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백(李在白)·단편소설 방

[단편소설] 고샅길- 이재백(李在白)◈소개작품◈

Demian-(無碍) 2011. 3. 5. 19:54

 

[단편소설]

 

고  샅  길   

 

 

         /이재백 (소설가)     
  
 

옛 사람이 되어 옛 마루에 앉아 옛 마음을 보는 것은 시공과 상상의 초월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가로 놓인 구름다리를 무시로 왕래한다는 것, 또한

신선들의 유영遊泳이나 매 한가지일 것이다.

저승과 이승의 문턱조차 분별 못하는 어리석음을
이인異人의 행위라고 일컫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초군목동이라고 불러야 알맞을 내가 언감생심 그런 모양새를 닮아가다니. 
어쨌든 내가 그런 꼴이다. 마루 끝에 앉아 눈만 치뜨면 마주보이는 앞산, 필봉筆鋒의 끝부분은

가슴에 박힌 대못처럼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로 남은 것도 요즈음의 일이다.

매일 보는 필봉의 끝자락이 예사롭게 안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마을 입구의 고샅길을 거닐었던 많은 사람들조차 언뜻언뜻 만나다니.   
고샅길의 풍경이 언제부터 이렇게 적막강산으로 싸늘하니 변했는가.

명절이면 웃음소리와 오가는 발짝 소리들로 몸살깨나 쳤는데 무주공산으로 변하여

깊은 밤이면 유령이라도 출몰할 것처럼 으스스해졌다.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다거나,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런 노랫가락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웬일인지 낯설기만 하다.
  한 잔 걸치면 질펀하게 싸지르는 육자배기 타령도 요즘엔 시들해졌다.

  혼자 있어야 하는 밤에는 더욱 그랬다.
  무조건 전화기에 매달려서. 다이알을 돌렸다.
  무전여행이라도 가려는가. 무임승차권을 구하려는 무뢰배나 다름없었다.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 천리 밖 사람,
죄다 만날 수 있는 기적의 승차권으로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다이알을 무작정 돌리다 보면 그리운 사람도 이따금
만나는 것이다. 씨도 안 먹히는 허나마나 한 소리지만 한참 시부렁거리고 나면 허허한 가슴이 풋풋해지는 것이다.
의외로 많이 나오는 통화료가 부담스러워 쓸데없는 전화질은 안 하리라고 작심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정신이
총총할 때의 말이지 한 잔 걸치고 나면 굳은 결심은 허나마나한 꼴이 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호젓함이
가슴을 짓누를 때면.
전화질을 안 할 땐 비 나리는 고모령이나 불효자는 웁니다 목포의 눈물, 그런 가락들을 가사나 음절조차 죄다 무시해버린 채,
자작 작곡이나 한 듯이 멋대로 흥얼거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허지만 이런 짓을, 한 잔씩 걸치고 거나하게 취할 때마다 무시로
중얼거리다 보니 어느 듯 애창곡이 되어버렸고 게다가 그게 가슴에 와 닿는 거니 딴죽을 걸더라도 그만둘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게 돼버렸다. 가락이란 리듬이 있어야 하고 그 리듬에 이끌림이 있어야 하는 데 숫제 이런 경고쯤이야 재우치듯 짓이겨버린
터라 나름대로 나만이 느끼는 감동은 사실 유별난 것이다. 소싯적의 육자배기 가락에서 느낄 수 없는 새로움, 고소한 맛보다
더 진한 맛이 이럴까 싶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흙탕 속으로 허우적거리며 깊이 침몰이 된
나머지 소리돌림으로 배워 마르고 닳도록 뇌까렸던 육자배기나 춘향가 일절 마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아빠 그런 노래가 어디 있어? 무슨 노랜지 통 모르겠다. 아빠 다음에 올 땐 좋은 테이프 몇 개 사다줄 게, 그대로 꼭 배워 잉. 
뒷말은 웃음으로 흘려 넘겼지만 보나마나 한 소리였다. 음정 가사 박자 하나도 안 맞으니 테이프를 틀어가며 올바로 배우라는
충고나 다름없었다. 두고두고 보고 싶은 막내딸 경희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고 이뿐 막내딸 생각만 하면 절로 가슴이
찡해지는 것이다. 늘그막에 생각지도 안했는데 그야말로 돌니처럼 태어나서 서운한 맘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고추를 달고
나온 것보단 지금 와서 생각하면 백번이나 더 잘한 노릇이었다.
 “이 나이에 뭔 망령인가. 보기하곤 영판 틀리단 말이시.”
  알만한 사람들은 예순이 다 된 나이에 얘기 아버지가 된 걸 축하하면서도 짓궂은 농담을 토씨로 매기는 걸 잊지 않았다.
 “재주 용하네, 나도 그런 기술 한 번 가르쳐 줄란가?”
 "에끼 이 사람,,,."
 "흐음, 그나저나 참 잘했네 그려. 그것도 만년 복이란 말이시."
  다 타고난 팔자소관으로 탓했지만 서운 한 맘은 오랫동안 가슴 한 복판에서 그림자를 지울 줄 몰랐다. 그래도 고추라도 달고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명치끝에 걸리면 좋아하던 막걸리 맛조차 달아나기 마련이었다. 경운기를 몰고 창촌 장에서 돌아오던
 날을 생각하면 쓴 웃음이 안 나올 수 없었다. 
차라리 고추 줄을 걸까? 헛간 모서리로 경운기를 몰아넣고 짐칸에서 보디갈치 몇 마리와 미역가닥을 챙기면서 나는 씨부렁
거렸다. 산후의 집치곤 뭔가 썰렁한 기분이 앞섰던 것이다. 아무리 서운하더라도 모양새는 제대로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대문 칸에 금줄을 치면서였다.  
  안식구가 방안에서 악을 바락 썼다. 들어서는 안 될 비밀이나 된 것처럼 혼자 뜻 없이 중얼거리는 말을 엿들은 게 틀림없었다.
 “왜 그려? 귓구멍 찢어지겠네.”
 “왜 내 탓만 하는 겨? 죄는 누가 지었는디.”
 “거 무신 생뚱맞은 소리단가? 몸조리나 잘 할 노릇이지 웬 악만 쓰는 겨, 잘못하담 간땡이 떨어지것다. 게다가 죄다니?”
 “그렇지 않아도 불난 집에 부채질이여? 늦둥이 난 게 내 죈가, 이녁 죄제,,,”
 “난 또 무신 소리라고.”
  세치 혀를 잘 못 놀려 일통을 저지른 탓에 나는 허참을 연발하며 뒷걸음질만 쳤다.
 “보란 듯이 잘 키울 테니 걱정 놓으시라고요. 참말로 정내미가 뚝 떨어지요 잉. 아빠란 사람이 헐 소리가 따로 있지,,,.”
  그러고 보니 대꾸할 할 소리가 없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너무나 큰 상처를 입힌 셈이었다. 경희가 커갈수록 이뿐 짓만
  가려서 하는 걸 보면 문득 그때 일로 쓴 웃음이 앞서는 것이었다.
  저녁거미가 야트막한 뜰 방 밑으로 스멀스멀 내려앉았다. 
  망할 녀석들이 며칠동안 왜 전화 한 통화도 없냔 말이여, 은근히 서운한 맘이 일어났다. 노랫말을 제대로 해라고 테이프를
사서 보낸 것보다 이따금 한통의 전화가 더 간절해졌다. 햇살 듬직한 대낮이야 별일 없었다. 정신없이 써대다 보면 그런 걸
탓할 시간도 없으려니와 그런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는 터였다. 논두렁 물꼬 보아야지 비료기가 어느 쪽이 부족한지 논배미
구석구석까지 관찰하다 보노라면 설핏 떠오른 아침햇살이 점점 영글어져 열기라도 확확 풍기면 얼른 그늘로 발길을 옮겨야지.

