다.

  “바까야로, 천황의 명령을 불복종하면 어떻게 된 줄 알지?”

  다시금, 바까야로, 바보란 말만 되풀이 하며 긴 칼을 멋들어지게 흔들거리는 일본 순사는 야릇한 웃음까지 흘렸다.

  “야, 이 오살헐 놈들아? 사람도적이 따로 없당께. 뉘 놈들이 바로 인도적이여, 인도적. 천벌을 맞아도 삼대를 맞을 것인께

알아서 허드라고 잉.”

  아무리 무식하기 그지없는 시골 아낙네들도 세월의 흐름을 전혀 모른 건 아니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짐작만은 할 수

있는 터였다. 그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나라의 법  이니까. 참한 계집애였다. 귀밑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웃을 때는

하얀 덧이가 설핏 보여 한번쯤인가 안아보고 싶은 귀염성 있는. 순영이 또래였다.

  가녀린 순영의 몸뚱이는 비에 젖은 병아리처럼 내 품속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분이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나까오리 모자를 쓴 일본순사가 마을 언저리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언제 덮칠지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악명 높은

정신대의 차출 방법에 치를 떨기 전 겁부터 먹은 게 틀림없었다.

“나 어쩌지?”

순영은 몸만 떠는 게 아니었다.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어디선지 소쩍새가 울었다. 소딱장, 소딱장, 소쩍새의 울음이

아니었다. 분이의 울음이었다. 분이의 넋이 소쩍새의 빙의憑依를 걸친 것인가. 그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분이의 목 멘 절규로 들리다간 순영이의 목소리로 얼핏 변하는 것이었다.

  여우별이 나타났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높새바람이 불었다. 풀냄새가 코끝에서 살랑거리는가 싶었다.

어둠이 짙어가면서 내품는 대지의 냄새. 아니면 푸른 숲들이 내지르는 아우성들. 흰여울 같은 가시나가 하늬바람 같은

모양새로 울었다. 온 세상은 완전한 먹통이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쳐다 볼 수 없는. 여느 때 같으면 둘만의 오릇한 만남을

아무도 훔쳐볼 수 없게 만드는 우중충한 날씨가 그지없이 고마울 일이지만 그게 아니었다. 순영이와 나의 앞길에 드리운

검은 색깔의 너울 같았다.       

  “너무나 불쌍해. 분임이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이지만 무슨 이야긴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순영의 상체가 힘없이 허물어지며 내게 기대왔다.

  “오늘밤에 나 안 가질래?”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 내뱉은 말이어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아니 이 가시나가, 순영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촌뜨기 가시나가, 그것도 아직 덜 여문 풋과일 같은

가시나가 이렇게 되바라질 수 있다니. 슬쩍 훔치는 입술조차 부끄러워 홍당무가 된 얼굴을 숨기며 가슴팍조차 그악스럽게

떠밀던 순영이. 이, 나쁜 사람, 이럴라고 나 만나자고? 얼마나 앙당그렸던가. 내 쪽에서 무슨 말인지 얼핏 구별하기 힘들어

머뭇거리자 다시금 재촉하는 것이었다.

  “너 머스마지?”

  “,,,,,,,”

  “분임이 일만은 아녀. 어쩜 내 일일 수도 있어야.”

  순영의 눈자위에 가느다란 물방울이 서렸다. 어둠 속이어서 볼 수없는 것이지만 내 입술이 순영의 입술을 훑고 눈언저리를

스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일본 놈한텐 주기 싫응께, 네가 먼저 가져뿌러. 너한테 시집 안 가도 좋은께, 이 바보야, 어서,,,”

  울음을 삼키는 순영의 목소리를 따라 소쩍새가 다시금 청승맞은 가락을 어둠 속에 흩뿌리고 있었다. 순영의 몸매에서 설핏

풍긴 땜 냄새는 시큼한 게 아니었다. 너무나 풋풋한 풀냄새였다. 머잖아 지새는달이 보일 것 같았다. 해미조차 밀려오고.

밤이슬마저 축축했다.

  “어서야,,,,,,,.”

  

  나이가 덜 찬 큰 얘기들의 짝짓기가 유행되었다. 그래야만 정신대에 차출이 안 되는 것이었다. 동네방네 쓸데없는

소문도 안 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영이와 나 사이는 마을 사람들의 주선으로 보기 좋게 마무리되었다.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체.

  아버지의 음모는 난세를 헤쳐가기에 아주 그럴듯한 지혜주머니나 다름없었다.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처사였다.

음모의 핵심이 아버지의 입에서 나왔을 때에야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었던 것이다. 

“쥑여도 아니라고 잡아떼란 말이여. 배락이 내려 쳐도 볼텡이를 메어 부쳐도 아니라고 뻗대란 말이여. 알았지야.

이 애비 말을 명심해야 혀. 독립운동은 못 헐지언정, 왜놈들 앞잡이라니 말도 안 된 소리니까 말이여. 아무리 못났어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그 꼴은 못 봉께. 알았지야.”

  “저도 진즉부터 그런 생각을 했는데,,,.”

  “니가 언제부터 요로코롬 철이 들었냐?“

  철부지로만 알았던 형이, 그나마 몸조차 안 좋은 형이 어른스런 말을 하자 아버지는 대견스러운지 넉넉한 웃음까지 지으셨다.

  “다행이다, 다행이여.”

  어버지의 너털웃음에 형이 토를 달았다.

  “저, 순천 외숙 집에 좀 다녀올라요.”

  “갑자기 순천엔 뭘로?”

  “외숙이 보시던 책들을 빌려준다 하셨어요. 농투성일수록 책을 봐야 헌다고, 언제까지 우리라고 이러고만 살겠어요.

