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신채호(丹齋 申采浩) 著, 조선 상고사 중에서...발췌함
3.김유신의 戰功(전공)의 많은 거짓
삼국사기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은 전략과 전술이 다 남보다 뛰어나 백전백승의 명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그의 패전은 가려 숨기 고 조그만 승리를 과장한 것이 기록이다.
진덕대왕(眞德大王) 원년(기원 647년)에 백제 군사가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세 성을 공격하므로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으로 항거하였는데 고전을 하여 힘이 다했다.
유신이 비녕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능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격발시키겠는가?” 하였다.
비녕자는 두 번 절하여 응낙하고 적에게 돌진하는데,
그의 아들 거진(擧眞)과 종 합절(合節)이 그 뒤를 따라 세 사람 모두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신라의 삼군(三軍)이 감동하여 앞을 다투어 진격해서 적병을 크게 깨뜨리고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유신이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慶山)군주가 되어---대량주(大梁州 : 곧 大耶州)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니
왕이 “적은 군사로 큰 군사를 대적함이 위태롭지 아니하오?” 하니 유신이 “---지금 우리들은 한마음이 되었으니
백제를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하여 왕이 출병을 허락하였다. 유신이 고을의 군사를 조련하여 대량주 성 밖에 이르니
백제가 항거해 싸우므로 유신은 거짓 패하여 옥문곡(玉門谷)으로 들어가니 백제 군사가 가벼이 여겨 크게 몰려왔다
유신은 복병을 내어 앞뒤로 쳐서 크게 깨뜨려 백제의 장군 8명을 사로잡고 군사 1천여 명을 베었다. 그리고 사자를
백제의 장군에게 보내서 “우리 군주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너희 옥중에 있으니---네가 죽인 두 사람의 뼈를
보내면 나는 살아 있는 여넓 사람을 돌려주겠다·”라고 하니, 백 의 유골을 돌려보내므로 유신은 사람을 돌아가게 하고
이긴 기세를 타 백제의 경계를 넘어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빼앗고서 1만 명을 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이 공으로 유신은 이찬 (伊飡)의 작위를 받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總管)이 되었으며, 진례(進禮) 등 9성을
도륙하여 9천여 명을 베고 6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2년(기원 648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유신 · 죽지 (竹旨) · 진춘(陳春) ·
천존(天存) 등 장군 에게 명하여 삼군을 다섯 길로 나누어 백제군을 치게 하였는데, 서로 지고 이기고 하여 열흘이
되도록 풀리지 아니하여 시체가 들에 널리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었다. 유신 등이 도살성 (道薩城) 아래에 주둔하여
말과 군사를 쉬게 해가지고 다시 공격하려고 하는데 마침 물새가 동쪽에서 날아와 유신의 군막 위를 지나갔다.
군사들이 모두 불길한 징조라고 하니 유신이 말했다. “오늘 백제의 정탐이 올 것이니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라·” 하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수비를 견고히 하여 움직이지 말아라. 내일 구원병 오는 것을 기다려 싸울 것이다·” 하였다.
백제의 정탐이 돌아가 은상에게 이 말을 고하여 은상은 구원병이 오는 줄 알고 의심하며 두려워했다. 유신 등이
일시에 내달아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달솔(達率) · 정중(正仲)과 군사 1백 명을 포로로 하고, 좌평 ·
은상·자견(自堅) 등 10명과 군사 8,980명을 베 고, 말 1만 마리와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하고 그 밖에 기계도
수없이 노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므로 놓아주었다.
본기의 기록도 이와 비슷한데 악성 (嶽城)은 연혁을 알 수 없으나 진례 (進禮)는 용담(龍潭) · 진안(鎭 安) 사이의
진잉을(進仍乙 : 고구려의 본 이름인데 신라에서 진례라 하였음)이므로 악성도 그 부근일 것이니, 이것은
전라도의 동북지방 이 신라의 위협을 받은 것이고, 석토(石吐)는 연혁을 알 수 없으나 도살성이 곧 청안(淸安)의
옛 이름이므로 석토도 그 부근일 것이니, 이 것은 충청도의 동북지방을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유신이 이처럼 늘 승리를 거두었다면 백제의 국토가 몹시 쇠퇴했을 것인데 당 서(唐書)에는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의 구원을 청한 말에 “큰 성과 요긴한 진(鎭)이 다 백제가 차지한 바가 되어
국토가 날로 줄어들었습니다---다만 옛 땅도 도로 찾는다면 강화를 청하겠습니다.