 해 논일은 하나도 없는데 마냥 바쁘기만 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뿐인가. 밭머리 귀퉁이에 심어진 고추도, 집안 텃밭에
심어놓은 상추 같은 푸성귀라도 제대로 돌보아야지. 때 안 놓쳐 농약도 뿌려야지. 눈코 뜰 새 없이 몸을 나대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할 일이였다. 한 몸이 두 몸이 되도록 부리나케 움직여도 해 놓은 일은 하나도 안 보이고 할 일만 태산같이
쌓여졌다. 어느 미친 녀석이 농한기란 말을 했는가 모르지만 참으로 한심할 노릇이었다. 농사짓는 사람 물정을 몰라도
그렇게 모를 수가 있는지 의문스러울 일이었다.  
어느 듯 둥근달이 봉싯 떠올랐다. 고샅길 막다른 골목까지 소소소 밀려오는 바람소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귀밑이 간지럼까지
타는 것이다. 마을 입구에 서있는 회나무께로부터 시작된 소슬바람은 한낮의 더위가 시작되면 이렇게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효자라니? 무슨 뜬금인가. 어이없어 웃고 말았지만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불이 나는 선풍기 모터로 땀을 죽이는 축이나 소슬바람에 더위를 던지는 몸짓이나 매 한가지 아닌가.
모실 댁이나 오죽 댁 같은 데선 에어컨을 설치하여 더위를 몰아낸다고 부러워하는 모습들이 역연했지만 그것도 한두 해가
지나면서 시새움 반 두려움 반의 눈짓들도 평상시로 돌아오고 말았다. 시원하긴 한데 오랫동안 틀면 머리가 어지럽다는 것이다.
 웬만한 더위야 청솔그늘이나 미풍으로 땜질하는 게 더 현명하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알아차린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털털거리는 선풍기의 스위치를 돌려버렸다. 작고 좁은 고샅길 모퉁이를 어떻게 헤집고 밀어 온지 알 길 없지만 가슴의 옹이까지
 시원스레 제거해주는 살살 바람을 신기하게 여긴 일은 한번도 없었다. 예로부터 그러했고 먼 후일까지 이 영험함은 계속될
거라는 이유조차 따질 필요가 없었다.
  선풍기의 드르륵 소리가 끝나고 나선 한참의 적막이 코딱지만한 추녀 허리께를 감돌았다.  멎었던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모기떼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요런 싸가지 없는 것들이. 밋밋한 등짝부위를 뾰족한 주둥이로 사냥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뜨끔한 자리를 딱 소리가 나게 손바닥으로 두드리면 그만이었지만 이즈음엔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아삼아삼하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현상이라곤 아예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느닷없이 여우별이 나타났다가
사라진가 하면 멀찍이 보이는 필봉이 엉금엉금 눈앞으로 다가오다간 곧장 제자리로 돌아가 심한 혼란 증에 사로잡히게 한 게
어디 한 두 번이던가. 게다가 윙윙대는 귀 울음들. 느닷없이 노고지리가 우 짓는 듯 하여 한 쪽 귀를 쫑긋거리면 자드락길에선
장끼가 푸덕거리고.   
 “야? 야?”
  누군가를 향한 절규나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끝맺음이 우둔하여 무슨 소린지 분명하지 않았다. 어쩜 우우하는 겨울바람의
차가운 음정 같았다간 낙엽끝자락에 걸치는 재넘이 소리인 것도 같았다. 같은 다이얼을 몇 번이고 돌렸다.
수신자는 부재중이지만 나는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퇴근시간 따위야 안중에 없는 나였기 때문에 느낌의 색깔은 엄청나게
틀렸다.
  요놈의 자석들, 애비가 좋아하는  술 좀 마셨다고 괄세여?  세상이 말세로다 말세,,,
  누구를 향해선지 밑도 끝도 없이 또  욕설을 퍼부어댄다.
 “야, 이놈아 아무도 없냐?”
목구멍에선 가래가 지르르 끌어 숨넘어가는 소리처럼 갸릉갸릉 했다. 술 냄새조차 적당이 풍긴데다 얇은 마고자조차
벗어부친 상체가 모기들의 먹잇감이 되어 회쳐진 상태가 된 줄도 모르고 나는 괜히 전화 탓만 해대는 것이다.
머릿속에 입력된 전화번호야 겨우 몇 개였지만 정확한 건 하나도 없었다. 기억나는 대로 다이얼을 부지런히 돌렸지만
되돌아오는 건 빈 신호음뿐이었다. 아무도 없음, 전화 받는 사람 없음. 인간이 존재하지 않음, 어쩌다 운 좋게
상대자가 나타날 때는 엉뚱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퉁명하다 못해 적의조차 풍기는 걸쭉한 목소리로 성깔조차 부렸다. 그런 사람 없다니까요.
잘 못 걸었어요. 몇 번째 헤맨 건지 몰랐다. 알만한 사람이라도 부러 피하는 것 같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무조건 욕설이라도 퍼 부울 작정이었다.
 “여보세요? 여, 여보세요?”
  술에 취한 나의 목소리는 경희는 물론 첫째 놈도 둘째 놈도 얼른 구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심지어 안식구까지도.
 “그런 사람 없어요, 정말 잘 못 거신 거예요.”
이번에는 아주 젊은 새댁의 목소리 같았다. 엉뚱한 일에 신경을 쓰이는 걸 아주 마뜩해 하는 눈치였다. 경희 좀 바꾸란 말이요.
 나는 울화통이 터진 듯 전화통을 마루바닥에 함부로 내던졌다. 이 더러운 놈의 세상, 혼자 중얼거리다간 끓어오르는
성깔이라도 죽일 듯 죄 없는 담배만 몇 대 피워댄다. 물론 서울 쪽에서 이삼일마다 걸려온 전화는 한두 개의 주문이 아니었다.
머릿골이 아플 노릇이었다. 술은 적당히 마시고 담배도 좀 줄이시고, 쓸데없는 전화는 그만 하시구요, 끼니는 안 거르고
기어이 챙겨 잡수시고. 한두 개 같으면 언뜻 받아들일 수 있지만 한꺼번에 몰린 주문이라서 어떻게 대처할 수 없었다.
거의 불가능 한 약속이었다. 폐암의 주범이 된다고 은근슬쩍 겁을 주면서 제대로 살려면 금연해라는 압박부터. 어디 그뿐인가.
 술은 어떠며, 식사를 거르지 말라는 말은 어떻고. 그렇지만 혼자만 있을 때의 휘휘함을 이해하려 안 하는 것이 더더욱
서운할 뿐이었다.
  동구 밖에서 시작된 소소바람이 좁은 고샅길 마지막 집 툇마루까지 소리 없이 밀려왔다.

마당가 감나무 아래서 꼬리를 치던 검둥이의 컹컹 소리가 멎어들자 어둠 속의 적막은 더 짙은 색깔로 포장되었다.

찜통더위와, 모기와 하루살이 떼들의 윙윙거림,

 고샅길 입구에서 외롭게 졸리는 희미한 가로등의 불빛이 그래도 유일한 희망인 것 같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몇 가구 안 되는 집채에선 불빛이 꺼진지 오래되었다. 밤만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불을 꺼버리면 들판과 숲 속의 벌레들이 동구 앞 가로등으로 모여들어 진을 친다.
  이런 생활이 벌써 몇 년짼가. 나는 정신이 든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저녁마저 거른 터였지만 배고픈 줄은 몰랐다.
석양녘이면 두어 잔 걸친 술 바람으로 시장기를 때운 나머지 저녁 거르기를 다반사로 여겼다.
  원래부터 허약한 체질인 안식구가 들녘 나들이를 끝마감한 것은 그렇게 오래된 게 아니었다.
이따금 무릎마디가 안 좋다고
구시렁거렸지만 그저 그런 것으로 치부해버린 게 병을 키운 꼴이 되었다. 심한 무릎 관절 때문에 마실 안팎이나
고샅출입만이 가능할 정도였다.

두 내외가 어기차게 일을 해대도 일감이 태산같이 처지는 판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밭뙈기 농사는
아예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는 몫도 더 많아지기 마련이었다.
  날씨가 해동되는 봄부터 바쁘기 이루 말 할 수 없다. 스물두어 가구뿐이 안 되는 작은 마을이지만 마을 앞의
넓은 논다랑이나 뒷산의 밭이랑의 일감들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었다. 가을에 접어들어 수확되는 농작물이
돈으로 환산하면 몇 푼 안 되는
하잘것없는 것이지만 그대로 묵혀진 땅은 없었다. 목적이 있는 농업이 아니었다.

남들이 장에 가니까 나도 간다는 식이었다.
도시 사람들이나 장사치들처럼 수지계산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별수 없는 일이었다.
  어둑발이 안 풀리는 첫 새벽부터 일구덕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섯발몰 사람들에겐 숙명이나 다름없었다.
기억할 수 없는 옛날 사람들도 이런 숙명의 사슬에서 한시도 헤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걸 상상하면 가슴이
메어지는 것이다. 제 팔자도 못 고치는 주제에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고 이따금 안식구가 구시렁거렸지만 나는 한 마디로
것질렀다.
  “왜 내 말이 틀린 말인가? 돌아가신 아부지가 뭐라고 하신 줄 알아.”