세상이 변해야지,,,.”

  시골에서 땅마지기나 일궈먹고 근근이 명줄이나 연명하는 아버지를, 몸조차 안 좋은 형을  그 흔한 농투성이로만

여길 수는 없었다. 어떤 세상이라고 감히 이런 생각을 가지다니. 아버지나 형이 새롭게만 느껴졌다.

  “조그만 참어라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틀림없이 올 것 같으니. 그때까지 몸조심하고”

  참으로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세상의 흐름이 약간은 보이는 것 같았다. 순사라도 마을 언저리에 나타나 어슬렁거리면

나는 원퉁이 뒷산 쪽으로 슬며시 숨었고 형은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일부러 그럴듯한 연기를 해대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한

형과 함께 논 밭일을 거둘 때마다 나는 형을 향해 부러 눈을 껌벅거렸다. 마을 사람들이 볼 때는 더 큰 소리로 형을 나무랐다.

진짜 형이나 된 것처럼.

  어머니는 마을 아낙네들과 어울려 품앗이 할 때마다 조심스럽게 수군거렸다. 정일이 사주 액땜을 하기 위해서

어렸을 때부터 형제간 바꿔치기를 했다우. 한 수 더 떠, 우리 정일이 아버지가 사주 하나는 똑 소리 나게 잘 봉께.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이라고. 좌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곳으로 이사를 온 건 우리들이 여 나무 살 먹었을 때였다. 마을에서 반마장이나 떨어진 산비탈에 게딱지같은

오두막집을 짓고. 어쨌든 아버지의 음모는 아주 정확하게 과녁을 뚫은 셈이었다.

  순천에서 모처럼 들린 외숙의 찌부러진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따, 자형도. 그렇다면 진즉 그렇게 말씀 하셔야제,,,”

  외숙도 속셈을 알았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재끼며 그래요, 그래요, 소리를 연발하더니 아주 얼토당토않은 말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역시 먹물깨나 먹어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훤하게 내다보는 외숙다운 말이었다.

  “그럼, 정이가 정일이가 된다, 그것 아닝게라우? 아암, 그럴수도 있제라우. 요새 듣자니 만주 쪽 독립군에 그 유명한

김 일성 장군이 있담서라우. 왜놈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오짐을 질금질금 흘린다는. 그럼, 우리 정이가 그 유명한

김 일성 장군 아들 김 정일이 된다 그 말 아닌 게라우. 참으로 자형 집에 경사 한 번 나뿌렀소 잉?”

  아무리 우스개 소리지만 김 일성도, 그의 아들이 김 정일이란 이야기도 내 생전 처음이었다. 형의 두 눈에서

얼핏 풍기는 광채를 발견한 것도.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형형한 형의 눈빛을 다시금 볼 수는 없었다.  

  두 살 터울인 형과 나는 얼핏 쌍둥이로 착각할 만큼 닮은 데가 많았다. 식구들은 안 그렇지만 처음 본 사람들은

불편한 다리를 보고 형제간을 구별한 게 더 쉬운 일이었다. 묻지 마라 갑자생을 구제할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외숙 말마따나 나는 느닷없는 독립군 사령관 김 일성의 아들 김 정일로 격상되었고 형은 동생의 이름인 김 정이로

격하되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던 사람들도 두 형제간의 바꿈질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목사동 주재소에서

영장이 나올 때도 간단하게 해치웠다. 갑자생인 내 이름으로 된 영장이었다. 형이 서슴거리지 않고 앞섰다.

  “왜 그러요? 난디라우.”

  “자네가 김 정이야, 갑자생?”

  “그렇소. 왜요?”

  형은 아주 멋진 연기를 해냈다. 한수 더 떠, 내 앞으로 된 징집 통지서를 천천히 훑어보고 나서 불편한 다리를

되똥거리며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섰다. 너무나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징집통지서를 향해 아주 멋진 거수경례를 올려

나이깨나 듬직한 일본 순사까지 감동하게 만들었다.

  “덴노 헤이카 만자이, 천황 페하 만세,,,”

  “요시, 좋아, 좋아,,,.”

  일본 순사조차 형의 돌출한 행위가 마음에  드는지 웃으면서 같이 경례를 올려 부쳤다. 

  “분명히 김 정이냐?”

  “그렇습니다.”

  형의 목소리는 너무나 당당했다.

  “함께 사는 젊은이는?”

  나이 든 일본 순사도 그렇게 어리숭하지는 않았다. 미심적은 걸 하나하나 따지는 것이었다. 범죄자를 취조하듯

  아주 세밀하게.

  “형입니다. 바로 위,,,.”

  “정말이냐?”

  “천황페하 병정이 되게 지원을 받아주실랑게라우?”

  형의 느닷없는 제의에,

  “바까야로. 이 병신새끼야.”

  일본 순사는 어이없는지 웃음을 흘리면서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를 끼적거리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별명이 있을 때까지 이 곳에서 떠나면 안 된다.“

  살얼음판 같은 세월이었다. 갑자생들은 물론 아래뜸에서 노무자로 끌려간 아저씨들, 분임이의 소식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알 수 없었다. 

