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나루터 전설 / 이재백(李在白)◈소개작품◈
나 루 터 전 설
/이재백(소설가)
“저런 년은 맷돌에 갈아 마셔도 싸지, 싸.
덕석몰이를 시키던지 코 꿴 송아지 맹키로 동네방네 끌고 댕김서
광고라도 돌려야 될 것 아녀?
이놈 저놈 붙어먹었으면 창피한지나 알아야지
무엇이 잘났다고 땅바닥에 덜퍼덕 주저앉아
날 잡아 묵어라고 똥배짱만 부린단 말이여?
참말로 낯짝 하나 좋은 년이제,,,”
멧돼지 목줄이라도 끊어놓을 듯 불끈 움켜진 억보의 손목이 파르르 떨린다.
핏자국이라도 길길이 뿌려야만 성깔이 풀릴 것 같은 억보는 숨결만 거칠게 몰아쉰다.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눈자위엔 핏발마저 서렸다.
“콱 저 잡년을,,,”
강 건너 연화리 쪽에서 갈가마귀 떼의 목 놓는 소리가 들려오자
억보의 고개가 아래쪽으로 힘없이 꺽어진다.
“쥑이던 살리던 이녁 알아서 할 일이제.”
주먹가심 하나로도 작살날 것처럼 연약하게 보이는 점례의 등허리에
어느 듯 어둠이 스멀스멀 나리고 있었다.
“참말로 뒈져볼 것이여?”
억보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댈수록 점례의 가냘픈 등허리는 철갑선 마냥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몸서리난 놈의 세상 나도 얼른 그만 뒀으면 쓰것으니 쥑이던 살리던 이녁 맘대로 허시씨요.잉.”
체념이 아니었다. 어쩌면 완강한 저항인지 모른다.
악에 바친 나머지 부르짖은 소리 같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판사판.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까지 가자는 것 아닌가.
열기를 뿜어내던 억보의 입술에선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우라질 놈의 날조차 염병이여. 이 늦가을에 천둥은 웬 천둥이여.
차라리 요 잡것들이 나 콱 조질 일이지 마른 놈의 하늘에 천둥이 뭐란 말이여.”
억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사시나무처럼 떠는 점례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낚아채다 말고 땅 바닥에 침을 내 뱉는다.
먹장 같은 어둠이 서서히 밀려오더니 강나루 저쪽에선 이따금 섬광이 일었다.
하늘을 에워 싼 먹장구름들, 천둥의 웅얼거림,
칠흑 같은 어둠이 억보의 심장에 불길을 지피는 형상이었다.
“콱!”
억보는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 성깔을 돋구다간 제풀에 또 지쳐버린다.
“니 죽고 나 죽으면 그만잉께,,, 이 똑똑한 여편네야.”
또 천둥이 으르렁댄다. 이번엔 활머리 뒤쪽 여호골 골짜기로 벼락이 내려치는 모양이었다.
소나기라도 한줄기 몰고 올 듯 밤의 습기가 후줄근히 스며든다.
“왜 말을 못 혀?”
전라도 곡성 땅의 맨 남쪽. 섬[島]이 아니면서도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 목사동이다.
곡성이라는 고을 자체가 이름이 안 알려진 건 물론
혹시 기억하더라도 흉악스런 산골로만 여기는 게 아닌가.
게다가 나루터를 건너 일단 연화리로 되짚어나가야만 육로{陸路}가 시작되기 때문에
읍내 사람들은 이쪽 사람들을 싸잡아 섬사람이라느니
유배지 사람들이라고 은근히 얕잡아보기 일수였다.
올망졸망한 노령산맥의 틈바구니에 촘촘히 들어박힌 마을들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옛날부터 산수 좋고 인심 좋아 살기 좋은 피난지로 일컬었지만 듣기 좋은 풍월일 뿐이다.
살기가 힘든데 뭘 해? 인심이야 사납더라도 교통 편리한 장터가 더 좋은 법이지.
장돌뱅이가 더 부러운 것 아닌가?
“제기랄, 우리 면에 국회의원 하나만 있어도 뱃석거리 다리 하나는 받아 놓은 밥상인데,
이 게 무슨 꼴이냔 말이여.」
눈보라가 세게 몰아치고 통명산 기슭에서 밀어닥친 강풍이 귓밥을 씹어 돌리면
입으로 어한이라도 풀 듯 엉뚱한 타박들을 해대는 이곳 사람들이다.