 “왜 소라도 사줄라오?” 
형님의 말투야 애초부터 투명하다 못해 남의 말은 끝까지 안 듣고 중간에서 무지르는데 이골이 난 사람으로 치부해버린 터니
그렇게 괘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어이 맛 대꾸를 하고 말았다. 쌓이고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현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는 일마다 시시콜콜 트집 잡기로 일관했으며 그나마 나긋나긋한 맛이라도 있었으면 그렇게 강한 거부감까지
 안 느꼈을 테지만 그동안 참고 참았던 게 기어이 폭발한 셈이었다.
 “남들이 장에 간다고 아무나 가는 게 아녀. 니가 소를 키운다고? 소 소 하지만 너같이 게으른 놈이 어떻게,,,.”
  마무리는 안 했지만 뻔한 소리였다. 저축한 돈은커녕 빚만 호박넝쿨마냥 넘실거리는 주제에. 푼수를 알고 행동해라는
충고와 다름없었지만 그때만은 그게 아니었다. 본래부터 털끝만한 정머리 하나 줄줄 모르는 건 관두고라도 사사건건
내 의견은 한마디로 묵살해버린 형태가 기어이 울화통을 치밀게 했던 것이다. 큰 형님이어서 아버지의 분신이나 다름없이
대했기 때문에 귀에 거슬린 소리를 해도 꿀꺽 삼키기 일쑤였지만 모처럼 할 소리를 해 버리고 나니 묵은 체증이라도 가신 듯
후련해졌다. 허지만 뭔가 부족하여 오금이라도 밖을 듯 토를 안 달 수가 없었다. 딴 솟단지를 걸었다 하지만 같은 혈육의
제밑동생이 아닌가. 마뜩하게 여기던 형님의 눈 꼬리가 사납게 일그러지는 걸 무시한 채 퉁명스럽게 내 질렀다.
 “형님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소? 허는 일마다 감 놔라 배 놔라 퉁바리나 줬지,,,.“
 “아니,,,,,,,?”
  형님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지만 나는 모른 척 하니 더 지껄였다.
 “형님보고 보태 돌라고 안 헐팅 게 걱정이랑 마시씨요 잉.”
  욱 하게 치미는 감정싸움 같았지만 벼르고 벼르던 소리를 이때 아니면 안 되겠다 싶어 내지른 꼴이었다. 물론 아버지
생존시에 일어난 일이니 형님만을 탓할 노릇은 아니지만 그 과녁이 형님한테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갈머리 없고
세상물정 모르는 녀석이라고 삿대질을 한대도. 물론 아등바등한 살림살이에 여섯 남매를 키워낸다는 것부터
힘겨운 일이기에
그때 일을 새삼스럽게 탓할 필요야 없는 노릇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뒤까지 지워지지 않은 앙금으로 남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분재할 때 깨진 장독 다듬잇돌 다듬이방망이 하나 줘본 일 있으시오?
큰집에서 나와 오막살이로 이사할 때 문풍지 하나 볼라준 일 있소?
  나는 목울대까지 치미는 이 말은 못했지만 끝내 취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때가 되면 할 말이라고 치부해둔 채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참, 잘 헌 다 잘 해여, 언젠가는 후회할 것인께,,,“
  티브이 화면마다 난리법석이었다. 농촌도 이제 잘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거라고. 대통령의 형님부터 앞장서서 게거품을
품어대니 농민들은 복권에나 당첨된 것처럼 설쳐대기 마련이었다. 받아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는 이 기회를 외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나 나나였다. 하룻밤 사이에 송아지 값이 천정부지로 솟는가 하면 매물을 거둬들이는 바람에 송아지를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농촌 부흥이란 그럴듯한 스로건에 현혹된 나머지 가슴 설레긴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풍치 좋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은 하루아침에 금수禽獸강산으로 변하고 말았지만 누구 하나 탓할 사람도 없었다.
더불어 철재나 세멘트도 품절이 되어 어느 한쪽이 무너지는 난리가 몰아온 거나 다름없었다. 마을의 빈 터는 물론
경관이 쓸만한 산모퉁이마다
 흉측스런 철제건물들이 하루아침에 들어섰다. 한참 일할 나이의 젊은이들은 말 할 것도 없고
나 또래의 중늙은이들도 행운의
기회를 안 놓치려고 발버둥이었다.
새마을 운동이 소 키우기 운동으로 변한 것일까. 정부 융자든 사채든 농협융자든 빚 얻는 데 전력을 다했다.
나중에야 삼수갑산에 갈망정 오라이였다.
  게다가 외국 소 수입까지. 그야말로 금상첨화나 다름없었다.
  그 무렵의 나와 구만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서 머리를 굴렸다.

말하자면 기업가들의 사업계획서를 정밀 진단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함부로 설치지 말고 좀 더 지켜보더라고,,,.”          
  좀 더 신중을 기하자는 구만이었고 나 역시 동감이었지만 결론은 뻔한 것이었다.
 “그래도 정부에서 장려하는 사업인데 오직 헐꺼여,,,”
 “잘 들 생각합시다. 남정네들이 하는 일에 참견하는 것이 좀 요상스럽소만

소견머리 얕은 여편네들 말도 들을 땐 들어야 허는 법이구만요.“
  구만의 안식구 오수 댁 말이었다.
 “그래요. 아짐씨 말도 좀 들어보더라고,,,.”
  내가 동의하자 구만이가 흐늘거리며 다음 말을 계속해라는 듯 엷은 웃음마저 지었다.
 “이 사람아 소 똥 냄새 좋아한 사람이 어디 있단가? 낸들 소똥을 향내로 알고 이러는 건 아니란 말이여.

오직 할 짓이 없어서 이러는 것 아닌가? 정말로 향수 냄새나 맡고 노작거리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듣고 봉께 말은 그럴 듯 허요 잉. 소똥 냄새가 향수 냄새로 변한다면 오직 좋것소?

말대로 소똥이 아니라 개똥이라도 돈만 된다면 향수로 알고 왼 몸에 덕지덕지 칠해뿔것소.
허지만, 난 당췌 믿을 수가 없으니,,,.”
  수심이 가득한 오수 댁의 애처로운 눈매가 구만이의 얼굴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애잔한 정회마저 농축된 그런 눈빛,
언뜻 보기엔 보통 때의 투박함이었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행여나 헛방 디딘 날엔 나앉을 곳도 없어라우. 뭔 말인지 알겄소?
지금 있는 빚만 해도 대추나무 대추 영글듯 줄레줄레한데,,,.”
  오수 댁은 진저리라도 칠 듯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빚을 얻어서, 참 통머리도 크요 잉. 누가 당신 맘대로 빚이라도 덜러쿵 준다고 합디까?

참 소가리도 없는 양반아, 그러다 제집까지 팔아 묵게 생겼소?
 “뭐라고? 아니 여편네가 헐 소리가 따로 있제, 씀벅씀벅 하면 다 말인줄 아나?”
 “당신 고집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응께 알아서 허시씨오만,,,.”
  오수 댁이 제 풀에 지친 듯 허물어지자 구만이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쓸데없는 걱정 말드라고 잉.
당신 말마따나 잘못되어 제집 팔아 묵게 되면 경희 아빠한테 팔지 뭔 걱정인가,,,.”
 “아니, 농담도.”
  내 쪽에서 정색하자 구만이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왜 못 헐 소린가. 친구 좋다는 게 뭐여? 믿을 수 있으니 이런 소릴 하는 거지.”
  오수 댁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지만 나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홍당무로 변했다.

무시로 왕래하며 살아온 사이들이 아닌가. 구만과 나와의 막연함은 말 할 것도 없고, 안식구들까지의 내왕.

그리고 같은 또래의 애들까지도. 어이없는 농담 뒤끝이지만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오수 댁의 모습은 새로운 것이었다.
 “알아서 잘 허것소만, 그래도 미심쩍어서,,,.” 
  언뜻 남정네들의 하는 일에 훼방은 안 놓겠다는 것이지만 끝내 못 믿겠다는 투였다.

너무나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을 때의 절망감이나 그런 느낌의 표출이었다. 마침 쏟아지는 석양녘의 햇살이

오수 댁의 어두워지는 얼굴에 비췄기 때문에 내 마음조차 처연해졌다. 더불어 엉뚱한 생각이 앞질렀다.

하나의 예언, 불행을 위한 연주곡, 그런 몸짓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모골이 소연해졌다.

아니라고 몇 번이나 머리를 내 저었지만 쓸데없는 환영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 똬리를 틀고 자리 잡았던 것이다.

소 막사를 짓고 마리수를 늘이는 작업이 끝나고 채 이태가 못 되어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고

오수 댁이 구만에게 닦음질 하던 말이 다시금 연상되었다.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지만 말씀 좀 개래서 허시씨요. 경희 엄마가 들으면 뭐라고 허것소?”
  삶에 찌든 중년여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생기가 피어오르는 스무 살쩍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절망을 예고하는 눈빛은 구만에게 향했을 때였다. 
  
  비몽사몽이라고 해야만 할 일인가. 숨결이 거칠어졌다. 전신이 나른했다.
푸른 소나무로 단장한 앞산이 문득 내 눈을 가로막더니 초라한 대문을 지나 헛간으로 어정어정 걸어왔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대한 산은 마당 한 가운데서 움직이는 걸 멈추더니 자그만 분봉으로 변하지 않은가.

놀라서 악을 써대자 분봉은 잿빛 안개로 변하여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끔직한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사라지는 안개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도 아주 선명한 하게. 아버지 앞에는 헌 지게가 놓여있었다.

아주 오래되어 제대로 쓸모없는 낡은 것이었다.
감동한 듯 아버지를 힘껏 불렀지만 목소리는 울리지 않고 목울대 안에서
안으로만 움츠려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꿈속에서라도 이렇게 선연히 만난 일을 처음이었다.

내가 목청을 돋우려 하자 아버지는 두 손을 회회 내 저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나 다름없었다.

수 백 마디 말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많은 말보다 마음으로 통하는 교감이 중요한 모양일까.

나는 감동한 나머지 아버지, 하고 크게 소리쳤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조심스럽게 스쳤다. 아버지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조차 넘쳐흘렀다.

삶의 어려움을 죄다 알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것은 참 모습이 아니었다.

고뇌나 고달픔을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절제된 자신의 통제력에서 풍기는 기품일까.

아버지와 나의 눈길이 얽혀들었다. 엶은 미소 속엔  감춰진 비밀스러움은 보나 마나 뻔한 것이었다.
 ,,,이놈의 지게야, 평생을 업고 댕겼는데 이번엔 네가 날 업어야 될 차례 아니여? 