 

  곡성경찰서를 습격하던 빨치산들이 퇴각한 뒤에도 국지전은 계속되었지만 토벌대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지는 해와 Em는 해와 같은 꼴이었다. 목사동에서만도 전과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원퉁이 골짜기에서 빨치산의

비트를 발각, 사살 2 생포 몇, 삼산 골짜기에서도 도주하는 적 사살 몇 명. 무전기가 어디론지 부지런히 전과보고를 하는 게

틀림없었다. 지서 주위를 둘러싼 대 울타리 틈새로 초겨울 바람이 넘실거렸다. 빨치산 주력부대 일부분이 봉두산 삼산을

중심으로 은거한다는 첩보에 따라 곡성경찰서 전투 지휘본부가 이쪽으로 옮긴 거나 다름없었다. 너무나 한적하기만 보성강

주변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들랑거렸고 주변 산골짜기에선 총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게다가 생포당한 빨치산은 물론

 나 같은 엉뚱한 혐의자들로 자그만 지서는 잠시도 한가로울 수가 없었다. 이 현상 부대의 곡성 경찰서의 습격은 무위에

끝났지만 경찰들의 피해도 만만치가 않았다. 승패를 떠난 감정싸움이었다. 토벌대들은 빨갱이 소리만 들어도 이를 갈았다.

녀석의 횡포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한참의 실랑이가 또 있었다.

  “김 정일이 옳제?”

  “아니라우.”

  사실대로 이야기 할 참이었지만 녀석은 이미 알고 있는 듯 입 가장자리에 희떠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알 필요도 없고

들을 필요도 없다는 투였다. 녀석이 바라는 내가 김 정일, 그러니까 형으로 인정한 것뿐이었다.

  “야 이 개새꺄, 니가 김 정일이 아니라면 진짜 김 정일을 데려오면 될 것 아녀? 그 문화부 차장이란 새끼. 내가 똑똑하게

말할까, 이번 곡성경찰서 습격 때도 나타났단 말이여.”

  “말도 아니여라우.”

  억울해도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그렇다면, 뭔가 켕기는 게 있지만 녀석의 말을 제대로 곧이들을 수도 없었다.

벌써 삼일 째였다. 심신이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였다. 밤이면 야경꾼들의 순찰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지만

그래도 햇살이 비추이는 한 낮보다 더 나은 일이었다. 무자비한 구타와 비명 때문에 온 신경이 마비되는 일은 없으니까.

  “저 새끼 죽여버려. 악질 빨갱이 놈 새끼.”

  청승맞은 비라도 나릴 일인가. 옆방에서 터져 나온 고함 소리와 자지러질 듯한 비명. 목청을 높인 자는 나를 취조하던

그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눈만 뜨면 어느 누구나 볶아대지 않고는 못 살 위인인 듯싶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녀석의

취조도 끝나는 법인데 오늘은 별 일이다 싶었다.

  야, 이런 호로 새끼,,,. 자지러진 비명이 다시금 전신을 옥죄게 만들었다. 어둠이 내려 쌓이는 목사동 들판의 허허로움은

보성강 건너 연하리 쪽으로부터 시작된다. 들말 면소재지에서 완만하게 경사진 신작로를 오리쯤 올라가면 가남촌을 거쳐

임시 초소가 있는 원정리에 도달한다. 고만고만한 산중다랑이 논보다 약간 큰 논배미들이 늘어서서 웬만한 들녘을

연상시키지만 그것도 삼산으로 통하는 원퉁이 골짝 입구에서 멈춘다. 그 언저리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임시초소가 있는

원정리의 코빼기가 아닌가. 바로 우리 집 근처였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총소리가 끝나질 안았다. 빨치산들의 아지트를

발견한 걸까? 전광석화 같은 토벌대의 집중 공격으로 비무장 빨치산대원이 몇인가 희생당할 게 틀림없었다.

이쪽 진지에선 무장공비 몇 명, 사살이라고 그럴싸한 전과보고에 신들이 날 것이고. 나는 총소리 나는 쪽으로 신경을

기울였다. 초소 밖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실탄지급을 받은 경찰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없는 게 보통 상항이

아닌 모양이었다.     

  “원정리 초소 기습이다,,,.”

  누군가 악을 쓰고 있었다. 천만뜻밖이었다.

  우리 집은 무사할는지 엉뚱한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순영이가 무사해야 할 텐데. 아니 그 안에 생겨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은. 순간 형의 얼굴이 어둠 속으로 슬쩍 나타났다. 남루한 군복바지였다. 허리에는 실탄이 장진되지 않은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 마을 입구였다. 내가 깜짝 놀라 형, 하고 부르짖을 땐 그 흔적마저 사라졌다.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땐 삼산

노루막이를 향하여 아주 여유 있게 움직이다간 구름처럼 사라졌다. 토벌대들은 형의 등짝을 향하여 마구 불 총을 놓고.

  출동 준비,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썰물 때의 바다 풍경이었다. 녀석의 목소리가 없어진 지서안의 풍경은 난리가 난

원정리 초소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녀석의 존재가 없는 것만으로도 평화가 온 건지 몰랐다. 녀석도 대원들을 이끌고

지원사격에 출동된 게 틀림없었다.

  “어쩌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며칠동안 코빼기도 안 비췄던 박 순경이 어두운 얼굴에 흐릿한 미소를 던지고 있었지만

절망감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이놈의 시상이 어찌께 될런고?”

  엶은 한숨이었다. 주위를 살피고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것이다.

  “형 소식 모른디야? 아무래도,,,”

  “뚱딴지같은 새끼, 자네도 한 통속이구나,,,”

  “아녀.”

  박 순경이 더듬거렸다.

  “자네 형은 말이시.”

  여순 반란 사건 직후 아버지와 외숙의 속닥거림이 마음에 걸렸다. 죽이고 죽이는 살벌한 마당에서 살아남은 방법이란

서울로의 탈출이 아니었을까. 형은 언제부터 그쪽으로 머리를 숙였을까? 어쩜 형은 살아서 산 속의 미아가 되었을까?