지세가 험하고 고만고만한 산들만이 머리를 쫑긋거리니 햇살조차 인색하였다.
들녘이라야 우렁쉥이 창자 반쪽만한 거였으니
한나절씩 산그늘에 젖어드는 논배미는 들녘논의 반 수확이면 흡족한 터였다.
조막손만한 땅마지기 하나 없이 알량한 뱃 새경만으로 호구지책을 해야 하는 억보의 형편은
보나마나 뻔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 알량한 놈의 뱃사공마저 몇 달 안으로 그만둬야 될 형편이니
겉으로는 남의 일처럼 태연했지만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맞은 꼴이나 다름없었다.
오뉴월 풋 서리가 나리든 칠팔월 우박이 쏟아지든 억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절이 풍요로우면 잔치 집의 상차림에 접시라도 몇 개 더 올라 뱃심조차 든든할 터인데
흉년이라서 그런지 이런 인심조차 흉흉하였다.
추수가 끝난지 엊그제 같은데 장리 쌀 얻을 궁리에 혈안들이었다.
연화리와 들말 사이를 잇는 다리[橋] 공사는 늦봄부터 시작되었다.
괴상스런 포크레인이 산더미 같은 모래자갈더미를 한 쪽으로 밀어 올려 둑을 쌓는다.
몇 개의 웅덩이를 만든다. 그리고 한쪽으로 새로운 물길도 만들었다.
대형모터들이 밤낮 쉴 틈 없이 웅덩이의 물을 품어 올린다.
선착장마저 순식간에 딴 쪽으로 옮겨놓는 것이다. 모든 것이 눈 깜작할 사이에 변해버렸다.
벌써 몇 개의 교각들이 시야를 가로막는 것 아닌가.
이따금 들려오는 산새소리와 여울 소리만이 어울리는 곳.
태고의 전설마저 삼켜버린 마의 음성 같은 것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어둠의 연속일 뿐이다. 천둥소리가 멎자 어둠 속의 대지는 두려울 만큼 깊은 적막 속으로 잠겨 들었다.
살아있다는 느낌은 가느다란 강물의 흐름소리 때문일까.
점례의 흐느낌은 가냘픈 여인네의 음성으로 억보의 가슴을 떨리게 하였지만
웅얼거리는 엔진 소리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십여 년을 계속해 오던 사공노릇을 그만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낭패감보다 더 무겁게
심장을 압박해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막힌 숨통이라도 터진 것처럼 좋아하는 연화리와 들말 사람들 모양
어깨춤이라도 덩실덩실 추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그와는 정반대였다.
어느 하루 편할 날이 없었던 억보였다.
남들이 편히 쉬는 명절이면 더욱 바빴다. 하늘에서 먹장 같은 빗방울이라도 퍼부어
강변의 들녘까지 물이 넘쳐흘러 물난리가 나야 쉴 수 있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억보의 초가삼간 뜰 앞까지 황톳물이 넘실거려 두발을 동동 굴려야 될 형편이었다.
돌림병에나 몸살감기에 걸려 몸져누울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바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놈의 사공 짓은 그만 둔단 말이여, 이 짓 안 한다고 산 입에 거미줄 칠까 싶어서.”
마음을 굳힌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 세월이 너무나 허무했다.
일찌감치 때려치우고 딴 짓을 했더라면 이 보단 몇 배나 나을 것을, 하는 아쉬움만 남았다.
비록 뒤늦은 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았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호구지책을 위하여 평생 뱃사공 소리를 못 면할 터인데,
홀가분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몇 번이고 다짐했던 결심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마주 대하면서 또다시 흔들리는 것이다
징그러운 굉음소리가 천둥소리와 엇갈려 억보의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치미는 분노를 가까스로 잠재워 놓았지만 다시금 돋구게 하는 것이다.
나루터 초가삼간은 강풍이라도 세게 불어 닥치면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어린애 팔뚝만한 서까래는 연기에 그을려 연한 먹물 입힌 듯
거무튀튀한데 썩은 지지랑물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그런지 그믐날 밤의 고목 응어리처럼 음습하게 느껴졌다.
삼 년째 이엉조차 못한 지붕 위에는 시들어진 잡초넝쿨이 멋대로 널려 퍼져 있어 빈집을 연상시켰다.
나룻배가 매여진 선착장에서 겨우 스무 발짝 남직한 거리였다.
억보는 파랑새 한 개비를 피워 물고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시커먼 먹구렁이 띠를 두른 가을 하늘의 변덕 때문에 강줄기며 나루터 건너편 큰길은 말 할 것도 없고
웅장한 통명산의 등신도 안 보이는 것이다.