아무리 모지락스런 세상이지만 그런 인정머리는 있어야지.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생시처럼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한 잔 술에 거나하게 취하면 아버지는 무시로 하늘을 향한 분노처럼 웅얼거렸다.
 ,,,이 놈아 언제 호강시켜줄래? 평생 너를 업어 키워줬는데,,, 나도 호강 한 번 헐란다, 네 등에 업혀서 말이여.
  가난의 굴레에서 못 헤어남을 한탄하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금과옥조의 명언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잘 알았구먼요.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순식간에 아버지의 모습은 몰려온 안개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준엄한 꾸짖음일까. 아버지가 태어나고 윗대의 어른들이 태어난 이 정든 땅에서 탈출하지 못함을 추궁하는 거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하믄요, 그렇고말고요. 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요 골짜기에서 안 살고 진즉 대처로 나갔으면 빚쟁이가 되고

살기 어려운 험한 꼴은 안 볼 건데요,,,
  나는 실체도 없는 허공을 향하여 연신 허리를 조아렸다. 신심이 깊은 신자가 뭣을 향해 기도하듯이.
  명심할랑구만요.
  허지만 이미 늦은 것 아닌가. 이 나이에 어디로 가서 뭣을 한단 말인가. 자식들이 이 골짜기에서 벗어난 걸로

위안이라도 한다면 모르지만.
  큰놈 둘째 놈 할 것 없이 죄다 객지생활로 살을 굳혀오더니 그럭저럭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막내딸 경희마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가 바쁘게 두 오빠들과 전화로 속닥이더니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농사일을 거의 거들 수 없다는

핑계로 안식구까지. 그러고 보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따로 없었다.

전 식구가 서울로 옮기자고 그랬지만 나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지하실 월세방 주제들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렵게 사는 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누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러자고 약조한 터도 아니지만 꿈에서조차 현몽하던 아버지의 소원은

손자 때에 가서야 겨우 이룩한 셈일까. 그렇지만 내놓고 자랑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미래를 향한 발돋움이 아니었다. 겨우 고등학교 딱지를

뗀 주제들에 뭣을 할 것인가. 말단 공원 아니면 장사치기가 뻔할 터였다.

일류대학을 나와 좋은 기업체나 취직한다면 모르지만.

 고향에서도 발붙일 곳 없어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 거나 다름없는 일 아닌가.
 

안식구가 서울로 올라간 것도 모셔간 것이 아니라 필요해서 차출해간 거나 다름없었다. 맏손자 때문이었다.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는 꼬마를 남의 손에 맡겼다간 무슨 재앙이 일어날 줄도 모르고 어린애일수록

정을 먹여 키워야 된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려, 그려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지만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지긋지긋한 일손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참에,

게다가 심한 다리 관절 때문에 농철에도 있으나마나한 꼴이 되었으니 명분마저 그럴 듯 했다.

앞산 쪽으로 눈길을 돌리던 안식구가 길게 한숨을 쏟아냈다.
 “살다가 봉께 별 꼴을 다 보겠소,,,.”
  지긋지긋한 일구덕에서 탈피할 수 있다는 현실에 대한 안도감이 아니었다.

얽히고설킨 사연들이 한꺼번에 풀어져 실타래처럼 꼬이는 서러운 감정이었다.

수십 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거칠고 모진 세상을 살아온 데 대한 허무함일는지

몰랐다. 눈자위에 눈물이 흥건했다. 
 “참말로 바보들이 따로 없당께.”
 “인자사 그런 말을 허면 뭘 해여?”
 내가 퉁명스럽게 내 지르자, 그래도, 하더니 기어이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었다.
 “잊을라고 해도 너무나 허망허요 잉. 꼭 꿈같단 말이요.” 
소 키우기 소동은 무서운 태풍이었다. 거칠었지만 그 폭도 엄청나게 넓었다.
 희희낙락거리던 얼굴엔 하룻밤만 지새고 나면

깊은 주름살이 패였고 희끗희끗한 머리엔 하얀 서릿발이 더께더께 내려앉았다.
 “다 쥑이는 모양이여,,,.”
 “나라에서 허는 일에 뛰어든 우리들이 농판이제.”
  짙은 한숨들. 재기가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송아지를 애쓰게 키워봤자 키울수록 밑지는 형편이었다.

쏟아 부운 정성이나 인건비는 관두고라도 축사시설비며 그동안에 든 사료 값을 만들 길이 막막하였다.

빚더미는 불어나 본전은 놔두고

이자조차 감당하기도 어려웠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의 반복으로 알탕갈탕 이어온 살림살이가 하루아침에 거덜 날 판이었다.

 하루라도 소를 더 먹이면 그만큼 손해였다. 소 구입하기에 열을 올리듯 소 팔기에 혈안이 되는 진풍경이 일어났다.

하루를 지나고 나면 열 마리를 키우는 소 막사가 텅 비어버려 흉측한 건물로 변한가 하면

많은 부채를 만회할 길이 없어 밤밥을 먹었다는 뜬소문들이 나돌았다.
 “어쩔 것이여?”
  구만이가 도둑고양이처럼 초저녁이 훨씬 지난 무렵 살며시 찾아왔다. 보나마나 뻔한 것이었다. 꺼지게 한숨이었다.
 “이대로 더 버텼으면 좋겠지만 도무지 안 되겠단 말이시. 어쨌으면 조으까? 참말로 막막허단 말이시.

그렇다고 죽어뿔 수도 없고,,,.”
  구만이나 나뿐이 아니었다. 소를 키우겠다고 덤벼든 사람들의 실정이었다.

요행수를 바라거나 뱃장이라도 두둑한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견디자고 발악을 했지만 오래 끌수록 손해만 가는 것이었다. 
  “요런 싸가지 없는 것들 어쩔 것이여.”
  “막막하지만 어쩔 것인가? 더 기둘러 봐야지.”
  “콱 조졌뿔먼 시원하겠구먼. 개새끼들이 불쌍한 촌놈들만 영축옶이 쥑여뿐 것 아녀?

요 통에 대통령 성님만 떼돈을 번 것 잉께. 세상에 이런 벱이,,,.”
  분노의 대상자를 찾아 분풀이를 해야만 그 불길을 잡을 것 같았다. 옳은 말이지만 누굴 탓하고 누굴 원망할 것인가.

헛 욕심 안 부리고 바보처럼 묵묵히 땅이나 파면서 하늘만 쳐다봤으면 이런 경황을 안 겪을 것을.
  엄청나게 불어난 부채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구만이었다. 겨우 너 댓 마리를 키우는 나도 한쪽이

기우뚱할 노릇인데 통머리 크게도 스무 마리를 집어 논 구만이의 형편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밀린 사료 값만 하여도

천만 원이 훨씬 넘어 농협에서는 물론 개인 상회에서도 사료공급을 중지한 것이다. 부도 일보 직전이었다.

게다가 소 구입 자금 축사 건축비 등을 조목조목 계산하면 눈 덩치 보다 더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농협에서나 개인상회에서 외상으로 사료를 공급한다 해도 빚만 더 키우는 모양새가 되니 손을 뗄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대로 나두고 생명만 연장시키는 잔인한 방법이 가장 현명한 처사라고나 할까.

사료 공급을 중지시킨 채 풀로만 연명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한두 마리가 아닌데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홀연히 구만이가 마을에서 사라져버렸다. 뒤늦게 농협에서 축사나 집은 물론 전답까지 압류 수속을 하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이리저리 엉클린 연대보증인들에게 부채 일부를 떠안겨 조그만 고샅길은 오랜만에 사람 사는 동네로

변하여 오가는 발짝들로 분주스러웠다.
  소는 물론 지질구레한 것까지 처분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오수 댁이 모진 비난과 수모를 고스란히 당한 셈이었지만

홀로 남은 오수 댁을 향해 험담이나 삿대질을 한 사람이 없는 게 신기했다.
 “뒈진 자식 거시기 만지기제, 누구를 탓할 거여? 구만이 하는 행위야 벼락을 맞아도 시원하지만 오직했겠어.”
  꽁꽁 얼어붙은 가슴패기를 치면서도 입들을 다문 인심들에 감격한 오수 댁만 눈물 바람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살아가면서 지은 죄를 나라도 갚을라망요.”
  나는 오수 댁이 눈물바람으로 울먹이는 목청에서 문뜩 애잔함의 전율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소를 키우기 위하여

이런 저런 타합들을 할 때 반대를 하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주인을 잘 못 만난 어린 양의 애처로움이.

그녀의 젊은 시절의 모습은 어쨌을까. 쓸데없는 데에 상상이 미치자 가슴조차 아려왔다.

안식구한테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마침 그날도 혼자였다. 부엉이 울음이라도 들릴 듯 호젓한 밤이었다.
  오랜만에 논두렁에서 풀을 베느라 낫질을 하다보니 피로가 엄습했다. 사료대신 풀로 양을 채우기 위해

한 여름철 뙤약볕 아래서의 풀베기란 보통 중노동이 아니었다.

애쓰게 키워서 본전치기라도 하는 게 난망한 일이었지만 밑진 것을 생각하면 호락호락하게 처분 할 수도 없었다.

죽어도 오라이라고 막다른 골목까지 뻗대보자는 오기만 남았다.