(大城重鎭 竝爲百濟所竝 疆宇日蹙 ---但得古地 卽請交和)”라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태종대왕이
백제를 정벌하고자 당에 군사를 청하였는데 일찍이 혼자 앉아 있으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太宗大王 欲伐百濟 請兵於唐 嘗獨坐 憂形於色)”고 하였다. 이때에 백제는 성충(成忠) · 윤충(允忠) ·
계백(階伯) · 의직(義直) 등 어진 재상과 이름난 장 수가 수두룩하고, 사졸들은 숱한 싸움을 겪어서
도저히 신라의 적이 아니었으니, 김유신이 몇 번 변변찮은 작은 싸움에서는 이겼었는지 모르지마는
기록과 같이 공이 혁혁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4. 김유신 특유의 음모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유신의 전공이 거의 거짓 기록이라면 김유신은 무엇으로 그렇게 일컬어졌는가?
김유신은 지혜와 용기있는 명장이 아니라, 음험하고 사나운 정치가요, 그 평생의 큰 공이 싸움터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사람이다. 그 실례를 하나 들겠다. 신라 부산현(夫山縣 : 지금 송도 부근) 현령(縣令)
조미곤(租未坤)이 백제의 포로가 되어 백제 좌평 임자(任子)의 집 종이 되었는데,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임자를 섬겨
자유로이 밖에 드나들게 되자 가만히 도망해서 신라에 돌아와 백제 국내의 사정을 고하였다. 유신이 말했다.
“임자는 백제 왕이 사랑하는 대신이라니 내 뜻을 알려 신라에 이용되게 하면 그대의 공이 누구보다도 클 것인데,
그대가 능히 위험을 무릅쓰고 내 말대로 하겠소?” 조미곤이 말했다.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이에 조미곤은 유신의 밀령을 받고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이 나라의 신민이 되어 이 나라의 풍속을
모른다는 것은 안 될 일이기에 미처 아뢰지 못하고 나가 다니다가 돌아 왔습니다.”라고 하니, 임자는 이 말을
곧이듣고 의심하지 않았다. 조미곤이 틈을 타 임자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실은 고향을 생각하여 신라에 갔다 왔고
먼젓번 말은 한때 꾸민 말이었습니다. 신라에 가서 김유신을 만나보았는데, 유신의 말이 백제와 신라가 서로 원수가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아니하니, 두 나라 중 한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인데 그러면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지금의 부귀를 잃고 남의 포로가 될 것이니 원컨대 우리 두 사람이 미리 약속하여 신라가 망하면 유신이
공에 의지해 백제에서 다시 벼슬을 하고, 백제가 망하면 공이 유신에게 의지해 신라에서 다시 벼슬을 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망하든지 우리 두 사람은 여전히 부귀를 보전할 것이 아니겠소 하는 자기의 뜻을
말씀드려 보라고 하였습니다. ” 임자가 잠자코 아무 말이 없자 조미곤은 송구스러워하며 물러났다.
며칠 뒤에 임자가 조미곤을 불러 전일에 한 말을 물으므로 조미곤이 다시 유신의 말을 되풀이하고 이어
“나라는 꽃과 같고 인생은 나비와 같은 것인데, 만일 이 꽃이 진 뒤에 저 꽃이 핀다면 이 꽃에서 놀던 나비가
저 꽃으로 옮겨가 사시를 항상 봄처럼 놀아야 할 것이 아닙니 까? 어찌 구태여 꽃을 위해 절개를 지켜 부귀를 버리고
몸을 망치겠습니까?” 하였다. 임자는 원래 부귀에 얼이 빠진 추악한 사나이였으므로 이 말을 달게 여겨 조미곤을 보내
유신의 말에 찬성하였다. 유신이 다시 임자에게 “한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하지 못하면 부귀가 무슨 뜻이 있겠소?
들으니 백제에는 성충이 왕의 총애를 받아 모든 것이 다 그의 뜻대로만 되고, 공은 겨우 그 아래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낸다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하고 백방으로 꾀어 부여 성충을 참소하게 하고, 마침내는
요망한 계집 금화(歸花)를 임자에게 천거하여 백제 왕궁에 들여보내게 해서 부여성충 이하 어진 신하들을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서 백제로써 백제를 망치게 하였다.