내 상상이 너무나 도약한 셈일까. 녀석의 말이 맞을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다시금 머리를 흔들었다.

  고문의 흔적들이 무서운 통증으로 전신을 서서히 옥죄기 시작했다. 멀리, 아주 먼데서 들리는 총성은 총성이 아니었다.

여름철의 귀뚜라미 소리로 변했다간 소쩍새의 울음으로도 변하고. 대 울타리 사이로 성겨 들어온 바람소리가 우,우 거리면

원정리 초소 근처에서 쏘아대는 총소리도 우,우 하는 것이었다. 깊은 어둠 속으로 전신이 천천히 침잠되었다.

  포성이 어둠을 내뚫었다. 목사동 지서에도 불똥이 번졌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원정리 초소가 빨치산들의 습격으로 불바다가 되었고 몇 명의 경찰들이 전사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초소 근처에 있는 목사동 초등학교도 잿더미로 변했다는 것이다. 

  다음 날이었다.

  우리 집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내 생애의 최초 정사를 벌렸던 너럭바위 곁에서 나는 하나의 시체로 널브러져 있었다.

너럭바위의 추억을 안은 채.  

     

      

        끝. 96매  한국소설 2008년 3월호.

 

 

 *원작출처 : [희구당집1618] -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ljbb1618

 

‘질거운뜻 부지런팔뚝 갖이고’
‘가가(家歌)’부르며 더욱더욱 나아가는
곡성 목사동 농부소설가, 이재백(李在白)
남인희 기자  

▲ 곡성 목사동 이재백씨 댁엔 할아버지대로부터

50년 넘게 이어져 온다는 가훈과 ‘집노래(家歌)’가 있다.

ⓒ 김태성 기자


“물오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를 때의 울음소리가 푸른 비 내리는 것 같다”해서 압록(鴨綠)이라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히는 석압로(압록∼석곡). 느릿느릿 순하게 흐르는 보성강 물길 따라가다

아미산 자락에 옴팍하게 안긴 마을 하나로 접어든다.
흐르는 듯 모나지 않은 고샅길을 만들고 있는 이끼 낀 돌각담들이 정다운 목사동이다.

 

실록을 쓰는 사관처럼 농촌 실상 기록
그 <돌각담>을 표제작으로 지난해 늦둥이 첫 소설집을 내놓은

이재백(69)씨가 이 마을(곡성군 목사동면 신전리)에 산다.

그는 고향을 지키며 소설 쓰는 농부다. 아니 농부 소설가다.

두 가지 일을 양 손에 들었으니 요새 사람들 하는 말로 치면 ‘투잡족(族)’이다.

주경야독이라고, 낮에 배밭으로 논으로 고샅으로 쏘다닌 발걸음은 밤엔 형광등 불빛 아래 그대로 컴퓨터에 옮겨진다.
<옛 사람들이 살아왔던,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많은 흔적들이 얽히고설킨 황토 구릉마을,

그 입구마다 자그만 비문이라도 세워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아픔이, 그리움이, 분노가, 함께 하는 마음이

절절이 스며 있다고…>.
소설집 《돌각담》에 붙인 작가의 말이다.

▲ 벼농사만 짓고 살던 마을에서 처음 배농사를 시작한 이재백씨.

가가(家歌)의 노랫말처럼 그가 품은‘질거운(즐거운) 뜻’과 ‘부지런(한) 팔뚝’덕에

80여 농가가 참여하는 곡성배영농조합에선 연간 500톤이 넘는 배를 수출하게 됐다.

ⓒ 김태성 기자


“젊은 사람들이야 이것이 전설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뭔 소린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겠지만,

우리의 족적에서 사라질 것들을 새기고 농촌을 그려낼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씁니다.”

잊혀져 가는 우리네 농촌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의 소설엔 마을의 역사나 농촌의 소소한 풍속들도

오롯이 재현되고 있으니, 소설가 이순원이 이 소설집에 붙인 평처럼

<그의 소설은 한 구석 새것에 대한 맹신적 경쟁이 없다.

이 체구 조그마한 늦깎이 작가는 늦었다고 서두르는 법 없이 자기 걸음으로 살아온 시대를 얘기하고

자기가 본 시대를 증언하며 또 이야기한다.>
서울에서 문예창작과를 나온 청년이 농촌으로 귀환했을 때, 사람들은 도대체 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농촌에 살며 농촌을 쓰기 위해서였죠. 지금도 후회는 없어요.”

오래 전에 변방의 문학으로 쇠락해 버린 농촌문학을 숙명인 양 고집하는 시대착오적인 외곬수.

그이가 마치 실록을 쓰는 사관처럼 농촌의 실상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 저녁마다 흙 묻은 장화를 벗는 농부이기 때문이다.
“소설 쓰는 이들 앞에서는 나는 농사도 짓는다 까불지 마, 허고

농사짓는 이들 앞에선 나는 소설도 쓴다 까불지 마, 허고 사는 것이지요, 허허.”

이 작달막한 어르신의 얼굴에 흐르는 봄햇살 같은 웃음을 대하노라면 ‘까불지 마’라는 엄포가

실은 어디서나 눌릴 것 없는 처지이면서도 늘 수그릴 줄 아는 겸양에서 나온 말씀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이생진 시인은

<시골에서 배농사를 하며 글을 쓰는 이재백/ 서울에서 시를 쓰는 내 손이 부끄러워>라고 쓰지 않았겠는가.

20호 자가일촌(自家一村)을 이루고 사는 마을.

6000여 평 배밭에 3000여 평 벼농사를 손수 짓고 사는 그이지만

혹여 조금치라도 서툰 일 앞에서는 나이 불문, “일헌 데는 니가 내 선생이다” 고개 숙이고

한 수 배우기를 꺼리지 않는다.