차라리 손해를 보더라도 일찌감치 처분 했으면 현명한 결과가 나올 것을.

정도가 아니지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다는 건 매 한가지 아닌가.
  구만이를 만나면 귀싸대기라도 한 대 올려 부칠 생각이 간절했다. 두 사람 사이에 지킬 비밀이 어디 한두 갠가.

귀띔이라도 해 줄 일이지. 구만이 보증 건으로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지만, 당장에 죽는 건 아니니 살아가면서

천천히 해결할 테니 믿어보라고 통사정이라도 했으면 모른 척 속아 바보노릇을 할 터인데.
  피곤한 나머지 곧장 코라도 골아야 될 판이지만 쉽사리 잠들 수가 없었다.

소 때문에 진 빚에다 구만이가 안겨 논 엄청난 빚보증. 나도 구만이 꼴이 될 것 같았다.

대학에 다닌 놈은 없다지만 삼 남매가 한 또래가 되니 막고 품기에도 경황이 없을 형편에.
  그놈을 콱, 아무도 몰래 오수 댁이라도 야무지게 닦달해야겠다고 이를 악물었지만

그 선한 눈망울을 생각하면 독한 마음도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경희 엄마?”
  누가 들을까 봐 안으로만 웅크려드는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마침 뒷골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 온가 싶어 귀를 기울인 참이었다. 재수 없게,,,

어둠이 짙게 내리는 한 밤이면 부엉이가 울지 않더라도 그런 환영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환영이 아니었다. 발짝 소리조차 죽이는 게 밤손님을 연상하기에 알맞았다.  
  무슨 청승인가. 나는 한쪽 손에 전화기를 끼어 안은 채 놓을 줄 몰랐다. 신호음만 들끓고 있었다.

빈속에 술을 너무나 많이 마신 까닭일까.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나는 깊은 잠에 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 온전한 정신상태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었다. 어기찬 모기떼의 습격과 찜통더위에도 무감각하니

죽어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경희는 물론 안식구까지 난리 법석이었다.
 “아빠, 아빠도 애인 생겼담에?”
 “거 무슨 소리다냐?”
  경희의 맑은 목소리가 장난기를 잔뜩 머금었다. 
 “아빠도 오랜만에 멋쟁이가 될 모양이다. 노익장, 정말 그랬으면 쓰겠는데,,, 아빠 나한테는 거짓말 하는 거 아냐.

이실직고하는 게 더 현명할 거야. 아빠 나이에 애인이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 아빠 고생 조금만 더 하세요,

저희들이 아빠 모셔 갈 테니. 아빠 정말 사랑해.”  
  자식들이.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매달 나오는 적잖은 전화요금이 애인과의 통화 때문이라고 억지로 밀어붙이는 게

가당찮은 말이었지만 싫은 말만은 아니었다. 몸과 맘이 죄다 늙었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지나가는 말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마음 한편으로는 찔리는 게 있었지만 그 일만은 입 밖에 낼 필요가 없었다.

나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임마, 아빠 애인은 느그들이 훔쳐가 놓고,,,.”
 “엄마를? 아빠, 건 부인이지 애인이 아니잖아? 엄마가 어떻게 애인이 되나?”
  간드러지게 웃는 경희의 목소리가 피곤한 삶에 활력소가 될 것 같았다.
 “니 말대로 아빠 애인은 한 둘이 아니단다. 사방 천지에 널려 퍼져 쌨고 쌨단다.”
 “아, 아빠 파이팅,,,“
  내가 생각해도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애들 말마따나 멋진 애인이라도 생겨서 정담이라도 나눈다거나

사업이라도 떠벌려 논 상태라면 모르지만. 알았다. 너희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랬지.
허지만 떳떳치 못한 점도 있었다. 
하필이면 안식구도 없는 날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애들 때문에 k시로 나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울지 않은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밤이었고 구만이가 밤밥을 먹은 지 두어 달 넘어서였다. 
 

어둠 속이지만 오수 댁은 눈길을 아래쪽으로 내리깐 채 고샅길로 신경을 쓰고 있었다.

혼 자인 것을 확인하고 얼른 마루턱으로 올라서기조차 망설였다.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왔지만

앉을 생각도 접은 채 우두커니 서서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잠의 덧에 걸린 것일까. 초이레 초생 달이 필봉 난간에 위태롭게 걸렸다.

미닫이 봉창 너머로 희끄므레한 달빛이 고목덩치 감나무 위에 핀 이파리가 미풍에 흔들거리면 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흐릿한 달빛이 엷은 구름장에 숨어들면 숨어든 대로 구름장이 슬쩍 비켜서면 비켜선 대로. 산과 들의 굳은 침묵과

어둠은 두 사람의 입조차 막아버린 형상이었다. 밤중에, 그것도 비밀스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면목이 없구먼요, 이 죄를,,,. 
  한숨과 함께 내지른 첫마디였다. 몸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오수 댁이었다.

어렵다거나 두려움이 아닌 죄책감이 앞선 나머지 말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딴 사람들한테도 그렇지만 경희 아빠한테는 정말로,,,. 다시금 처량한 놈의 부엉이가 낮은 소리로 어둠의 저편에서

칭얼대고 있었다. 소쩍새조차 울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낯짝이 없어서, 족제비도 낯짝이 있어야지라우. 경희 아빠한텐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지만 좁은 방안에서 그것도 누가 엿듣지나 않을까 귀를 가까이 대고 소곤대기 때문에

얼굴이 거의 맛 닿을 지경이었다. 오수 댁의 숨결은 낮았다. 때로는 생명이 꺼지는 소리로도 들렸다.

흐릿한 달빛이 문지방 틈으로 여릿하게 스미면 마당의 감나무이파리가 불규칙하게 흔들거리며

또 다른 음영을 만드는 것이다. 밤이란 은밀한 속삭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 아닌가. 어둠 또한 그렇고.
  만월보다 조각달이 더 어울리는 밤이었다. 오수 댁의 눈언저리에 가는 이슬이 맺혔다.

어둠 속이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뒤안 쪽에서 풀벌레가 쓰르르 울었다. 참으로 어이없고 슬픈 일이었다.

구만에게 향해진 분노는 연민의 정으로 변할 수 밖 에

없었다. 서울 변두리아파트 공사장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상태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중태임에는 틀림없었다. 어쩌면 생명조차.
  흐릿한 조각달은 어디론가 꼭꼭 숨어버렸다. 희미한 조각의 빛이라도 때에 따라선 필요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쩐대요? 오수 댁의 상체가 느닷없이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몸에서 풍기는 엷은 땀내와 밤이슬의 한기가 적당이 어울렸다.

나는 오수 댁을 지긋이 밀어냈다. 하잖은 말이 씨가 되더라고. 오수 댁은 소리가 안 나오게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또 그 소리 때문인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나 하체부분은 소갈머리 없이 성깔을 부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어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외부의 빛깔조차 완전히 차단해버린 방안은 먹통이었다.

나의 두 팔이 숨결을 죽이는 오수 댁을 슬며시 껴안았지만 잠시였다.
  용서하제라우, 오수댁이 나직이 속삭였다. 얼핏, 나의 입술이 오수 댁의 눈언저리를 스쳤다. 찝찔했다.

약간 소금기조차 머금은 듯.
  다행이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며칠 뒤 구만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담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오수 댁이 섯발몰을 떠날 때도. 뜬금없이 죽은 구만이가 나타난 것은 웬 일일까.

살아있을 때와 다름없었다. 네 활개를 내졌고 보무당당하게 고샅길을 거쳐 동구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소를 키우다 패가망신한 것은 관두고 가까운 이웃들의 살림살이조차 거덜나게 했다는 

 흔적은 하나도 안보였다. 저런 녀석, 어딜 간다는 거여? 내가 큰소리로 웨쳤지만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한참 만에 등을 돌리더니 오랜 여행이라도 다녀올 듯이 손을 회회 내저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같이 안 갈란가?”
 “어딜 가자고?”
  내가 되받자 그는 아무소리도 없이 방금 전처럼 두 손을 저으며 얼른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저승길이라도 같이 가자고 은근히 유혹하는 것 같았다. 비록 꿈속이지만 이승과 저승은 구별이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내젖자, 구만이가 쓸쓸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농담이여, 참말로 고맙네 잉. 자네는 복 받을 것이구만 ”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게 웬 짓이여? 그나마 마루바닥에서 맨가슴으로. 모구가 물어뜯은 피만 해도 한 사발이 넘겠다야.”
  형님이었다. 이번에는 내 꼴이 얼마나 어이없는지 나만 보면 찌뿌린 인상조차 허물어졌다.

오히려 헛웃음까지 터트리고 있었다. 경희가 이상한 나머지 형님한테 전화를 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손에 쥐어진 수화기를 무슨 보물이나 되는 듯 꼭 움켜쥐고 있었다.
  형님의 한숨소리가 깊어졌다.
 “이런 놈을 혼자 놔두고 다 가버리다니, 죽어도 죽은지나 알아야 될 것 아녀?”
  벌써 첫새벽이 되는 모양이었다. 짙은 안개의 무리들이 고샅길을 서서히 빠져나가자

내 눈앞에서 어른거렸던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이승의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도 안개의 물결을 따라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 고샅길을

나가야 될 것 같았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허지만 아직 때가 안 되었을 뿐이다. 헛구역질이 나온다.