(제3장) 扶餘成忠(부여성충)의 자살
1.錦花(금화)와 任子(임자)의 讚訴
임자는 김유신이 보낸 무당 금화를 미래의 화복과 국가 운명의 길고 짧음을 미리 아는 선녀라 일컬어 의자왕에게
천거하였다. 왕이 이에 혹해서 금화에게 백제 앞날의 길흉을 물었다. 금화는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신의 말을
전한다고 “백제가 만일 충신 형제를 죽이지 아니하면 눈앞에 나라가 망하는 화가 미칠 것이요, 죽이면 천년만년
영원히 국운이 계속되리라.” 하였다. 왕이 말했다. “충신을 쓰면 나라가 흥하고 충신을 죽이면 나라가 망함은
고금을 통한 이치인데, 이제 충신 형제를 죽여야 백제의 국운이 영원할 것이라고 함은 무슨 말이냐?” 금화가 말했다.
“그 이름은 충신이지마는 실은 충신이 아니기 때문입 니다.” “충신 형제란 누구란 말이냐?” 하고 왕이 물으니
금화는 “첩은 다만 신의 비밀한 맹령을 전할 뿐이고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왕은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형제 가 다 이름에 충(忠) 자가 있어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임자는 왕의 성충에 대한 마음이 흔들렸음을 알고 그를 참소하여 내쫓으려고 하였다. 왕이 마침 임자와 한가로이
술을 마시게 되자 임자에 게 물었다. “성충은 어떠한 사람이오?” 임자가 “성충은 재주와 계략이 또래 중에서
뛰어나 전쟁의 승패를 미리 획책하면 백에 한 번도 실 수하는 일이 없고, 남의 뜻을 잘 짐작하며 말솜씨가 있어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가면 임금을 욕되게 하지 아니합니다.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 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재가 있는 만큼 그를 다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이 들으니 성충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연개소문과 친밀해서 연개소문더러, ‘고구려에 공이 있고 백제에 성충이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천하에 얻지 못할 것이 있겠소? ’ 하여 엄연히 백제의 개소문을 자처하고, 개소문은 성충에게
‘나나 공이 아직 대권(大權)을 잡지 못하였음이 한이오. ’ 하며 성충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성충이 이같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나라의 권세있는 신하와 정의가 매우 가깝고, 또 그의 아우에
윤충 같은 명장이 있으니, 신은 대왕께서 만세(萬歲)하신 후에는 백제는 대왕 자손의 백제가 아니요
성충의 백제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은 윤충을 파면하여 소환하고 성충을 소홀히 대접하였다. 이 때 윤충은 바야흐로 월주(越州 )에서
장사를 훈련하여 당의 강남(江 南)을 온통 집어 삼키려고 하는 참이었는데 갑자기 참소를 만나 파면 되어서
돌아오니 오래지 않아 월주는 당에게 함락되었다. 그래서 윤충 은 울분하여 죽었다.
2. 成忠(성충)의 자살과 그 무리의 축출
윤충이 죽고 성충도 물리쳐지니 금화는 더욱 기탄없이 의자왕에게 권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왕흥사(王興寺)와
태자궁(太子宮)을 지어 나 라의 재정이 마르게 하고, 백제 산천의 지덕(地德)이 험악하니 쇠로 진압해야 한다고
각처 명산에 쇠기둥 또는 쇠못을 박고 강과 바다에 쇠그릇을 던져넣어 나라 안의 철이 동이 나게하니,
나라 사람들이 금화를 원망하여 ‘불가살’이라 일컬었다. ‘불가살’은 백제 신화(神話)의 ‘쇠 먹는 신’의 이름이었다.
이에 성충이 상소하여 임자와 금화의 죄를 통렬히 논란하였으나 왕의 좌우가 다 임자와 금화의 심복이었으므로
다투어 성충을 참소하기 를 “성충이 대왕의 총애를 잃은 뒤로 늘 울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늘날
이런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성충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興首)를 고마미지
(古馬彌知 : 지금의 長興)로 귀양보내고, 서부은솔(西部恩率) 복신(福信)을 파면하여 가 두니 이들은
다 성충의 무리였다. 성충은 옥중에서 다시 유언의 상소를 올려 “충신은 죽을지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느니
신이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천시 (天時)와 인사(人事)를 살피건대, 오래지 않아 전화(戰禍)가
있을 것 입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지세를 택하여 위쪽에 처해서 적에 대응 해야만 만전(萬全)합니다.
