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碍堂·李時明◈
<역사인물전>-李伯(이백)과 杜甫(두보)
Demian-(無碍)
2012. 8. 28. 10:12
이백(李伯)
李伯(이백)과 杜甫(두보)
두보(杜甫)
모두 5만여 수에 달하는 唐詩(당시)는 기원전의 周(주)대부터
남북조시내까지의 1천6백여년 동안 생산된 시(詩)가
보다 양적으로 두세배가 될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다양성과 창조성이 그 어느 시대보다 풍부했다.
이렇듯 화려한 唐代(당대)에 활약했던 이백과 두보야말로
각기 개성과 업적을 남긴 중국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백(李伯)의 자는 太白(태백)으로,
이백(李伯)의 자는 太白(태백)으로,
701년 중앙아시아에서 한족 출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西川(서천)으로 옮겼으나,
25세에 집을 떠나 세상을 홀로 떠다니던, 그는
40여세에 즈음하여 잠시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다시 방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당의 역사는 물론
중국사의 향방을 바꾸어 놓은 安綠山(안록산)의 난(755-763)에 관여하여
형벌을 받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그는 다시 유랑의 길에 올라,
마침내 762년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詩仙(시선)」이라 불리는 이백은
「詩仙(시선)」이라 불리는 이백은
생애를 거의 방랑길에서 보냈으며,
주로 낭만적인 성향의 시를 1천 수 이상 남겼다.
그의 시는 대개 시풍이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 사용이 명쾌했으며, 그 사상적인 기반은 도교(道敎)였다.
비록 낭만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당시의 귀족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짙게 담겨져 있다.
두보(杜甫)는 712년 河南(한남)에서
두보(杜甫)는 712년 河南(한남)에서
당대의 시인이었던 杜審言(두심언)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거의 관직에 기웃거리지 않고
일생을 가난과 방랑 속에서 보냈다.
약 1천4백수에 달하는 그의 시는
강한 사회성을 띠고 있었다.
즉 부패한 사회와 비참한 현실, 불합리한 윤리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국가와 민중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그대로 노출시겼던 것이다. 특히 그는 시를 통해
안록산의 난 동안 전화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고통을 대변했다.
이백(李伯)이 시선(詩仙)이라는 별명을 가진 반면
두보(杜甫)가 「詩史(시사)」라고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사회성 때문이다.
또한 이백(李伯)이
현실보다는 일상을 벗어난 환상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주력했다면,
두보(杜甫)는
보다 현실적인 소재를 보다 현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대조적인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시인은 서로 끈끈한 교분을 지니면서 지냈다.
***
이백(李伯)
이백(李白/701~762)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산둥[山東]·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詩)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남릉(南陵:安徽省)·
안릉(安陵:湖南省)·남릉(南陵:安徽省)·
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원단구(元丹邱)·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났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杜甫)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그 후, 그는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깡패들)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大鵬),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杜甫)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杜甫)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李伯)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백(李伯)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蕭士)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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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杜甫/712~770)
중국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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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杜甫)
두보(杜甫/712~770)
중국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랑저우[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초당(初唐)의 시가
그에 앞선 육조(六朝)·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