두 개의 교각만이 괴물처럼 어둠을 차단할 뿐이다.
희뿌연 저녁연기가 살살 피어올랐다간 낮은 기압골 때문에
강나루 수면에 맞닿을 듯 펑퍼짐하게 내려 깔리는 것이다.
초라하고 궁상스러웠지만 아늑하고 평화스런 안식처.
대대로 이어온 유산처럼 억보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채 진한 감동까지 주는 것이다.
억보가 죽기 전까지는 결코 떠날 수 없는 마음의 안식처로 느껴본 일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리 공사가 완성되어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팔 톤 트럭이며 버스가 지나게 되고
나룻배는 필요 없는 유물로 변한다 하여도 억보는 이 나루터에서 떠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신에게서 점지 받은 사명감 비슷한 거였다.
억보는 분노를 삭일 속셈인지 백사장에 펑퍼짐하게 주저앉았다.
앉았다기보다 전신을 핑 개친 꼴이었다.
오른쪽 손에 쥐어진 몽둥이가 힘없이 백사장에 내둥근다.
“양심이 있으면 생각 혀 봐. 방금도 이 눈구멍으로 똑똑히 .봤응께.
그 새낀 내 손목뎅이로 기어코 때려죽이고 말 것이여, 지가 도망을 가,
가면 어디로 갈 것이냔 말이여.
니 주둥이로 그놈 이름을 확실히 말해 봐/“
도둑고양이처럼 잽싸게 도망가 버린 공사장의 오 감독에게 향해진 분노보다
점례에게 향해진 분노가 더 큰 것이다.
“ 정말로 말 안 할 거여? 나란 인간은 인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응께 성깔난대로 해버릴 것이여,,,”
점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도 많았다.
긴가 민가 하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간 사라지고 잊을만하면
다른 소문이 또 꼬리를 물었다. 누구와 상관했는지 목격한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럴듯한 소문들이 심심찮게 이 사람 저 사람 입으로 옮겨졌다.
입방아를 찧어도 모른 채 딴전을 피웠지만 그런 눈치나 쑥덕거림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란 별명이 알맞을 만큼 무던한 위인이었으니 망정이지
동네 굿을 몇 번쯤 보일만한 터였다.
한 달에 한번쯤 갈까 말까한데 그나마 강나루 나룻배 지나듯 어물쩍 해버리는 터이니
점례만 탓할 일이 아니라고 수군덕거렸다.
유난히 그쪽 사정에 눈이 밝은 점례의 양을 못 채워주는 탓에
억보는 눈치를 채고도 모른 척 눈감아 준다는 풍설마저 그럴 듯 하게 떠도는 터였다.
사시사철 떠날 줄 모르는 궁기가 그런 소문들을 그럴싸하게 뒷받침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석곡 장에서 잡화를 떼어다 도붓장수를 시작하겠다고 점례 쪽에서 말문을 열었을 때도
억보는 한마디로 묵살했지만 며칠이 못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를 내돌린다는 것이 꺼림직 했지만 만류할만한 명분도 없었다.
“허우대만 멀쩡하면 사낸가? 사내다운 구실한 번 제대로 해봤소, 어쨌소?
속이 있으면 시원하게 대답이라도 해야지, 꿀 먹은 벙어리같이 왜 입만 다물고 있소?”
비아냥거림이 아니었다. 숫제 오장육부를 찢어발기는 막된 말이었다.
애당초 고개를 끄덕인 억보에게 허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날이 갈수록 생기조차 도는 점례의 얼굴과 맞닥트린 억보는 오히려 잘한 일인 것처럼 느꼈다.
암팡진 얼굴에 서린 독기가 사라진 것 같았다. 말끝마다 물고 늘어지는 투정도 그랬다.
오랜만에 느끼는 정겨운 맛이랄까. 세간 살림살이도 좀 더 윤택해진 듯싶었다.
어쨌든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보다 점례의 옷맵시는 물론 얼굴의 치장도 몰라보게 변했다.
몸 전체에서 풍기는 새로운 생명력은 억보조차 가벼운 충동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겨우 석 달짼데 당신 일년 새경하고 막 묵게 생겼소.
요렇게 좋고 오진 걸 놔두고 여태 헛살았단 말이요.”
“정말이여?”
가까운 이웃마을이 오리, 약간 멀다한 한 마을은 십리, 좀더 먼 마을은 시오리길이다.