집앞 마당의 바위좌대에서-이재백   ⓒ 김태성 기자


벼농사만 짓고 살던 마을에 처음 배를 들여와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바꿔야 할 것은 늘 자꼬 바꿔치기해야 해요.”
전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진취적 기상은 이 작은 마을을 배 수출 단지로 바꿔 놓았다.

지금이야 ‘골짝나라’ 곡성의 ‘목사동 배’가 명성을 얻었지만

벼농사만 짓고 살던 이 마을에 처음 배를 들여 온 공로는 이재백씨 부부에게 있다. 
“나주에 혼자 가서 들판을 본께, 어디 과수원에서 아저씨가 전정을 하고 있어요.

음료수 한 병 사 갖고 가서 꼬치꼬치 묻고 한번 모셔다가 전정 배우고 그 뒤로는 혼자서 했지요.”

시집와서야 농사를 배웠다는 그의 아내 이행숙(62)씨는 타고난 장손며느리였나 보다.

가세를 지키기 위해 내 몸을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배농사를 시작했다.

시어머니 생전에 “니 손은 참 좋은 손이다”는 치하를 들은 걸 보면 이 며느리의 바지런한 성정이 짚어진다. 

그렇게 배밭을 일구어온 지 30년이 넘었다.

배영농조합법인의 부지로 쓰겠다고 1000여 평의 멀쩡한 배밭을 무상으로 내놓은 남편에게 아내는 할 말이 많다.
“판판한 평지 땅은 마을에 내주고, 마느래(마누라)는 쩌 높은 산비탈을 다리 아프게 오르락내리락 일하러 가라 허데요.”

덕분에 80여 농가가 참여하는 곡성배영농조합에선 연간 500톤이 넘는 배를 수출하고 있으니,

목사동 골짜기는 떠나가는 농촌이 아니라 바야흐로 돌아오는 농촌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내 식구보다 남의 식구 좋으라고 한 일이건만, 남편은 생색도 내지 않고 덤덤하게

“내 배밭 가차우니 내 일 보기도 편허잖여” 응수하고, 항변하던 아내의 얼굴엔 슬몃 웃음이 비친다. 
부창부수다. 부부는 닮았다.

▲ 그의 서재 희구당. 할아버지 때부터 지녀온 고서며 누렇게 바랜 옛날 문예지부터

요즘 신간 서적까지 사방으로 병풍을 두른 듯 촘촘하고 알뜰하게 정리된 것이

오래된 남와 어린 나무가 함께 자라는 숲에 들어선 듯.

ⓒ 김태성 기자


편지 한쪽도 금쪽처럼 간직하는 그 마음

5대째 120년 세월을 이어 온 그의 집.

그 한 세월, 고물고물 기어다니던 갓난쟁이가 혈기 푸른 청년이 되었다가 순하게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집이다.
바지런한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성 부른 그 집의 안팎엔 고요하고 정갈한 윤기가 스며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집은 외화내빈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속이 꽉 찬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사랑채에 들인 그의 서재엔 예사롭지 않은 필치의 현판이 걸려 있다.

희구당(喜懼堂). ‘즐거울 희(喜), 근심할 구(懼)’,

기쁨과 두려움을 안고 있는 처소라니 당호라기보다 인생 철학쯤으로 들린다.
“좋은 일 있으면 까불고 힘든 일 있으면 절망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이지만,

좋은 일 앞에서도 너무 까불지 말고 절망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즐거움을 찾으라는 뜻이지요.”

서재는 온고지신하는 이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할아버지 때부터 지녀온 고서며 누렇게 바랜 옛날 문예지부터 요즘 신간 서적까지

사방으로 병풍을 두른 듯 촘촘하고 알뜰하게 정리된 것이 오래된 나무와 어린 나무가 함께 자라는 숲에 들어선 듯.

그의 소장목록엔 가령, 공초-오상순에게서 받은 담배 한 갑이 그 시절의 추억과 함께 끼여 있는가 하면,

희부연 창 옆에 걸린 액자엔 누렇게 바래가는 흑백사진 한 장이 남모르는 진가를 가진 보물인 듯 연륜을 더해 간다

(사실은 어느 잡지에서 뜯은 것이다).

“나한테 들어오는 것은 신문지 하나라도 안나간다”는 그이.

글자를 다루어 영혼을 아로새기는 작업을 하는 그이기에 인쇄물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

“만든 이의 혼을 담은 것 아닙니까. 전라도닷컴도 한 200년 지나면 문화유산이에요.”
편지 한쪽도 금쪽처럼 여기는 그이의 집에서는 할아버지의 편지도 자랑스러운 역사고 유산이다. 

▲ 5대째 120년 세월을 이어 온 그의 집.

바지런한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성부른 집의 안팎엔

고요하고 정갈한 윤기가 흐르고 속이 꽉 찬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 김태성 기자


콩나물 깍대기도 없이 입으로만 전해지는‘집노래’

빛바랜 서책들 곁엔, 그것이 만들어진 세월을 짐작케 하는 표구 액자가 눈에 띈다.
할아버지대로부터 70년 넘게 이어져 온 가훈과 ‘집노래(家歌)’다.
만손일심(萬孫一心)하라 전해지는 가훈은

근면·진취요 ‘가도(家道)중심’은 화락(和樂)이다. 그 아래 씌어진 것은 ‘집노래’.