아랫배가 몹시 쓰리다.

참을 수 없는 시장기. 이럴 때면 안식구가 그리워진다. 어이 속 쓰려, 빨리 해장국이라도 만들어야지.

내가 더듬거리고 잇을 때였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란 말이다. 정말로 명 재촉 하느라고,,,”
  내 쪽에서 아무런 대꾸도 없자 형님은 드디어 성깔을 부렸다.
 “이러니까 한달이면 통화료가 삼십만 원 이상씩 나오는 것 아녀?” /

 

*원작출처 : [희구당집1618] -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ljbb1618

 

‘질거운뜻 부지런팔뚝 갖이고’
‘가가(家歌)’부르며 더욱더욱 나아가는
곡성 목사동 농부소설가, 이재백(李在白)
2007-05-07 /남인희 기자  

▲ 곡성 목사동 이재백씨 댁엔 할아버지대로부터

50년 넘게 이어져 온다는 가훈과 ‘집노래(家歌)’가 있다.

ⓒ 김태성 기자 /2007-05-07


“물오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를 때의 울음소리가 푸른 비 내리는 것 같다”해서 압록(鴨綠)이라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히는 석압로(압록∼석곡). 느릿느릿 순하게 흐르는 보성강 물길 따라가다

아미산 자락에 옴팍하게 안긴 마을 하나로 접어든다.
흐르는 듯 모나지 않은 고샅길을 만들고 있는 이끼 낀 돌각담들이 정다운 목사동이다.

 

실록을 쓰는 사관처럼 농촌 실상 기록
그 <돌각담>을 표제작으로 지난해 늦둥이 첫 소설집을 내놓은

이재백(69)씨가 이 마을(곡성군 목사동면 신전리)에 산다.

그는 고향을 지키며 소설 쓰는 농부다. 아니 농부 소설가다.

두 가지 일을 양 손에 들었으니 요새 사람들 하는 말로 치면 ‘투잡족(族)’이다.

주경야독이라고, 낮에 배밭으로 논으로 고샅으로 쏘다닌 발걸음은 밤엔 형광등 불빛 아래 그대로 컴퓨터에 옮겨진다.
<옛 사람들이 살아왔던,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많은 흔적들이 얽히고설킨 황토 구릉마을,

그 입구마다 자그만 비문이라도 세워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아픔이, 그리움이, 분노가, 함께 하는 마음이

절절이 스며 있다고…>.
소설집 《돌각담》에 붙인 작가의 말이다.

▲ 벼농사만 짓고 살던 마을에서 처음 배농사를 시작한 이재백씨.

가가(家歌)의 노랫말처럼 그가 품은‘질거운(즐거운) 뜻’과 ‘부지런(한) 팔뚝’덕에

80여 농가가 참여하는 곡성배영농조합에선 연간 500톤이 넘는 배를 수출하게 됐다.

ⓒ 김태성 기자 / 2007-05-07


“젊은 사람들이야 이것이 전설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뭔 소린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겠지만,

우리의 족적에서 사라질 것들을 새기고 농촌을 그려낼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씁니다.”

잊혀져 가는 우리네 농촌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의 소설엔 마을의 역사나 농촌의 소소한 풍속들도

오롯이 재현되고 있으니, 소설가 이순원이 이 소설집에 붙인 평처럼

<그의 소설은 한 구석 새것에 대한 맹신적 경쟁이 없다.

이 체구 조그마한 늦깎이 작가는 늦었다고 서두르는 법 없이 자기 걸음으로 살아온 시대를 얘기하고

자기가 본 시대를 증언하며 또 이야기한다.>
서울에서 문예창작과를 나온 청년이 농촌으로 귀환했을 때, 사람들은 도대체 왜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농촌에 살며 농촌을 쓰기 위해서였죠. 지금도 후회는 없어요.”

오래 전에 변방의 문학으로 쇠락해 버린 농촌문학을 숙명인 양 고집하는 시대착오적인 외곬수.

그이가 마치 실록을 쓰는 사관처럼 농촌의 실상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 저녁마다 흙 묻은 장화를 벗는 농부이기 때문이다.
“소설 쓰는 이들 앞에서는 나는 농사도 짓는다 까불지 마, 허고

농사짓는 이들 앞에선 나는 소설도 쓴다 까불지 마, 허고 사는 것이지요, 허허.”

이 작달막한 어르신의 얼굴에 흐르는 봄햇살 같은 웃음을 대하노라면 ‘까불지 마’라는 엄포가

실은 어디서나 눌릴 것 없는 처지이면서도 늘 수그릴 줄 아는 겸양에서 나온 말씀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이생진 시인은

<시골에서 배농사를 하며 글을 쓰는 이재백/ 서울에서 시를 쓰는 내 손이 부끄러워>라고 쓰지 않았겠는가.

20호 자가일촌(自家一村)을 이루고 사는 마을.

6000여 평 배밭에 3000여 평 벼농사를 손수 짓고 사는 그이지만

혹여 조금치라도 서툰 일 앞에서는 나이 불문, “일헌 데는 니가 내 선생이다” 고개 숙이고

한 수 배우기를 꺼리지 않는다.

집앞 마당의 바위좌대에서-이재백   ⓒ 김태성 기자 /2007-05-07


벼농사만 짓고 살던 마을에 처음 배를 들여와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바꿔야 할 것은 늘 자꼬 바꿔치기해야 해요.”
전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진취적 기상은 이 작은 마을을 배 수출 단지로 바꿔 놓았다.

지금이야 ‘골짝나라’ 곡성의 ‘목사동 배’가 명성을 얻었지만

벼농사만 짓고 살던 이 마을에 처음 배를 들여 온 공로는 이재백씨 부부에게 있다. 
“나주에 혼자 가서 들판을 본께, 어디 과수원에서 아저씨가 전정을 하고 있어요.

음료수 한 병 사 갖고 가서 꼬치꼬치 묻고 한번 모셔다가 전정 배우고 그 뒤로는 혼자서 했지요.”

시집와서야 농사를 배웠다는 그의 아내 이행숙(62)씨는 타고난 장손며느리였나 보다.

가세를 지키기 위해 내 몸을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배농사를 시작했다.

시어머니 생전에 “니 손은 참 좋은 손이다”는 치하를 들은 걸 보면 이 며느리의 바지런한 성정이 짚어진다. 

그렇게 배밭을 일구어온 지 30년이 넘었다.

배영농조합법인의 부지로 쓰겠다고 1000여 평의 멀쩡한 배밭을 무상으로 내놓은 남편에게 아내는 할 말이 많다.
“판판한 평지 땅은 마을에 내주고, 마느래(마누라)는 쩌 높은 산비탈을 다리 아프게 오르락내리락 일하러 가라 허데요.”

덕분에 80여 농가가 참여하는 곡성배영농조합에선 연간 500톤이 넘는 배를 수출하고 있으니,

목사동 골짜기는 떠나가는 농촌이 아니라 바야흐로 돌아오는 농촌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내 식구보다 남의 식구 좋으라고 한 일이건만, 남편은 생색도 내지 않고 덤덤하게

“내 배밭 가차우니 내 일 보기도 편허잖여” 응수하고, 항변하던 아내의 얼굴엔 슬몃 웃음이 비친다. 
부창부수다. 부부는 닮았다.

▲ 그의 서재 희구당. 할아버지 때부터 지녀온 고서며 누렇게 바랜 옛날 문예지부터

요즘 신간 서적까지 사방으로 병풍을 두른 듯 촘촘하고 알뜰하게 정리된 것이

오래된 남와 어린 나무가 함께 자라는 숲에 들어선 듯.

ⓒ 김태성 기자 / 2007-05-07


편지 한쪽도 금쪽처럼 간직하는 그 마음

5대째 120년 세월을 이어 온 그의 집.

그 한 세월, 고물고물 기어다니던 갓난쟁이가 혈기 푸른 청년이 되었다가 순하게 늙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집이다.
바지런한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성 부른 그 집의 안팎엔 고요하고 정갈한 윤기가 스며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집은 외화내빈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속이 꽉 찬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사랑채에 들인 그의 서재엔 예사롭지 않은 필치의 현판이 걸려 있다.

희구당(喜懼堂). ‘즐거울 희(喜), 근심할 구(懼)’,

기쁨과 두려움을 안고 있는 처소라니 당호라기보다 인생 철학쯤으로 들린다.
“좋은 일 있으면 까불고 힘든 일 있으면 절망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이지만,

좋은 일 앞에서도 너무 까불지 말고 절망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즐거움을 찾으라는 뜻이지요.”

서재는 온고지신하는 이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할아버지 때부터 지녀온 고서며 누렇게 바랜 옛날 문예지부터 요즘 신간 서적까지

사방으로 병풍을 두른 듯 촘촘하고 알뜰하게 정리된 것이 오래된 나무와 어린 나무가 함께 자라는 숲에 들어선 듯.

그의 소장목록엔 가령, 공초-오상순에게서 받은 담배 한 갑이 그 시절의 추억과 함께 끼여 있는가 하면,

희부연 창 옆에 걸린 액자엔 누렇게 바래가는 흑백사진 한 장이 남모르는 진가를 가진 보물인 듯 연륜을 더해 간다

(사실은 어느 잡지에서 뜯은 것이다).