어물쩍거리다 보면 서편햇살이 슬그머니 머리를 숙이고 땅거미가 스르르 몰려온다.
우마차나 겨우 비집고 다닐만한 시골길이다 보니 어둠만 내리면 별천지와 다름없다.
어디선지 산짐승이 덮칠지도 몰랐다.
속된말로 도깨비불이 설칠 것 같은 암흑의 동굴이나 다름없는 터였다.
그보다 더한 것은 사람 도적일는지 몰랐다.
건강한 남정네가 다니기에도 위험스런 길을 젊은 여자가 혼자 다닌다는 것은
애당초 화를 짊어지고 다닌 거나 다름없었다. 밤길을 걷다가 봉변을 당한다면,,,
한 달이 채 못 되어 시작된 외박은 새로운 화근거리가 되었지만
미안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안 보였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미심쩍소. 여편네를 외박으로 안 내돌리려면 사내구실이나 제대로 해야지.
남들처럼 편케 한번 거쳐 해봤소. 그렇지 않으면 돈이라도 제대로 벌어다 줘봤소?”
그러고도 또 오금을 밖아. 억보 쪽에서 입 한번 뻥긋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렇게 못미덥소? 그리고 뭐 몹쓸 짓이라도 했소?”
점례의 투정에 넌더리만 낼 뿐 억보는 그때마다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녁도 세상 바람 좀 쐐야지, 어디 갑갑해서,,, ”
저녁이었다. 잠자리에 들기는 이른 시간이었다. 공연히 짜증이 앞섰다
못 올 것으로 짐작했지만 뭔가 켕기는 게 있었다.
일종의 예감이랄까. 그렇지만 억보는 머리를 내저었다.
쓸데없는 망상은 죄악이 아닌가. 자신의 무능이 만들어 논 업보가 아닐까.
억보는 문지방을 넘어서다 말고 문득 코끝을 스치는 향내를 의식했다.
점례와 살을 맞댄 게 달포가 지난 것 같았다.
점례 쪽에서 야멸스럽게 굴수록 마음을 다그쳤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점례의 몸매에서 풍겨 나오는 진한 향내,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억보는 아래쪽이 불끈거리는 걸 느꼈다.
허구한 날 삶에 지친 나머지 소중한지 몰랐던 점례가 갑자기 그리워진 것은 웬일일까.
어디선가 철지난 귀뚜라미가 쓰르르 쓰르르 울 것만 같았다. 연신 헛기침만 터트렸다.
어쩌면 밤늦게라도 점례가 귀가하리라는 바램인가.
그렇지만 억보의 발걸음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공사장의 인부 막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오 감독의 막사 쪽으로.
강 건너 연화리에선 반딧불 같은 희미한 호롱 불빛만이 아른거렸다.
억보는 꺼질 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조계산 준령에서 기습공격을 받은 빨찌산의 대열이 전의를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승산이라곤 없는 전쟁. 위기를 넘기고 나면 또 다른 위기. 미래라곤 없었다.
총소리로부터 먼 쪽으로만 달렸던 것이다.
이름 모른 계곡이며 산모퉁이들. 다람쥐 부채바퀴 돌 듯 부지런히 움직였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동료를 거들떠볼 여유조차 없었다.
사냥꾼에게 쫓기고 쫓기는 한 마리의 산돼지나 다름없었다.
적, 출현. 튀어, 항상 도망치란 소리였다. 계속 이어터지는 터지는 총소리들,
그리고 비명들. 또 몇인가 풀숲에 짐승 같은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억보는 아랫배를 내려 깔고 낮은 계곡으로 몸을 날렸다.
아미산 준령을 타고 도망간 곳이 활머리 뒷산 여호골이었다.
그러니까 억보의 초가삼간이 있는 나루터의 뒷산 쪽이었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참을 수 없는 허기와 추위. 생존의 한계점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숨을 쉰다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어느덧 눈발이 그치고 아침 햇살이 퍼졌다.
보성강 지류에 널려 퍼진 아침 햇살은 수면에 반사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억보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보이는 게 없었다. 강렬한 아침 햇살은 환희나 광명을 의미하기 전 죽음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억보의 눈을 가로막는 괴물 덩어리는 몇 백 근[斤]이 넘는 북극의 불곰이나 다름없었다.
쫙 벌어진 양어깨와 귀밑까지 눌러 쓴 털모자 속에서 솟구치는 강렬한 시선이 억보를 한눈에 압도했다.