만일 적병이 침입하거든 육로로는 탄현(炭峴)에서 막고, 수로로는 백강(白江)에서 막아 험한 곳에 웅거해
싸워야 합니다.” 하고는 음식을 끊어 28일 만에 죽으니 곧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이 죽기 한 해 전이었다.
탄현은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여산(礪山) 탄현(炭峴)이라 하고,
백강은 지금의 부여(扶餘) 백강(白江)이라고 하지마는 백제가 망할 때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고
당의 군사가 백강을 지난 뒤에 계백(階伯)이 황산(黃山 : 지금의 連山 부근)에서 싸우고, 의직(義直)이
부여 앞장에서 싸웠으니 탄현은 지금 보은(報恩)의 탄현이고, 백강은 지금 서천 (舒川) 백마강(白馬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 흥수(興首)의 이른바 기벌포(伎代浦)이다. (다음 장 참조)
(제4장) 신라 · 당 두 나라 군사의 침입과 백제 의자왕의 집합
1. 신라와 당의 연합군 침입
기원 654년 진덕여대왕(眞德女大王)이 돌아가고 김춘추(金春秋)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이른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태종의 아버지 용춘(龍春) 때부터 이미 왕의 실권은 그가 가지고 있었지마는
다만 동서인 백제 무왕(武王)과의 왕위 다툼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자 왕의 명의는 첫번에는 선덕(仙德),
다음에는 진덕(眞德), 곧 출가하여 여승이 된 두 여인에게 준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두 나라의 갈라진
상처가 다시 아물 수 없게 깊어졌으므로 태종은 왕의 명의까지도 차지 한 것이었다.
태종이 왕이 되자 더욱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보복을 서두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백제의 침노가 심하므로
태자 법민(法敏)을 당에 보내서 구원병을 청하였다. 당은 이때 태종이 죽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여
고구려에 대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여러번 고구려를 공격 하였다가 다 실패하였으므로,
이에 먼저 신라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쳐 없앤 다음에 다시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태종의 청을 허락하였다.
2. 皆伯(계백)과 義直(의직)의 전사
기원 660년 3월에 신라 왕자 인문(仁問)이 당의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내주(내州)부터 바다를 건너 6월에 덕물도(德勿島 : 지금 南陽의 德勿島)에 이르렀다.
신라 태종이 금돌성(今突城:지금의 陰城)에 진을치고, 태자 법민과 대각간(大角干) 김유신과 장군 진주(眞珠) ·
천존(天尊) 등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으로 맞이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신라 당 두 나라 군사가
수륙으로 나뒤어 신라 군사는 육지로 쫓고, 당의 군사는 물로 쫓아 7월 10일에 백제 서울 소부리(所夫里)에서
집합합시다.” 하므로, 법민 · 유신 등이 다시 금돌성으로부터 돌아와 김품일(金品日 ) · 김흠순(金欽純)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향하였다. 그제야 의자왕은 깊은 밤의 연회를 파하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싸우고 지킬 방법을 의논하는데 좌평 의직 (義直)은 “당나라 군사가 물에 익숙지 못한데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반드시 피곤할 것이니 뭍에 내리자마자 돌격하면 깨뜨리기 쉬울 것이고,
당의 군사를 깨뜨리면 신라는 저절로 겁이 나서 싸우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 하였고, 좌평 상영(常永)은
“당의 군사는 멀리 와서 빨리 싸우는 것이 이로울 것이므로 뭍에 내릴 때에는 장수와 군사들이 다 용감하게
싸울 것이니 험한 곳을 막아 지켜서 저네가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해이해진 뒤에 싸우는 것이 옳고,
신라는 일찍이 여러 차례 우리 군사에게 패하여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먼저 신라 군사를 쳐 깨뜨리고
다시 형편을보아 당의 군사를 치는 것 이 좋습니 다. ”라고 하여 의론이 분분하였다. 의자왕이 전에는
평시나 전시를 물론하고 용단(勇斷)을 잘 내렸는데, 이때에 와서는 요망한 무당과 여러 소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의외로 흐리멍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홀연히 지모(智謀)로 이름있던 좌평, 일찍이 성충의 무리로 지목되어
고마미지(古馬彌地 : 지금의 長興)에 귀양간 부여흥수(扶餘興首)를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서 그에게 계책을 물었다.