<깨끗한 피 궂센 힘 모아 닐우어/ 이천해 니여온 우리집 역사/ 겨레는 억천만 마음은 하나

/ 집을 위한 몸바친 우리집 주의/ 질거운 뜻 부지런 팔뚝 갖이고/ 더욱더욱 나어갈 우리집 가훈

/ 가론 땅갓 세로는 하늘과 함께 / 내 때 내손으로 될 우리집 가도(家道)>
이름도 생소한 집노래. 그는 “내 한번 불러 볼까요” 하고 첫 소절을 우렁우렁 부른다.

시조가락으로 할아버지가 부르던 것을 귀에 담아 기억한 것이다. 

“시골영감이 밥묵고 헐 일 없어서 헛폼 잡았는가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집안에 집노래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지요.

콩나물 깍대기도 없이 입으로만 전해지는 놈이니

음대 작곡과 다닌다는 집안 아이놈한테 악보로 한번 정리해 보라고 할 참입니다.”
노래 속 ‘질거운(즐거운) 뜻 부지런(한) 팔뚝’을 좌우명처럼 살아가는 그이.

산등성이 희디희게 덮었던 배꽃들 다 지고 나면

낮으로는 새 잎 푸른 자리마다 종종거리고,

밤으로는 희구당 문 앞에 대숲 바람 소리 청정하게 흘려 놓고

오늘 아니면 새기지 못할 글을 새기고 있으리라.

기사출력  2007-05-07 16:53:13  

ⓒ 전라도닷컴

 

*출처 :광주전남소설가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 어이-쇠

 

 

 

* 글이 있는 돌각담 *

 

 

돌각담 육필비-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신전리

 

어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어른이 되는 것이어서 그 아이도 어른이 되었지요.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해서 서울로 왔다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닌 것 같아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고향사람들과 비료를 나누고,

고향 산들에는 과일을 심고,

시간이 나면 젊은 날의 초상을 그렸지요.

그러기를 40년.

코 흘리개 아이들도 성장해 가정을 꾸리고,

어느덧 그에게도 황혼이 왔지요.

그 어느 황혼의 시간에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만들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틈틈이 그가 그리던 젊은 날의 초상은,

그를 소설 돌각담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58세에 신인문학상을 받게 된 것이지요.

 

 

 

무어 농촌운동이 별스러울 게 있겠어요.

평생을 농촌에서 살면서 농업을 하면 그것이 농촌운동이지요.

허울 좋은 말보다 농촌 지키면, 그것이 진짜 농촌운동 아닌가요.

낮에는 농사, 밤에는 글쓰기.

평생을 그와 함께 있었던 농가의 돌각담.

이제 그 돌각담이 소설가의 꿈이 아닌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출처 :좋은 사람들 두레 원문보기   글쓴이 : 이재범

 

* 글이 있 는 돌 각 담 *  

 

인적조차 보기 드문 이 고샅길을 돌각담길로 가꾸고자 하는 마음은 별난 아름다움입니다.

그렇지만 더한 아름다움은 흙냄새 풍기는 순박한 마을 사람들의 고운 심성(心性)입 니다.

이 흔적痕迹은, 먼 후일後日에도, 희미한 달그림자로,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돌각담”의 형상화로 마을길을 아름답게 꾸미는 한편,

이 골짜기와 인연이 있는 분들의 육필(肉筆)을 돌각담 속에 숨겨 놉니다.

풀잎보다 싱싱한 모습으로,

고향 사랑의 잔 잔한 진혼곡(鎭魂曲)으로, 또한 글 자리의 디딤돌로...

 

*돌각담 사이를 장식한 글들.

 

<안내문>

 

글에 취(醉)한 돌각담은

하늘 아래 가장 쓸쓸한 땅에 있습니다.

햇살조차 머뭇거리는 이 골짝에

마을 사람들의 자화상自畵像을 남깁니다.

 

이 장 : 정 정 태

새마을지도자 : 이 봉 안

 

목사동 면장 : 마 덕 숙

총무계장 : 한 상 백

 

단기4341년 늦가을에. 마을 상징문

----------------------------- 

 

1)

 

신 전 리 봄

 

/임 보

 

아미산 산자락

대숲 마을 이른 봄 배 밭에

꽃이 일면

돌각담 골목마다

은 웃음들

떠가 던 흰 구름도

길 뭠추네

 

1940년 서울대 국문과. 현대문학 시 추천.

시집. “장닭 설법” “은수달 사냥” “가시연꽃” “자연학교”

충북대. 정년퇴임.

 

2)

 

/곽재구

 

외로운

해와

달이

잠시 머물러

지친 발걸음 쉬어가는 이곳

 

꽃과

바람과

새들의 춤이

인간의 주름살 곁에

오래 오래

머물은 이곳

 

그대여

문득 뒤돌아서서

바라보는 길들

또한

사랑스럽지 아니한가

 

/곽 재구

 

1954년 숭실대 대학원.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사평 역에서” “낙타풀의 사랑” “삶을 흔들리게 하는 것들”

순천대학.

 

 

3)

 

/공선옥

 

어둠이 좁은 방안에 밀려든다

어둠 속에서 나는 꿈틀한다.

무엇인가 꿈틀한다.

그곳은 깊고 어두울 것이다.

모든 생명이 움트는 곳은 어디나 다아 한가지로,

 

공 선옥 단편소설 “피어라 수선화” 중에서

 

 

1964년 전남대. 창작과 비평에 중편으로 등단.

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명랑한 밤길‘ ”유랑가족“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4)

 

입춘 무렵

 

/윤 석주

 

소설 쓰며 배농사 짓는

싱건지 맛 그만인 목사동 李白 兄네

정월 초닷새 배곯은

달빛만 가득한 마당가

기방에서 쫓겨나 사립문

기웃거리던 梅花란 년

싹수 노오란 열일곱 고 가시내

지난 겨을

상사병 지독히도 앓터니

물오른 얼굴에 뾰루지 툭툭 불거졌네.

