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로세우기◈

선비정신이란...

Demian-(無碍) 2011. 1. 17. 12:58

*선비 정신(精神)이란......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
     

* 선비 정신(精神)이란...

 

※. 선비의 덕목(德目)

 

1. 人格: 克己復禮로 本性回復.(극기복례,본성회복)

2. 學文: 正心 誠意 格物 致知로 通古今 達事理.(정심,성의,격물치지,통고금,달사리)

3. 經綸: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로 經世濟民.(수신제가 치국평천하,경세제민)

 

※.선비란,

 

모름지기 인격과 학문과 경륜을 갖추고 초야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에 몰두하며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처사를 산림유(山林儒) 라 하고,  과거를 통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등용이 되면

개인의 영욕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박기후인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경세제민을 하는 선비를

묘당유(廟堂儒) 라고, 일커른다.

 

첫째: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행위를 자제하며

인격을 도야하고, 지절을 숭상하여

고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야하며.

 

둘째: 깊고 넓은 학문을 닦아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도리를 터득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야 理와 然否와 事의 是非를

분별하고 판단 할수 있는 진리관을 가지고 있어야하며.

 

셋째: 인류의 문화에 대해 창조적 충동을 느껴 자기의 소임으로 삼고

포부와 경륜을 품고, 실지로 천하대사를 맡았을 때에

이를 능히 수행할수있는 경세제민의 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약, 인격만 갖추고 학문과 경륜이 없으면, 고루하고

학문은 있으나 인격과 경륜이 없으면, 유약하며

경륜은 있으나 인격과 학문이 없으면, 황태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인격과 학문과 경륜을 함께 겸비한 자라야

비로소, 선비의 반열에 설수가 있다.

 

그러나, 세 가지 여건을 선후본말에서 본다면

인격이 근본이요, 경륜은 결과이며, 학문은 중심이다.

학문을 닦아서 도야된 인격이라야, 고명(高名)하고

학문을 뒷받침한 경륜이라야 광대(廣大)하다.

 

그러므로 학문은 선비의 천업(天業)이며,

모든 경징와 창조가 그로부터 나오는 예지(預智)의 원천인 것이다.

선비도 사회의 한 구성원 이므로, 각 분야 생업의 층차에서 본다면

선비도 사회 속의 어느 한 계층에 속함은 틀림이 없다.

 

인격을 도야하고, 학문을 닦고, 경륜을 쌓은 지성인들은

어느 단계에 가서는 사회의 각 기능에 하나를 담당하기 위해,

실업을 취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계층에 속하며, 직분을 맏게되기 때문에

이 때에 지성인들은 대체로, 두 길로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현실 정치 세계에 나아가 백성을 다스리고

다른 하나는 진리의 편에 서서, 대도(大道)를 밝히고 현실정치를 비판한다.

전자묘당유(廟堂儒)라 하고, 후자산림유(山林儒)라고 한다.

 

묘당유(廟堂儒)는 행정권과 상벌권을 가지고 현실을 통어 하지만

산림유(山林儒)는 청의권과 탄핵권을 가지고 정치권력을 견제한다.

관리에게 현실지배의 힘이 있다면,

사림(士林)에게는 역사 심판의 대의(大義)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유가가 이상으로 숭상하는 정치철학이요 제도였다.

 

선비가 두 영역으로 갈라진 영역중에

현실정치의 권한을 행사하는 자를 벼슬아치라하고

역사 심판의 대도(對道)를 지키는 자를 선비라 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선비는 지성인에 속하지만

엄격히 분리하여 말한다면, 산림(山林)에 처하여 계속 학문을 연구하고

도(道)를 후세에 전하며, 정치를 비판하는 학자만을 선비라고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가 유교이념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되었던 사회이다.

따라서 유교를 배우고, 몸소 실천한 선비들이

조선시대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주역이 되었다.