안간힘을 주었던 총대가 손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육중한 체구를 실은 발짝은 억보의 눈 앞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한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 수 천 년의 비밀을 간직한 골동품을 감상하는 진지하기만 한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수시각각 변하는 그 표정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최후의 발악을 해대는 빨치산의 마지막 패잔병,
그 악명은 잠자는 어린 아이도 놀래 울음을 그친다는 게 아닌가.
떨어진 총대를 움켜쥐려는 억보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노인은 자신의 심장을 향하게 될 총구를 태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발버둥쳐서 총대를 집더라도 쏘지는 못할 거라는 확신이 서는 듯 너무나 여유 만만했다.
“이런 개새끼,,,”
억보는 전신의 힘을 모았다. 노인에게 향해진 욕설은 입 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졌다. 움직일 수 있는 기력은 죄다 쇠진해 버린 것 같았다.
“어리석은 짓은 안 하는 게 현명 혀. 그 알량한 명줄이라도 지탱하고 싶으면,,,.”
동녘 햇살이 연화리 나루터 물빛에 어리어 연백 색으로 희끗희끗한 해진 노인의 머리칼에 부대꼈다.
“젊은이도 나 같은 사냥꾼인가?”
노인은 무뚝뚝하게 내뱉고 나서
“사냥을 나온 게 아니라 사냥을 당한 꼴이군.”하고 중얼거렸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천애의 고아였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양친은 강원도 양구 골짝의 화전민으로 숨어살다가
어떤 무뢰배에게 칼침을 맞았다는 것이다.
철도 들기 전 일이어서 억보에겐 남의 이야기나 된 것처럼 긴가민가할 뿐이다.
몸담고 있던 고아원마저 육이오 사변이 일어나자 폭격을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소년 의용대에 끌려갔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혁명가를 부르며
산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잔심부름 따위나 하다 영웅칭호까지 받았다.
악랄한 부역행위는 물론 미성년에다가 노인에게 자수한 걸로 되어
몇 년의 징역생활로 지겨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형기를 끝낸 억보가 연화리 나루터를 찾았을 때, 노인은 반가워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안보였다.
낯선 사람을 만난 듯 덤덤하게 대했던 것이다.
“자넨 뭣 때문에 여길 또 왔지?
갈 곳이 없어서 이 곳으로 온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법이여.
얼마 안 되어 발등을 찍고 싶을 만큼 후회하게 될 테니까. 빨리 이곳에서 사라지라고,
그렇지 않으면 붙잡아서 경찰서로 넘길 테니까.
총으로 나를 쏘려고 했던 악질 반란군이라고.
그때 말이야, 자넨 분명히 날 쏘려고 마음먹었으니까. 날 속일 생각일랑 말아.
귀신은 속일지언정 나는 못 속이니까,,,”. .
하고 엄포까지 놓았다.
“이건 인연이 아니란 말이여.
불쌍해서 동정한 일은 있을지언정 인연을 맺은 일이 없응께 그리 알아서 혀.
새파랗게 젊은 사람을 나같이 맹글고 싶지는 않으니까,,,‘
억보는 노인의 말에 섬뜩한 살기마저 느끼고
나루터에서 오랫동안 기거해서는 안 될 비밀이라도 숨겨 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유일한 혈육인 점례를 억보와 연관시켜 노인의 의중이
억보 따윈 눈에 안 찬 나머지 미리 다그치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억보보다 점례의 나이가 두어 살 위가 아닌가.
활머리 뒷산 골짜기, 짐승들이 다닐 수 있는 길목마다 함정을 팠다.
산토끼며 노루며 멧돼지도 심심찮게 걸려들었다.
억보는 어느덧 노인의 식구가 된 것처럼 이른 새벽부터 골짜기를 뒤졌고
낮이면 노인 대신 나룻배를 저었다.
다그치는 투가 원래 정나미를 뗄만큼 우악스러운 것이어서 곧 떠나려니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갈 곳도 없으려니와 그 때의 일은 잊은 듯 스스럼없이 대했기 때문에
어물쩍거리던 중 한 집안의 식구처럼 어울리게 되었다.
“자넨 어디 대처로 나가야 될 텐데.‘
달포가 지나서야 마지못해 노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야 해로울 것이 하나도 없지. 젊은 사람이 옆에 있어서 든든한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허지만 그럴 수야 없지.”
그야말로 선문禪門 선답禪答이었다.