“나한테 들어오는 것은 신문지 하나라도 안나간다”는 그이.

글자를 다루어 영혼을 아로새기는 작업을 하는 그이기에 인쇄물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

“만든 이의 혼을 담은 것 아닙니까. 전라도닷컴도 한 200년 지나면 문화유산이에요.”
편지 한쪽도 금쪽처럼 여기는 그이의 집에서는 할아버지의 편지도 자랑스러운 역사고 유산이다. 

▲ 5대째 120년 세월을 이어 온 그의 집.

바지런한 부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성부른 집의 안팎엔

고요하고 정갈한 윤기가 흐르고 속이 꽉 찬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 김태성 기자 / 2007-05-07


콩나물 깍대기도 없이 입으로만 전해지는‘집노래’

빛바랜 서책들 곁엔, 그것이 만들어진 세월을 짐작케 하는 표구 액자가 눈에 띈다.
할아버지대로부터 70년 넘게 이어져 온 가훈과 ‘집노래(家歌)’다.
만손일심(萬孫一心)하라 전해지는 가훈은

근면·진취요 ‘가도(家道)중심’은 화락(和樂)이다. 그 아래 씌어진 것은 ‘집노래’.

<깨끗한 피 궂센 힘 모아 닐우어/ 이천해 니여온 우리집 역사/ 겨레는 억천만 마음은 하나

/ 집을 위한 몸바친 우리집 주의/ 질거운 뜻 부지런 팔뚝 갖이고/ 더욱더욱 나어갈 우리집 가훈

/ 가론 땅갓 세로는 하늘과 함께 / 내 때 내손으로 될 우리집 가도(家道)>
이름도 생소한 집노래. 그는 “내 한번 불러 볼까요” 하고 첫 소절을 우렁우렁 부른다.

시조가락으로 할아버지가 부르던 것을 귀에 담아 기억한 것이다. 

“시골영감이 밥묵고 헐 일 없어서 헛폼 잡았는가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집안에 집노래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지요.

콩나물 깍대기도 없이 입으로만 전해지는 놈이니

음대 작곡과 다닌다는 집안 아이놈한테 악보로 한번 정리해 보라고 할 참입니다.”
노래 속 ‘질거운(즐거운) 뜻 부지런(한) 팔뚝’을 좌우명처럼 살아가는 그이.

산등성이 희디희게 덮었던 배꽃들 다 지고 나면

낮으로는 새 잎 푸른 자리마다 종종거리고,

밤으로는 희구당 문 앞에 대숲 바람 소리 청정하게 흘려 놓고

오늘 아니면 새기지 못할 글을 새기고 있으리라.

기사출력  2007-05-07 16:53:13  

ⓒ 전라도닷컴

 

*출처 :광주전남소설가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 어이-쇠

 

 

 

* 글이 있는 돌각담 *

 

 

돌각담 육필비-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신전리

 

어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어른이 되는 것이어서 그 아이도 어른이 되었지요.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해서 서울로 왔다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닌 것 같아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고향사람들과 비료를 나누고,

고향 산들에는 과일을 심고,

시간이 나면 젊은 날의 초상을 그렸지요.

그러기를 40년.

코 흘리개 아이들도 성장해 가정을 꾸리고,

어느덧 그에게도 황혼이 왔지요.

그 어느 황혼의 시간에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만들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틈틈이 그가 그리던 젊은 날의 초상은,

그를 소설 돌각담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58세에 신인문학상을 받게 된 것이지요.

 

 

 

무어 농촌운동이 별스러울 게 있겠어요.

평생을 농촌에서 살면서 농업을 하면 그것이 농촌운동이지요.

허울 좋은 말보다 농촌 지키면, 그것이 진짜 농촌운동 아닌가요.

낮에는 농사, 밤에는 글쓰기.

평생을 그와 함께 있었던 농가의 돌각담.

이제 그 돌각담이 소설가의 꿈이 아닌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출처 :좋은 사람들 두레 원문보기   글쓴이 : 이재범

 

* 글이 있 는 돌 각 담 *  

 

인적조차 보기 드문 이 고샅길을 돌각담길로 가꾸고자 하는 마음은 별난 아름다움입니다.

그렇지만 더한 아름다움은 흙냄새 풍기는 순박한 마을 사람들의 고운 심성(心性)입 니다.

이 흔적痕迹은, 먼 후일後日에도, 희미한 달그림자로,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돌각담”의 형상화로 마을길을 아름답게 꾸미는 한편,

이 골짜기와 인연이 있는 분들의 육필(肉筆)을 돌각담 속에 숨겨 놉니다.

풀잎보다 싱싱한 모습으로,

고향 사랑의 잔 잔한 진혼곡(鎭魂曲)으로, 또한 글 자리의 디딤돌로...

 

*돌각담 사이를 장식한 글들.

 

<안내문>

 

글에 취(醉)한 돌각담은

하늘 아래 가장 쓸쓸한 땅에 있습니다.

햇살조차 머뭇거리는 이 골짝에

마을 사람들의 자화상自畵像을 남깁니다.

 

이 장 : 정 정 태

새마을지도자 : 이 봉 안

 

목사동 면장 : 마 덕 숙

총무계장 : 한 상 백

 

단기4341년 늦가을에. 마을 상징문

----------------------------- 

 

1)

 

신 전 리 봄

 

/임 보

 

아미산 산자락

대숲 마을 이른 봄 배 밭에

꽃이 일면

돌각담 골목마다

은 웃음들

떠가 던 흰 구름도

길 뭠추네

 

1940년 서울대 국문과. 현대문학 시 추천.

시집. “장닭 설법” “은수달 사냥” “가시연꽃” “자연학교”

충북대. 정년퇴임.

 

2)

 

/곽재구

 

외로운

해와

달이

잠시 머물러

지친 발걸음 쉬어가는 이곳

 

꽃과

바람과

새들의 춤이

인간의 주름살 곁에

오래 오래

머물은 이곳

 

그대여

문득 뒤돌아서서

바라보는 길들

또한

사랑스럽지 아니한가

 

/곽 재구

 

1954년 숭실대 대학원.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사평 역에서” “낙타풀의 사랑” “삶을 흔들리게 하는 것들”

순천대학.

 

 

3)

 

/공선옥

 

어둠이 좁은 방안에 밀려든다

어둠 속에서 나는 꿈틀한다.

무엇인가 꿈틀한다.

그곳은 깊고 어두울 것이다.

모든 생명이 움트는 곳은 어디나 다아 한가지로,

 

공 선옥 단편소설 “피어라 수선화” 중에서

 

 

1964년 전남대. 창작과 비평에 중편으로 등단.

소설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 “명랑한 밤길‘ ”유랑가족“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4)

 

입춘 무렵

 

/윤 석주

 

소설 쓰며 배농사 짓는

싱건지 맛 그만인 목사동 李白 兄네

정월 초닷새 배곯은

달빛만 가득한 마당가

기방에서 쫓겨나 사립문

기웃거리던 梅花란 년

싹수 노오란 열일곱 고 가시내

지난 겨을

상사병 지독히도 앓터니

물오른 얼굴에 뾰루지 툭툭 불거졌네.

오매 저걸 어쩔거나

 

/이천팔년 늦가을 돌나무가 쓰다

 

1947년 시와 사람 신인상

시집 “잠든 숲에 사랑을 묻다” “해의 다비식”

 

 

5)

 

목 탁 2

 

/차 창 룡

 

몇 억 광년의 세월이 흘러 별빛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속도는 보이지 않는 소리이다.

 

날아가라 어서 목탁 소리여

이 목탁 닳고 닳아 먼지가 되면

돌아오리 보이지 않는 속도로

보이지 않는 길을 만들며

 

아득한 광년의 거리 너머

빠른 속도로 천천히 떨어지는 목탁 소리

별은 먼지이므로

눈에 들어가 눈물 흘려보낸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여준다.

 

1966년 중앙대 대학원.

“문학과 사회” 로 등단

시집. “나무 물고기”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인도 신화”

김수영 문학상. 중앙대. 경기대. 서울여대 출강.

 

6)

 

/이재범

 

이 주차장에서 마을로 들어가니

확 트인 바다가 보이며 마을이 나타났다.

이아 마을, 그리스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답다는 곳이다

파란 지붕에 그리스정교회식 십자가를 단 교회들

그 사이로 넓은 날개가 달린 풍차들

히피서커스가 만개한 푸른색 지붕의 하얀 작은 집들,,,

이아 마을의 첫 인상은 그랬다.

이른바 카사비앙카(언덕 위의 하얀 집)가 아닌가?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보이지만

실은 오랜 세월 척박한 자연 속에서 삶을 일구어 온

이곳 사람들의 땀이 배인 곳이다.

 

/이 재범 “나의 그리스 여행” 중에서

 

1951년 성균관대학.

“슬픈 궁예” “한반도의 외국군주둔사” “나의 그리스 여행”

경기대. 경기도문화재 위원장.

 

7)

 

/조용헌

 

인간을 연구한다는 것은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고

자연을 연구한다는 것은 인간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이치는 그때마다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있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태풍을 보고 인간사를 예측할 수 있다.