흥수는 “탄현(炭峴)과 기벌포(伎伐浦)는 국가의 요충이라 한 사람이 칼을 빼어들고 막으면 만 사람이 덤비지
못할 곳이니, 수륙의 정예를 뽑아서 당의 군사는 기별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왕성을 지키다가 저네 두 적이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로해진 다음에 맹렬히
공격하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니 임자 등은 성충의 남은 무리들이 다시 등용될까 두려워서
“흥수가 오래 귀양가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 고 성충의 옛 은혜를 생각하여 항상 보복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성충이 남긴 상소의 찌꺼기를 주워서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는 것이니
그의 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당의 군사는 기벌포를 지나 들어오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어 들어오게 한 다음에 힘써 공격하면
독 안에 든 자라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하면 두 적을 다 분해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험한 데를 막고
적병과 대치하여 시일을 허비해서 군사의 용기를 줄게 합니까?” 하였다. 왕은 그의 말이 옳다 하여
다시 궁녀들로 하여금 술을 올리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전쟁이 눈앞에 있음을 잊었다.
7월 9일에 신라 대장 김유신 · 김품일(金品日 ) 등이 5만 군사를 거느리고 탄현을 지나 황등야군
(黃登也郡 : 지금의 論山 · 連山 사이)에 이르니 의자왕이 장군 부여 계백을 보내 신라 군사를 막게 했다.
계백은 출전에 임하여 “탄현의 천험(天險)을 지키지 않고 5천의 군사로 10배나 되는 적을 막으려 하니
내일의 일을 내가 알겠다.” 탄식하고 처자를 불러 “남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하고
칼을 빼어 다 죽이고 군중에 나아가 군사들을 모아놓고 “고구려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5천의 무리로 당의 군사 70만을 깨뜨렸으니, 우리 5천의 군사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당할 것인데
어찌 신라의 5만 군사를 두려워하겠느냐?” 하고는 군사를 몰아 달려가 황등야군에 이르러 험한 곳에
웅거해서 세 진영에 나뉘어 싸우니 김유신 등이 네 번 공격하였다가 네 번 다 패하여 만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김유신은 싸워서 이길 수는 없고 당의 군사와 약속한 7월 10일이 되어 다급해서 품일과 흠순을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데 당의 군사가 홀로 싸우다가 패하면 신라의 수십 년 공들인 일이
헛일로 돌아갈 것이고, 당의 군사가 이기면 비록 남의 힘으로 복수는 하였다 하더라도 신라가 당의 업신여김에
견디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하면 좋겠소?” 품일과 흠순이 “오늘 열 갑절의 많은 군사로 백제를 이기지 못한다면
신라 사람은 다시 낯을 들지 못할 것이오. 먼저 내 아들을 죽여 남의 자제들을 죽도록 격려하여 혈전을 벌이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흠순은 그의 아들 반굴(盤屈)을, 품일은 그의 아들 관창(官昌)을 불러
“신라의 화랑이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 1만의 화랑으로 수천의 백제 군사를 이기지 못한다면,
화랑은 망하고 또 신라도 망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화랑의 두목이 되어 화랑을 망치고 말겠느냐?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할 것이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할 것인데, 위급함을 당하여 목숨을 바쳐야만
충과 효를 다했다고 할 것이다. 충효를 다하고 공명을 세우는 것이 오늘 너희들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반굴이 “네.” 하고 그 무리와 함께 백제의 진으로 돌격해 다 전사하였다. 관창은 나이 겨우 16 살로 화랑 중에서도
가장 어린 소년이었는데, 반굴의 뒤를 이어 혼자 서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몇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혔다.
계백이 소년의 용감함을 사랑하며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신라에 소년 용사가 많으니 가륵하다. ” 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관창은 아버지 품일에게 “오늘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베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고, 물을 움켜 마셔 목마름을 풀고는 다시 말에 채찍질하여 창을 들고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었다.
계백이 그를 쳐죽여 머리를 말꼬리에 매달아서 돌려보냈다. 품일이 이것을 보고 도리어 기뻐서 뛰며
“내 아들의 면목이 산 사람 같구나. 나라 일에 죽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 ”라고 외치니
신라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용기가 났다. 이에 유신이 다시 총공격의 명령을내려 수만명이 일제히 돌진 하였다.
계백이 친히 북을 쳐 응전하매 두 나라 군사가 참으로 용감하였지마는 수효가 너무도 모자라니 어찌하랴.