억보는 왜? 라고 묻고 싶었으나
약간 화난 듯한 노인의 옆얼굴이 무거운 바위처럼 굳어있는 걸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두렵게만 느껴졌던 모습이 한 꺼풀씩 벗겨지자 새로운 면모가 나타난 것 같았다.
말수가 적은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듬직한 체구며 좀처럼 표정이 없는 것이 그러했다.
온화한 것 같았지만 얼굴 전체에 스며드는 어두운 그늘들.
억보를 쳐다보는 점례의 눈빛에 이상야릇한 감정이 솟구쳤지만
억보는 그럴수록 노인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이대로 뱃사람 노릇만 할 참인가?”‘
노인은 겁먹은 듯 퀭한 눈동자를 강나루로 던지며 남의 일이나 된 것처럼 건성으로 말했다.
“글쎄요.”
몸 둘지를 모르는 억보가 우스웠던지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점례하고 두살 터울인가?”
하고 엉뚱한 질문만 했다.
어쩜 노인의 노후는 물론 점례의 여생까지 돌봐달라는 말인 것도 같았다.
“자네가 간다면 별 수 없지만 내 쪽에서 쫓아내진 않을 테니 이젠 안심해여.
허지만 딴 맘먹으면 절대로 안 되어, 그때는 패가망신 당한께 말이여.”
억보는 송구스러울 뿐이었다.
점례와의 사이가 발각되었을 때에도 노인은 흡사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듯 덤덤할 뿐이었다.
“꼭 이래야 쓰것는가?
이 지랄이나 하려고 여태까지 빈둥거리고 이 골짜기를 못 벗어난담?
내가 뭐라고 허든가? 자네가 있을 데가 못된다고 했지?
진작 쫓아낼 건데 발을 못 붙이도록 잡도리를 해야 하는 건데. 쯧 쯧 …”
“……”
“자넨 말이여, 저 년을 데리고 당장 꺼져버리라고. 낸 앞에서 꼴도 안보이게,,,‘
“아부지, 다 지 잘못이라우.”
점례가 목 넘어가는 소리를 하며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어르신 제가 쥑일 놈입니다. 어르신!”
“왜 자네 잘못이여?” 저년 잘못이지.‘
노인은 헛기침을 터뜨리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점례가 꼬리를 쳤든 어쨌든 모든 책임은 억보에게 있다는 준열한 판가름 같았다.
억보가 변명이라도 늘어놓아 거북살스러운 장면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쳤지만
노인의 표정이 너무나 무거웠기 때문에 한마디 변명조차 못한 채 처분만 기다리는 꼴이 되었다.
우람한 체구로 덮쳐누를 것도 같았고
우악스런 주먹으로 면상을 박살이라도 낼 것 같아 전신의 피가 바짝 바짝 말라붙었다.
“어쩔 참이여?”
매서운 눈길로 억보를 노려보았다.
“인간사란 다 저 강물과 같은 것이여. 누굴 탓할 것도 없이 팔자소관이라 여기면 그만이지.
허지만 후회할 때가 있는 법이여.
물론 저년이 먼저 꼬리를 쳤으니께 사내로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다 자네 탓으로 되는 거여.”
“어르신 제가 ……‘
억보가 어눌하게 말꼬리를 감췄다.
“어쨌든 저 놈을 맡아야 돼.
혹시 저놈이 딴 놈하고 이런 짓을 하더라도 맡아야 된단 말이시, 무신 말인지 알겠는가?」
얼떨결에 노인이 하는 말에 무조건 굽실거리며 위기를 모면했지만
억보는 무슨 뜻으로 엉뚱한 말을 되씹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살기 어린 노인의 눈이 황소의 눈망울처럼 순하게 변했다.
입가의 주름살에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다.
“아부지 죄송해요.”
억보는 감동한 나머지 몸 둘 곳을 몰랐다.
“알았으면, 명심하게.‘
물론 그때만 해도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노인의 위압에 짓눌려
무조건 머리만 주억거릴 뿐 노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아들이제?”
노인이 죽기 이틀 전 일이었다. 참으로 뚱딴지같은 말이었다.
아들이라니? 사위였지, 왜 아들이람.
할머리 뒷산에서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의 의아스러움이었다.
노인의 강렬한 시선이 억보의 심장까지 꿰뚫었다. 아무 말도 안 해야지.
입술을 들썩거리려든 노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쓸데없는 말은 무덤까지 가져가야겠다는 결심인 것 같았다.
“비밀은 지켜줘야지,,,”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다 내 불찰, 어쩌면 업보겠지,,,.