오매 저걸 어쩔거나

 

/이천팔년 늦가을 돌나무가 쓰다

 

1947년 시와 사람 신인상

시집 “잠든 숲에 사랑을 묻다” “해의 다비식”

 

 

5)

 

목 탁 2

 

/차 창 룡

 

몇 억 광년의 세월이 흘러 별빛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속도는 보이지 않는 소리이다.

 

날아가라 어서 목탁 소리여

이 목탁 닳고 닳아 먼지가 되면

돌아오리 보이지 않는 속도로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며

 

아득한 광년의 거리 너머

빠른 속도로 천천히 떨어지는 목탁 소리

별은 먼지이므로

눈에 들어가 눈물 흘려보낸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여준다.

 

1966년 중앙대 대학원.

“문학과 사회” 로 등단

시집. “나무 물고기”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인도 신화”

김수영 문학상. 중앙대. 경기대. 서울여대 출강.

 

6)

 

/이재범

 

이 주차장에서 마을로 들어가니

확 트인 바다가 보이며 마을이 나타났다.

이아 마을, 그리스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답다는 곳이다

파란 지붕에 그리스정교회식 십자가를 단 교회들

그 사이로 넓은 날개가 달린 풍차들

히피서커스가 만개한 푸른색 지붕의 하얀 작은 집들,,,

이아 마을의 첫 인상은 그랬다.

이른바 카사비앙카(언덕 위의 하얀 집)가 아닌가?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보이지만

실은 오랜 세월 척박한 자연 속에서 삶을 일구어 온

이곳 사람들의 땀이 배인 곳이다.

 

/이 재범 “나의 그리스 여행” 중에서

 

1951년 성균관대학.

“슬픈 궁예” “한반도의 외국군주둔사” “나의 그리스 여행”

경기대. 경기도문화재 위원장.

 

7)

 

/조용헌

 

인간을 연구한다는 것은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고

자연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간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이치는 그때마다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있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태풍을 보고 인간사를 예측할 수 있다.

난세의 조짐을 미리 보는 것이다.

하늘에는 측량하기 어려운 비바람이 있고

사람에게는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화복이 있다.

 

/조 용헌. “사주명리학 이야기”에서

 

1961년 원광대학교.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 연제중.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고수기행” 방외지사“ ”사주 명리학 이야기“

조선일보 논설위원. 원광대.

 

8)

 

개 떡

 

/문 순 태

 

내 유년의 초록빛 하늘에

개떡 하나 둥둥 떠 있다.

배고파 눈 질근 감으면

개떡 같은 보름달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 희망은 개떡이었다.

어머니,

어릴 적에 맛나게 먹었던

보름달 개떡

어디에 숨겼어요

쫄깃쫄깃 들큼한 희망의 맛

돌려주세요.

 

1941년. 조선대. 한국문학으로 등단.

소설 “징소리” “철죽제” “타오르는 강 7부작” “정읍사”

전남일보 편집국장. 순천대. 광주대. 정년퇴임.

이상문학상 특별상. 문학의 집 생오지.

 

9)

 

/박 혜강.

 

천지간에 꽃잎 흩날리던 날,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생의 무게가 얼마나 버거운 것이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어떻게 변하는지.

슬픔은 슬픔만큼 깊어지고, 슬픔은

슬픔만큼 넓어지고, 슬픔은 슬픔만큼

커졌다가 마침내 그 슬픔을 먹어치우고

또 그 슬픔을 넘어 이름 모를 꽃으로 다시

피어나게 될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무등일보 연재소설 “풀잎으로 눕다” 중에서

 

1954년. 조선대. 문학예술운동에 중편으로 등단.

소설 “ 운주 5부작” “도선비기” “조선의 선비”

광주전남 작가회의. 광주전남소설가협회 회장. 역임.

 

10)

 

/백시종

 

돌각담의 아름다움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참혹한 비극을

서정적인 문체의 돌과, 탐구

적인 시각의 돌과, 따뜻하지만

엄숙한 목소리의 돌과, 연민의

돌들을 생김새대로 차곡차곡 쌓아

놓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10월. /백 시종.

 

1944년 서라벌예대.

대한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 현대문학 추천.

소설 “돈 황제” “걸어 다니는 산” “환희의 끝” “서울의 눈물” “물”

한국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채만식문학상. “계간문예” 주간.

 

11)

 

/이근배

 

어머니가 매던 김 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

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思

想을모른다 어머니가

思想家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平生인 것을

모른다

 

졸시, 냉이꽃의 일절을

 

/사천-이근배 적다.

 

1940년 서라벌예대 문창과.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노래여, 노래여” “한강” “시가 있는 국토기행”

시인협회회장 “한국문학” 주간역임.“문학의 문학” 주간. 재능대. 예술원 회원.

 

12)

 

/이명한

 

뜻이 조금 다르더라도

몸을 스치며 걸어가다 보면

얼었던 마음이

어느덧 따뜻해지는 것을

南과 北이 어찌 다를까.

저 푸른 하늘 함께 이고

비단 같은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아

 

이 명한 :1932년 조선대.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황톳빛 추억” “달뜨면 가오리다”

광주전남문인협회장. 광주전남 민예총 회장역임

 

13)

 

/이순원

 

대부분의 행성이 자기가 지나간 자리를

다시 돌아오는 공전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런 질서와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

이란 일은 모두 2천5백만년을 주기로

되풀이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2천5백만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지금과 똑같이 여기에 모여 오늘 우리

곁으로 온 별을 쳐다보며 이야기할겁니다.