한갓 성스럽고 깨끗한 희생으로 전장에서 쓰러져 백제 역사의 끝장을 장식하였다. 신라 군사는
개가를 부르며 백제의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 당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백강(白江) 어귀 기벌포에 이르러 끝없는 진펄에 행군할 수가 없어서
풀과 나무를 베어다가 깔고 간신히 들어오는데, 백제의 왕은 임자의 말대로 독 안에서 자라를 잡으려고
그곳을 지키지 않고, 수군은 백강(白江 : 지금의 白馬江)을 지키고 육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당의 군사는 이미 진펄을 지났으므로 용기가 갑절하여 백제의 수군을 깨뜨리고 언덕으로 올라 왔다.
의직은 군사를 호령하여 격전을 하다가 죽었다. 의직은 지략이 계백 만은 못하지 마는 용감하기는 비등하여
한때 당나라 군사들의 담을 서늘케 하였으므로 신라 사람이 의직의 죽은 곳을 조룡대(釣龍臺)라 이름 하였으니,
의직을 용에 비유하고 의직을 죽인 것을 용을 낚아 올린 것에 비유한 것이었다. 여지승람(與地勝覽)에는
“소정방이 백강에 이르자 비바람이 크게 일어서 행군할 수가 없으므로 무당에게 물으니 강의 용이 백제를
수호하는 것이라 하므로 소정방이 흰 말을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아 잡았으므로, 강은 백마(白馬)라 이름하고
그곳을 조룡대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백마강이란 이름이 이미 소정방이 오기 전에 있었으므로
성충의 유언한 상소에도 백강 어귀를 말하였었다. 백강은 백마강의 준말이고, 일본사에는 백촌강(白村江)이라
일컬었는데 촌(村)은 뜻이 ‘말’이니 백촌강은 곧 백마강의 별역(別譯) 이다. 그 이야기 자체가 허황할 뿐 아니라
또한 역사와도 모순되니 해상잡록에 보인 바와 같이 의직의 죽은 곳이라고 한 것이 옳을 것이다.
3. 義慈王(의자왕)이 잡히고 백제의 두 서울이 함락됨
김유신 등이 계백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 이튿날인 11일에 백마강에 다다르니 소정방이 약속 기일이 지났다고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 (金文穎)을 목베려고 하였다. 유신은 당이 신라를 속국으로 대하려는 것이 분하여
눈에서 불이 떨어지는 듯 어느덧 칼을 빼어들고 여러 장 수들을 돌아보며 백제는 내버려두고 당과 싸우자고 외치니,
당의 장수 중에 이것을 탐지한 자가 있어 소정방에게 말하여 마침내 강문영을 풀어주고 두 나라 군사가 합세하여
‘솝울’(所夫里)을 공격하였다. 의자왕은 태자 외에 적자가 몇 있고 서자가 40여 명이 있어 왕이 평일에 그들에게
다 좌평(佐平)의 직함을 주어 나라의 큰일에 다 참모하고 심지어 실권도 행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대략 세 파로
나뉘어졌다. 태자 효(孝) 등은 북경 (北京) 곰나루성 [熊津城]으로 가서 웅거하여 전국의 의병을 모으자고 하였고,
둘째 아들 태(泰)는 솝울을 지켜 부자(父子) · 군신(君臣)이 힘써 싸우면서 각지의 의병을 기다리자고 하였으며,
왕자 융(隆) 등은 고기와 술과 폐백을 적군에게 올려 물러가기를 빌자고 하였다. 사오십 명의 적자 서자들이
왕의 앞에서 제각기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떠들어대니 왕이 어느 의견을 좇아야 할지 몰라서 왕자의 말을
다 허락하여 융에게는 강화의 권한을 맡기고 태에게는 싸워 지킬 권한을 맡기고, 자기는 태자와 함께
북경 곰나루성으 로 도망하였다.
융이 소정방에게 글을 보내 퇴군하기를 요청하고 고기와 술을 보냈다가 다 거절당하니 둘째아들 태가
대왕의 자리에 올라 군사와 백성들을 독려하여 방어전을 펴는데,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대왕과 태자께서
생존해 계신데 삼촌이 어찌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가? 만일 일이 평정되면 삼촌을 쫓던 자는 다 역적의 죄로
죽을 것이다·” 하고 좌우를 거느리고 성에서 달아나니 백성이 모두 그를 따르고 군인들도 싸울 뜻이 없었다.