 

※ 선비 정신(精神)

 

선비는 인격의 완성을 위하여 끊임없이 학문에 힘쓰고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릴수 있는 지조를 갖추고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정신을 이끌어 왔으므로

선비는 지조와 절개를 생명처럼 여겼으며, 현실적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계몽하고 선도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선비가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자신의 뜻과 신념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기에, 자기의 신념에 어긋난 일이 있으면,

왕이나 누구에게도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바른 진실을 주장하고 말하며, 사람들의 몽매한 의식을 일깨워 준다.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

*단재-신채호님의 저작(著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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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편집] 기타

 

     

      도산(島山)-안창호(安昌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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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독자투고] 선비정신
 
글/文人畵家 琴岡 宋允煥 (문인화가 금강-송윤환)
[309호] 2011년 01월 12일 (수) 17:53:27 시민신문 영주시민신문

선비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지난날 학식(學識)은 있으나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 또는

학덕(學德)을 갖춘 이를 예(禮)스럽게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있다.

선비의 용어 자체는 우리말로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 또는 지혜(知慧)롭고 현명(賢明)한 사람이다.

공자님의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선비라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승께서 “선(善)을 권면(勸勉)하고 화평(和平)한 모습을 가져야 선비라 할만하다.

즉 친구에게 선을 권면하고, 형제에게 화평한 모습을 갖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선비의 고장 영주는 우리나라 선비정신의 발원지이자, 선비정신 계승의 중심지역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이조 중종37년(1542년) 그 당시 풍기군수로 재직하신

주세붕선생이 절터인 숙수사에 백운당 서원을 건립하면서 안향선생의 위패를 모시면서 시작하여

소수서원이 되면서 퇴계 이황선생의 강학처로 자리 잡으면서 전국의 유생들이 두르막 자락을 날리면서

 이곳에 모여 강학을 하여 벼슬을 하면서 이조시대의 유교문화권의 중핵으로 발전되었다고 알고 있다.

주세붕선생과 퇴계선생은 그 당시 어진 선비를 양성하기 위하여 엄격한 서원규칙을 제정하여

시행하였고 중앙에는 잦은 사화로 유교이념이 훼손되고 선비들이 고초를 겪던 시대였으며

그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선비들이 죽어갔으며 이 어려운 상황에서 진정한 참 선비를 기르기 위해

고민하고 애써왔다.

그리고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선생은 선비란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하고 아래로는

농공(農工) 대열에 끼여야 하며 임금을 깨우치고 피폐한 교육진흥을 위하여야하며 지위로는

등급이 없고 덕으로 올바른 일을 해야 한다.

은택(恩澤)은 사해(四海)에 미치고, 공(功)은 만세(萬歲)에 드리워진다고 하였으며

천하에 공변된 말을 사론(士論)이고, 당대의 제 일류를 사류(士流)이며,

천하(天下)에 의(義)로운 목소리로 외치는 것을 사기(士氣)라 하고,

군자(君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도(道)를 논하는 것을 사림(士林)이라고 하였다.

도(道)와 의(義)를 위해, 몸 바친 영주의 선비들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도라고 하였고

사람이 걸어온 올바른 길을 의(義)라 하여, 의(義)에 합당하면 정치에 나아갔고,

의(義)에 어긋나면 물러남으로, 선비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실천한 퇴계선생의 선비정신을

교육받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대한광복단도 1913년 12월에 풍기에서 조직되어 자주국가 건설을 위한 격동기 세월 속에

선구자의 자취이며 이 땅의 참선비정신의 저항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수 많은 혼란과 외국의 침략을 받음에도

끝까지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선비정신이었다고 생각한다.

유교의 근본목적을 실현해야 하는 선비들은 세상에 나가거나

후회 없이 물러나 살았으며, 물러나서는 강하게 저항하여 세상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또한 선비들은 일신의 영달보다는 인의도덕(仁義道德)의 현실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했다. 이것은 유교적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한 작은 시작이며, 이 지역 선비정신이었다.

이 정신을 본받아 선비문화를 바탕으로 한, 특성을 부각시키고

선비문화중심의 이미지를 조성하여 지역경제성을 선비문화를 중심으로 확립해 볼 수도 있다.

더 크게는 가까운 일본에는 사무라이 정신이 있고, 서양의 신사도 정신이 있다면

한국의 정신문화로는 선비정신이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줄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글 쓴이/文人畵家 琴岡 宋允煥 (문인화가 금강-송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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