 

소설 “은비령” 중에서

/이 순원

 

1958년 강원대. 문학사상 신인상.

은비령” “말을 찾아서” “순수” “아들과 함께 걷는 길”

효석 문학상. 한무숙문학상.

 

14)

 

/임철우

 

한때 우리는 모두 별이었다.

저마다 꼭 자기 몫만큼의 크기와

밝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채,

해 저문 하늘녘 어디쯤인가에서,

꼭 자기만의 별자리에서

자기만의 이름으로 빛나던,

우리 모두가 누구나 다 그렇게

영롱한 별이었다.

 

/임 철우 “그 섬에 가고 싶다 중에서“

 

1954년. 전남대.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소설. ”봄날 5부작“ “백년여관” “그 섬에 가고 싶다” “등대아래 휘파람”

단재상. 요산문학상. 이상문학상. 한신대. 교환교수로 중국에.

 

15)

 

/채희윤

 

도대체 누가 이 보리를 심었을까. 불하받은

땅이라서 아직 집을 짓기는 싫어서 그 대신 낭만을

심어 보자고 심은 것일까. 아니면 저 아파트에

서, 자식들에 얹혀사는 시골 노인들이, 억지로 버리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의 터에 파종을 했을까?

이제야 그는 조금 전 노인네들이 그들이 아닐까 생각

했다. 그들이 젊음을 그리워하듯이, 옛날 보리밭에

서의 정사를 생각하며 기분을 내 보려 자식들

몰래, 이 한밤에 나왔을까? 도대체 누구일까.

이렇게 푸른 절망의 씨앗을 파종하고, 퇴색한 상처를

되살리는 사람은.

 

소설 “밤, 견인의 시각” /채 희윤

 

1954년 서강대 대학원. 한국일보 신춘문예.

“별똥별 헤는 밤” “스무고개 넘기” “곰보아재” “소설 쓰는 여자”

광주전남 작가회의회. 광주전남소설가협회 회장 역임. 광주여대.

 

 

16)

 

이런 꿈 한자락

 

/천 승 세

 

 

모지락스러운 세상 목숨 벼르노라 사대육신

눅쳐지는 날엔 이런 꿈 한 가닥 담은 단

봇짐 들고 길 떠나보자.

 

섬도 아닌 땅 땅도 아닌 섬 한 곳 물색해서

자란자란 띠 돌리는 물길 모재비 헤엄질로 건너

연화리에 오똑 올라 풋각시 허릿매 같은

환한 길 한골로 닦아 목사동 되짚어 오를 일.

아직도 즈런즈런 젊디젊은 통명산 벼룻길

달근달근 타내려 필봉 서벅돌 틈 낙낙한

자리 한 곳 골라 곡성땅 마지막 파시

주렁주렁 키우는 감나무 한그루로 희우둠이 서서

붓대 쥔채 날밤세우는 신전리 재백(在白)이의

새하얀 새벽이나 지켜볼꺼나

 

1939년 서라벌예대. 성균관대.

동아일보 신춘문예. 국립극장 장막극 현상공모 당선.

소설 “맨발” “혜자의 눈꽃” “낙과를 줍는 기린” 시집 “몸굿“

 

17)

 

/한승원

 

거문고는 왜 신의 악기(神 琴)

인가 수많은 누에고치들의

순절 때문이네. 그들의 몸

비틀어 꼰 울음은 혼의 음

되어, 그 음은 빛이 되어,

그 빛은 새가 되어 펄펄

하늘로 날아가네.

 

詩, 글씨 / 한 승원

 

 

1939년 서라벌예대 문창과.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 “동학제 7부작” “해일” “원효” “추사” “아제아제 바라아제” “목선”

이상 문학상. 김동리 문학상. 수상. 해산토굴에 칩거. 조선

 

18)

 

목 사 동 연 가

 

/최 정 주

 

목사동 신전리 마당 넓은 그 집에는

배꽃같은 사랑이 살아요. 떠난 사랑으로

가슴에 꽃병이 들어 아픈 날이

주인 몰래 한번 다녀 가시지요

운이 좋으면 소쩍새가 부르는 사철가

한 대목 들을 수 있고요. 주인에게 들키

사랑같은 배 맛도 볼 수 있지요.

 

1951년 원광대 국문과.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소설 “아리랑” “흰소” “일지매” “안개” “황진이”

백제예술대

 

19)

 

섬으로 가는 2박 3일

 

/이생진

 

이렇게 가족 몰래 사는 가족이 있었던가

모이니까 한 식구 같다

남원을 지나

곡성에서 이재백 소설가

돌각담 같은 순수한 사람의 손

진갑이 훨쩍 지난 것이 허무한 게 아니라

이런 만남이 고마워.....

고목에서 예쁜 꽃을 피우고 싶은 것은

과욕이 아니리라

생명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는 방법이다

 

시골에서 배농사를 하며 글을 쓰는

이재백

서울에서 시를 쓰는 내 손이 부끄러워

그의 손보다 먼저 내 얼굴에 미소를 바른다

술이 맛있는 것도 이런 손 때문이리라

그는 무궁화호에서 내려

다시 곡성에서 헤어졌다

이 세상에 태어나 글을 쓴다는 거

술을 마신다는 거

그리고 얼굴을 마주보며 취한다는 거

2박 3일은 그것을 확인하는 술잔이다.

 

1929. 국제대학.

현대문학 추천, 그리운 성산포. 바다에 오른 이유. 나의 부재.

윤동주문학상, 그리운 성산포로, 제주명예 도민증.

 

<1> 글 비(碑) :자연석19 개

<2 >돌각담 길이 13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