우람한 몸뚱이처럼 잔병치레라곤 모르고 지내온 노인이었다.
배앓이나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었다.
좋은 혈색이며 나이에 걸맞지 않은 단단한 체격, 활동이 왕성한 젊은 사람 뺨칠 정도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구먼.”
노인은 오랫동안 억보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표정이 없는 것처럼
모든 사물에 대해 철저하게 외면해 버리기 일쑤였던 노인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라앉을 듯이 무거워진 목소리,
고통스런 호흡으로 그렇지 않아도 어두컴컴한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졌다.
무서운 음모와 저주가 뒤엉켜있는 비밀이라도 터뜨리려는 순간 같은 긴장이 흘렀다.
“어이……”
노인은 달달 끓어오르는 해소 때문에 말을 더듬거렸다.
그 눈빛은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노라면 분노와 절규로 뒤끓는 것 같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슬픈 내색은 조금도 안 비췄던 것이다.
칠면조의 날개처럼 변해 가는 표정을 억보는 죄다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내조차.
“팔자소관이라, 참 옳은 말이여.
이런 말은 내 생전에 입 밖에 안 내려 작심했지만
자네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 하고 뉘우친다네.
다 자네 심성이 너무 고운 탓인지 모르지만,,,”
이 근동에서 노인의 과거지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례만 달랑 데리고 와 뱃사공 노릇을 했다는 것 외에는.
이따금 노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으려면 대답은 고사하고
눈자위만 번득이기 때문에 말꼬리를 얼른 사리기 일쑤였다.
남의 일은 알 필요도 없고 알아보았자 무엇 할 거냐는 투였다.
주위에서 참한 과부가 있으니 장가라도 들것을 권유했지만
그때마다 말을 꺼낸 사람이 코를 싸맸다는 소문이니,
누구하나 짝지어주려는 염두도 못 냈다.
말 못할 사연을 숨긴 채 살아가는 게 틀림없으리라는 추측들만 앞세웠다.
그뿐이 아니다. 억보는 물론 점례조차 점례의 어머니와 어떻게 이별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내심 궁금했지만 물어볼 염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불문율이나 다름없었다.
노인은 방문의 문고리를 확인했다.
“자네 안식구한테도 비밀이여. 그러고 내가 한 말은 자네만 알기로 약속을 해야 혀.”
노인은 억보에게 몇 번이고 다짐했다.
“살인자였지. 딱 한번, 그것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말이여.”
노인은 덤덤하게 말했다. 남의 일인 것처럼. 노인의 음성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화전민이었지. 사냥꾼에, 살인범. 보다시피 뱃사공. 괴상한 웃음만 허공으로 날렸다.
점례의 어머니가 두어 차례 바람을 피웠지만 노인은 모른 체했다. 그리고 깊은 산골로 숨어들었다.
그녀를 소유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눈먼 사랑 때문인가.
외부와의 철저한 차단만이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화전민에 사냥꾼. 그렇지만 그 생활도 이년이 채 못 되어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다.
점례 어머니는 젓 먹이 점례조차 팽개치고 이웃에 사는 떠꺼머리총각과 눈이 맞아 줄행랑을 놓았다.
점례를 업고 조선 팔도를 헤매기 사년 만에 강원도 양구 골짜기에서 만났다.
노인은 불문곡직하고 두 년 놈들을 단박에 박살냈다.
달랑 남은 핏덩이 사내아이조차 물고를 내려다 간신이 참았다.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가 정착한 것이 연화리 나루터였다.
“세상 인연도 끊었고 내 신세도 이렇게 조졌지. 그러나 후회는 안 해여.
얼마나 좋은가? 저 여호골을 올라가서 저 나루터를 보면 알 거여.
내가 죽거든, 자네를 처음 보았던 자리에 나를 묻어주게.”
“,,,,,,, ”
“점례 때문에 원망도 많이 할 것이여.
내 말을 안 들은 자네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을 것이여. 뭔 말인지 알겠는가?”
억보는 대답 대신 영문도 모른 채 머리만 주억거렸다.
점례에게도 불순한 피가 흐르고 있으니 조심하란 뜻인가?
노인처럼 엉뚱한 액땜을 할지 모르니 미리 조심해라고 예고해 주는 것처럼 들렷다.
그리고 노인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렇지만 단 하나뿐인 혈육이란 말이여..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땐 날 봐서......”
노인과 억보의 손등이 솥뚜껑처럼 겹쳐졌다.