융은 또 화의를 성립시키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겨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하니 신라와 당의 군사가
성 안으로 올라갔다. 왕후와 왕외 희첩(姬妾)과 태자의 비빈(妃嬪)들은 모두 적병에게 욕보지 않으려고
대왕포(大王浦)로 달아나 바위 위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어 낙화암(落花巖)이란 바위 이름이 생겨서
지금까지 그 곧은 절개를 전한다. 다른 여러 아들들은 혹은 자살하고 혹은 달아났다.
의자왕은 곰나루성으로 달아나 성을 지키는데 수성대장(守城大將)이 곧 임자(任子)의 무리라 왕을 잡아
항복하려고 하였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동맥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태자 효(孝)와
소자 연(演)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의 진영으로 묶여갔다. 당의 장수 소정방은 거의 죽게 된 의자왕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제도 대국에 항거하겠느냐?” 하고 장난거리를 삼고, 신라 태자 법민(法敏)은
왕자 융을 마구 굴리며 “네 아비가 우리 누이 부부를 죽인 일이 생각나느냐 ? ” 하고 앙갚음을 하였다.
신라 태종이 소정방에게 치사하기 위하여 금돌성(今突城)에서 솝울로 달려갔다.
소정방은 일찍이 당의 고종으로부터 백제를 토벌하면 기회를 보아 신라를 쳐 빼앗으라는 밀명을 받고 왔었으므로
신라의 틈을 엿보고 있는 참이었다. 김유신이 이것을 알고 태종에게 아뢰어 어 전회의를 열어 대항책을 강구하는데
김다미(金多美)가 말했다. “우리 군사로 하여금 백제의 옷을 입고 당의 군영을 치면 당의 군사가 나와 싸우면서
우리 군영에 구원을 청할 것이니 그때 불의에 습격하면 당의 군사를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백제 전역을 수복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화친하고 서쪽으로 당에 항거하며 백성을 위무하고 군사를 길러
때를 기다렸다가 동병(動兵)하면 누가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태종이 말했다. “이미 당의 은혜를 입어
적국을 토멸하였는데 또 당을 치면 하늘이 어찌 우리를 돕겠느냐?”김유신이 “개 꼬리를 밟으면 주인이라도
무는 법입니다. 이제 당이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 우리의 꼬리를 밟을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를 깨려고 하니
어찌 그 은혜를 생각하겠습니까?” 하고 당을 치기를 굳이 권하였으나 태종은 끝내 듣지 아니하고 군중에 명하여
엄중히 대비만 하게 할 뿐이었다.
소정방은 신라의 경계함을 알고 음모를 중지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함창(咸昌 : 尙州) 당교(唐橋)에서
당의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는 설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사실이 없는 말이라고 변명하였다.
백제는 수없이 전쟁을 한 나라이므로 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하고 의리에 용감하나 유교를 수입한 이래로는
일반 사회가 명분이라는 굴레에 목을 매여 성충과 흥수가 비록 외적을 평정할 만한 재주와 지략을 가졌으나
명림답부(明臨答夫)와 같이 폭군을 죽일 만한 기백이 없었고, 계백과 의직이 비록 자기 몸과 집안을 희생하는
충렬(忠烈)을 가졌으나 연개소문과 같이 내부를 숙청할 수완이 없어서 마침내 망령된 의자왕을 처치하지 못하여
임자 등 소인의 무리들로 하여금 수십 년 동안 정치상의 중심을 잡고, 평시에는 나라의 재물을 자기네의 몸의
향락에 써서 탕진하고 난시에는 나라를 들어 적국에 투항하게 하였다. 중경(中京)과 상경(上京)이 다 왕자의
투항으로 망하고, 그 밖 에 삼경(三京)과 각 고을들도 또한 모두 반항없이 적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인민의 ‘다물(多勿)’ 운동(나라를 되찾자는 운동)은 의외로 격렬하여 임금과 관리들이 나라를 판 뒤에
분기하여 맨손으로 적병과 싸워 망국의 마지막길 역사를 혈우(血雨)로 끝맺었다.
만일 그들이 유교의 명분설(名分設)에 속지 않고 혁명의 기분을 가졌더라면 어찌 간사한 자들이
나라를 망치도록 내버려두었으랴?
이제 다음 장에 백제의 다물운동(多勿運動)에 대하여 그 대강을 말하려 한다.
*** 단재-신채호(丹齋 申采浩) 著, 조선 상고사 중에서...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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