난세의 조짐을 미리 보는 것이다.

하늘에는 측량하기 어려운 비바람이 있고

사람에게는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화복이 있다.

 

/조 용헌. “사주명리학 이야기”에서

 

1961년 원광대학교. 조선일보에 조용헌 살롱 연제중.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고수기행” 방외지사“ ”사주 명리학 이야기“

조선일보 논설위원. 원광대.

 

8)

 

개 떡

 

/문 순 태

 

내 유년의 초록빛 하늘에

개떡 하나 둥둥 떠 있다.

배고파 눈 질근 감으면

개떡 같은 보름달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 희망은 개떡이었다.

어머니,

어릴 적에 맛나게 먹었던

보름달 개떡

어디에 숨겼어요

쫄깃쫄깃 들큼한 희망의 맛

돌려주세요.

 

1941년. 조선대. 한국문학으로 등단.

소설 “징소리” “철죽제” “타오르는 강 7부작” “정읍사”

전남일보 편집국장. 순천대. 광주대. 정년퇴임.

이상문학상 특별상. 문학의 집 생오지.

 

9)

 

/박 혜강.

 

천지간에 꽃잎 흩날리던 날,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생의 무게가 얼마나 버거운 것이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어떻게 변하는지.

슬픔은 슬픔만큼 깊어지고, 슬픔은

슬픔만큼 넓어지고, 슬픔은 슬픔만큼

커졌다가 마침내 그 슬픔을 먹어치우고

또 그 슬픔을 넘어 이름 모를 꽃으로 다시

피어나게 될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무등일보 연재소설 “풀잎으로 눕다” 중에서

 

1954년. 조선대. 문학예술운동에 중편으로 등단.

소설 “ 운주 5부작” “도선비기” “조선의 선비”

광주전남 작가회의. 광주전남소설가협회 회장. 역임.

 

10)

 

/백시종

 

돌각담의 아름다움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참혹한 비극을

서정적인 문체의 돌과, 탐구

적인 시각의 돌과, 따뜻하지만

엄숙한 목소리의 돌과, 연민의

돌들을 생김새대로 차곡차곡 쌓아

놓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10월. /백 시종.

 

1944년 서라벌예대.

대한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 현대문학 추천.

소설 “돈 황제” “걸어 다니는 산” “환희의 끝” “서울의 눈물” “물”

한국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채만식문학상. “계간문예” 주간.

 

11)

 

/이근배

 

어머니가 매던 김 밭의

어머니가 흘린 땀이 자

라서 꽃이 된 것아 너는 思

想을모른다 어머니가

思想家의 아내가 되어서

잠 못 드는 平生인 것을

모른다

 

졸시, 냉이꽃의 일절을

 

/사천-이근배 적다.

 

1940년 서라벌예대 문창과.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노래여, 노래여” “한강” “시가 있는 국토기행”

시인협회회장 “한국문학” 주간역임.“문학의 문학” 주간. 재능대. 예술원 회원.

 

12)

 

/이명한

 

뜻이 조금 다르더라도

몸을 스치며 걸어가다 보면

얼었던 마음이

어느덧 따뜻해지는 것을

南과 北이 어찌 다를까.

저 푸른 하늘 함께 이고

비단 같은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아

 

이 명한 :1932년 조선대.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황톳빛 추억” “달뜨면 가오리다”

광주전남문인협회장. 광주전남 민예총 회장역임

 

13)

 

/이순원

 

대부분의 행성이 자기가 지나간 자리를

다시 돌아오는 공전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런 질서와 정해진

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

이란 일은 모두 2천5백만년을 주기로

되풀이해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2천5백만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지금과 똑같이 여기에 모여 오늘 우리

곁으로 온 별을 쳐다보며 이야기할겁니다.

 

소설 “은비령” 중에서

/이 순원

 

1958년 강원대. 문학사상 신인상.

은비령” “말을 찾아서” “순수” “아들과 함께 걷는 길”

효석 문학상. 한무숙문학상.

 

14)

 

/임철우

 

한때 우리는 모두 별이었다.

저마다 꼭 자기 몫만큼의 크기와

밝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채,

해 저문 하늘녘 어디쯤인가에서,

꼭 자기만의 별자리에서

자기만의 이름으로 빛나던,

우리 모두가 누구나 다 그렇게

영롱한 별이었다.

 

/임 철우 “그 섬에 가고 싶다 중에서“

 

1954년. 전남대.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소설. ”봄날 5부작“ “백년여관” “그 섬에 가고 싶다” “등대아래 휘파람”

단재상. 요산문학상. 이상문학상. 한신대. 교환교수로 중국에.

 

15)

 

/채희윤

 

도대체 누가 이 보리를 심었을까. 불하받은

땅이라서 아직 집을 짓기는 싫어서 그 대신 낭만을

심어 보자고 심은 것일까. 아니면 저 아파트에

서, 자식들에 얹혀사는 시골 노인들이, 억지로 버리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의 터에 파종을 했을까?

이제야 그는 조금 전 노인네들이 그들이 아닐까 생각

했다. 그들이 젊음을 그리워하듯이, 옛날 보리밭에

서의 정사를 생각하며 기분을 내 보려 자식들

몰래, 이 한밤에 나왔을까? 도대체 누구일까.

이렇게 푸른 절망의 씨앗을 파종하고, 퇴색한 상처를

되살리는 사람은.

 

소설 “밤, 견인의 시각” /채 희윤

 

1954년 서강대 대학원. 한국일보 신춘문예.

“별똥별 헤는 밤” “스무고개 넘기” “곰보아재” “소설 쓰는 여자”

광주전남 작가회의회. 광주전남소설가협회 회장 역임. 광주여대.

 

 

16)

 

이런 꿈 한자락

 

/천 승 세

 

 

모지락스러운 세상 목숨 벼르노라 사대육신

눅쳐지는 날엔 이런 꿈 한 가닥 담은 단

봇짐 들고 길 떠나보자.

 

섬도 아닌 땅 땅도 아닌 섬 한 곳 물색해서

자란자란 띠 돌리는 물길 모재비 헤엄질로 건너

연화리에 오똑 올라 풋각시 허릿매 같은

환한 길 한골로 닦아 목사동 되짚어 오를 일.

아직도 즈런즈런 젊디젊은 통명산 벼룻길

달근달근 타내려 필봉 서벅돌 틈 낙낙한

자리 한 곳 골라 곡성땅 마지막 파시

주렁주렁 키우는 감나무 한그루로 희우둠이 서서

붓대 쥔채 날밤세우는 신전리 재백(在白)이의

새하얀 새벽이나 지켜볼꺼나

 

1939년 서라벌예대. 성균관대.

동아일보 신춘문예. 국립극장 장막극 현상공모 당선.

소설 “맨발” “혜자의 눈꽃” “낙과를 줍는 기린” 시집 “몸굿“

 

17)

 

/한승원

 

거문고는 왜 신의 악기(神 琴)

인가 수많은 누에고치들의

순절 때문이네. 그들의 몸

비틀어 꼰 울음은 혼의 음

되어, 그 음은 빛이 되어,

그 빛은 새가 되어 펄펄

하늘로 날아가네.

 

詩, 글씨 / 한 승원

 

 

1939년 서라벌예대 문창과.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 “동학제 7부작” “해일” “원효” “추사” “아제아제 바라아제” “목선”

이상 문학상. 김동리 문학상. 수상. 해산토굴에 칩거. 조선

 

18)

 

목 사 동 연 가

 

/최 정 주

 

목사동 신전리 마당 넓은 그 집에는

배꽃같은 사랑이 살아요. 떠난 사랑으로

가슴에 꽃병이 들어 아픈 날이

주인 몰래 한번 다녀 가시지요

운이 좋으면 소쩍새가 부르는 사철가

한 대목 들을 수 있고요. 주인에게 들키

사랑같은 배 맛도 볼 수 있지요.

 

1951년 원광대 국문과. 한국문학에 중편소설 당선.

소설 “아리랑” “흰소” “일지매” “안개” “황진이”

백제예술대

 

19)

 

섬으로 가는 2박 3일

 

/이생진

 

이렇게 가족 몰래 사는 가족이 있었던가

모이니까 한 식구 같다

남원을 지나

곡성에서 이재백 소설가

돌각담 같은 순수한 사람의 손

진갑이 훨쩍 지난 것이 허무한 게 아니라

이런 만남이 고마워.....

고목에서 예쁜 꽃을 피우고 싶은 것은

과욕이 아니리라

생명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는 방법이다

 

시골에서 배농사를 하며 글을 쓰는

이재백

서울에서 시를 쓰는 내 손이 부끄러워

그의 손보다 먼저 내 얼굴에 미소를 바른다

술이 맛있는 것도 이런 손 때문이리라

그는 무궁화호에서 내려

다시 곡성에서 헤어졌다

이 세상에 태어나 글을 쓴다는 거

술을 마신다는 거

그리고 얼굴을 마주보며 취한다는 거

2박 3일은 그것을 확인하는 술잔이다.

 

1929. 국제대학.

현대문학 추천, 그리운 성산포. 바다에 오른 이유. 나의 부재.

윤동주문학상, 그리운 성산포로, 제주명예 도민증.

 

<1> 글 비(碑) :자연석19 개

<2 >돌각담 길이 13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