“자넨 참 좋은 사람이여.”
노인의 걸쭉한 목소리가 억보의 귓전을 스쳤다.
그렇지만 애원에 가득한 목소리가 환영이란 걸 깨달았을 땐 분노가 더 무섭게 솟구친 것이다.
억보는 오감독의 막사 곁에서 귀신에 홀린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오느라 몸에 베인 열기 때문인지 초가을의 싸늘한 강풍에도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금 떠보는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사물들이 가느다란 점처럼 희미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혹시 눈치 챈 것 아녀?」
공사판 오감독의 막사에서였다.
막연한 소문들이 고리를 물때마다 미친 것들, 하고 웃어넘겼다.
어떤 녀석과 눈이 맞았는지 요모조모로 궁리했지만 짐작조차 간 곳이 없었던 것이다.
억보는 몽둥이를 꼭 움켜쥐었다.
“걱정할 건 없어, 눈치도 못 챘을 걸,,,”
“그래도,,,”
오감독은 뒷일이 씁쓸한지 약간 걱정스러운 투였다.
“그건 그렇고 약속한 건 진짜지?”
둘 사이에서 진한 정담들이 오가고 있었다.
“ 여기선 못살겠어. 대처로 데려다 준다는 약속은 진짜지?”
“또 바보 같은 소리,,,”
막연한 소문이었지만 막상 맞부딪치자 억보는 어떻게 할 줄 몰랐다.
손끝과 아랫입술이 부들부들 떨린 것 같아 소리라도 지를 뻔했다.
살인이라도 저질러야 될 분노 대신 아득한 절망의 심연 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것이었다.
먹장에 잠긴 수면 속에서 수백 마리 먹 뱀들이 똬리를 틀고 머리를 치켜들었다.
어슴푸레 나타나는 교각의 몸체는 커다란 장벽으로 억보의 시야까지 가로막고 있었다.
어둠 속을 꿰뚫은 여울소리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모든 건 죽어 있었다. 정지된 상태였다. 온 세상은 먹 뱀의 똬리처럼 검은 색깔이었다.
몇 번이나 그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어도 억보로부터 영원히 떠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똑 바로 말 못해? 그놈하고 어디로 도망치기로 약속했지?”
점례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확인하고 싶었다.
점례의 마음만 돌아선다면 유유한 물결의 흐름처럼 이 상처를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감독의 머리통을 작살낼 수 있었지만 어깻죽지만 후려친 건 잘한 일인지 몰랐다.
피를 부른다면,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살의. 그렇지만 몽둥이를 움직일 수 없었다.
억보는 미친 듯 울부짖었다.
다른 힘이 억보의 팔목을 움직일 수 없게 천천히 조여 왔던 것이다.
놔둬란 말이여. 나처럼 되면 안 되지,,,.
“뱃사공 이젠 지긋지긋하단 말이여.”
점례의 발악이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서방 놔두고, 딴 짓이여? 뱃사공도 이제 그만 아녀?
그래도 서방질이여?”
“내가 뭣이 잘못했어? 동생 같은 것이 그래도 서방노릇은 하겠다고?”
“요런 잡것이,,,”
새소리와 더불어 유유히 흐르는 물결 소리,
가난하지만 훈훈한 정들이 넘친 이 나루터.
괴물 덩어리 같은 다릿발이 불쑥 솟아오르면서 전설 속의 모습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아닌가.
그렇지만 억보는 이 나루터에서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신에 모았던 기력이 쇄진해버리고 아랫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손아귀에 굳게 쥐어진 몽둥이가 힘없이 떨어졌다.
‘여기서 살기가 싫다고 서방질이여? 핑계 한 번 좋구나, 그려 니 맘대로 해봐,,,?
어느덧 억보의 억센 주먹이 점례의 목덜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동생 같은 것이 서방노릇까지 헐란다고? 언제는 그런 줄 몰랐남?”
“백 번 쥑여도 싸지 싸. 그렇지만 꼭 이래야만 쓰겠는가?”
노인의 목소리가 여호골 골짜기에서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르르 쾅/ 우르르 쾅/ 하늘도 미친 듯 울부짖고 있었다.
점례의 목 줄기를 조여 가는 억보는 중얼거렸다.
“아부지 정말로 죄송허그만요,,, 정말로,,,”
억보는 기어이 짐승 같은 울음을 쏟아냈다.
*원작출처 : [희구당집1618] -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ljbb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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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목사동 농부소설가, 이재백(李在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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